20230319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 시리즈 (6) 예수님처럼 되도록 이끄는가? (골로새서 3장 1-14절)

 

Intro : 조정

일명 보트 레이스라고 불리는 [조정](Rowing) 은 2, 4, 8명의 선수들로 구성된 한 팀이 규정된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속도를 경쟁하는 운동 경기 입니다. 여러 척의 배가 일제히 출발하여 정해진 거리까지 누가 빨리 가는지 스피드를 겨룹니다. 세계 선수권 경기의 경우 2000 미터나 되는 직선 코스를 사용합니다. TV에서 조정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TV 안에서 보게 되는 보트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쉽게 나아갑니다. TV로 볼 때는 매우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인한 체력과 지구력, 그리고 무엇보다 노를 젓는 8명의 팀원들의 빈틈 없는 팀워크가 요구되는 팀스포츠 입니다. 8명의 팀원들이 평균 20kph 의 속도로 강을 질주 하니 얼마나 빠르겠습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조정에서 8명의 선수들은 배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앉아 노를 젓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선수가 결승선을 등지고 노를 젓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올바르게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배에는 8명의 선수들 말고도 또 한 명의 선수가 타고 있습니다. 이 선수는 노를 젓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의 맨 뒤 쪽에 앉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선수를 가리켜 ‘콕스’라고 합니다. 그는 혼자 배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앉아서 배의 키를 잡고 있습니다. 배가 제대로 나아가도록 해 선수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또한 콕스는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려 경기를 운영하는 코치 역할도 겸합니다. 콕스는 배의 선장과도 같습니다. 그는 선수들에게 노를 얼마나 빠르게 저어야 할지 명령합니다. 콕스가 “Stroke!”(스트로크) 하고 외치면 선수들이 노를 저어 배를 움직입니다. 콕스가 “Spurt!” (스퍼트) 하고 외치면 선수들은 노에 가해지는 힘을 높이고 속력을 내어 움직입니다. 콕스가 “Easy Oar!” (이지올!)하고 외치면 선수들이 노 젓는 동작을 멈춥니다. 조정 선수들이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트 위에서 이 콕스의 커멘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8명의 선수들이 콕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노를 저으면 어떻게 될까요? 배가 방향이 틀어집니다. 그리고 배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배를 타고 있는 선수들은 더욱 지치게 되고, 배는 원하는 목적지에 들어가기 어려워 집니다. 반대로 조정 선수들이 콕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노를 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배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스무스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선수들도 힘이 덜 들고, 더 쉽고 빠르게 배가 결승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조정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콕스 되시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살아갈수록 우리는 더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보람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수록 신앙생활은 재미없게 느껴지고 믿음이 덧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며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의 콕스 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조정에서 배를 타고 있는 선수들의 목적이 결승선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바라봐야 하는 결승선은 어떤 모습 일까요?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것, 구원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과만 중요시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님은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이란 항해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더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인생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A와 B중에 고민하고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방향을 선택하십시오. 예수님께서 택하실 길을 선택하십시오.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변화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본문 골로새서 3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외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조건절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 이미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로 인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에 영적으로 보면 이미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일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 이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영접하게 될 때 예수님은 그 안에 들어 오시기 됩니다. 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이제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제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유년부 전도사로 섬길 때 봄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근처 공원에 가서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싱그러운 봄바람 속에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야외에서 찬양도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후 준비해 온 김밥을 점심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들판에서 뛰며 놉니다. 그러다가 봄소풍의 하이라이트 시간인 보물 찾기 시간이 찾아옵니다. 주일 예배 전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미리 준비 된 종이 쪽지를 공원에 있는 나무나 풀이나 벤치에 숨겨 둡니다. 아이들이 돌아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숨겨둔 쪽지를 발견하면, 보물을 찾았다고 크게 기뻐합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공원에서 뛰 놀던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공원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면 아이들이 공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합니다. ‘어디에 보물이 있지?’하며 너도나도 보물 찾기에 집중합니다. 평상시 잘 살펴보지 않았을 나무도 꼼꼼하게 찾아보고, 허리를 숙여 풀 속을 살피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보물은 이 땅에 있습니까 아니면 저 하늘에 있습니까? 내가 찾아야 하는 보물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저 하늘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다를까요? 완전히 다른 모습이겠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찾아야 할 보물이 하늘에 있음을 깨닫고 바로 그 하늘 보물을 찾으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 중 ‘찾으라’는 말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둔 보물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주변을 샅샅이 열심으로 뒤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하는 하늘에 있는 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하늘에 있는 보물은 여러가지 입니다. 먼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구원, 영원한 생명도 귀한 보물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주님께서 그의 충성된 백성들에게 주실 상급도 귀한 보물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너희는 위의 것을 찾으라”는 이 말씀은 다르게 해석하면 “위의 있는 것들에 너의 마음을 두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성경 NIV 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Set your hearts on things above, where Christ is.” 즉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6:20-21]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세상에도 분명 보물들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금, 은, 돈 등등 다 보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보물들은 곧 사라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늘 나라에는 이 지상의 보물들은 하나도 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1절에 이렇게 말슴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즉 나의 보물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이 온통 땅에만 있습니다. 주식에 빠진 분들 보십시오. 하루 종일 모니터랑 스마트폰만 보고 삽니다. 거기에 내 보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식 뿐만이 아닙니다. 부동산에 빠진 사람, 복권에 빠진 사람, 돈 불리는 데 재미 든 사람 등 이 세상에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에 혈안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찾아야 하는 진정한 보물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에 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 아내하고 마트에 가면, 입구에는 함께 들어가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따로 물건을 사기 위해 잠시 흩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필요한 물건을 사고, 아내는 아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 옵니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같이 만납니다. 나중에 아내가 구입하는 물건을 보면 “아, 이 마트에서는 저런 물건도 파는구나?”하고 신기해 합니다. 제 아내도 “오, 여기서 그런 것도 팔아?”합니다. 참 신기하죠? 똑같은 마트에 갔는데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 온 느낌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들은 24시간 일주일을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보물들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재물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식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큰 집,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명품 옷, 명품 가방을 사는 것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요즘 재미에 빠진 새로 시작한 드라마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보물이라고 여길만한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풍요로운 삶, 즐거운 삶, 기쁜 삶 제가 이것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도, 즐거움도 복으로 주십니다. 제가 지금 외딴 산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수도승처럼 금욕을 하고 살라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너무나도 빠르게 주객이 전도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뭐가 더 소중한 것인지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남자 어린 아이에게 로보트 장난감 하고 아빠하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더니 로보트 장난감을 골랐습니다. 어린 소녀에게 골든 리트리버 강아지하고 엄마하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니 강아지를 골랐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짝이며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세상 것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로보트 장난감이 좋아도 아빠 보다 귀하겠습니까? 아무리 강아지가 예뻐도 엄마 보다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재산 때문에 부모를 칼로 찌르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돈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유산 때문에 의가 상하는 형제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요? 부모, 배우자, 형제 보다 돈이 더 중요할까요? 그런데도 이런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아빠보다 로보트 장난감을 택한 어린 아이처럼, 엄마보다 강아지를 택한 어린 아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있는 탐욕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수간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우리들을 하나님의 일로 인도합니다. 이 땅의 것들이 아닌, 하늘의 것들을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죽이도록 인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죽이도록 인도합니다. 골로새서 3장 5-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에 있는 지체’란 우리 육신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에게 자살을 행하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말이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땅에 있는 지체’란 죄악된 본성, 즉 옛 사람을 가리킵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님 믿기 전에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에는 돈 많이 버는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그 보다 더 큰 기쁨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전히 예수님 믿으면서도 돈은 법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쾌락을 위해 쓰는데 사용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그 돈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이웃들을 돕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돈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돈이 주인의 자리에 있고 내가 돈을 위해 살아가는 노예의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나니 이제 예수님께서 주인의 자리에 앉아 계시고 돈은 그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나를 돕기 위한 종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가 주인이 되고, 내가 누리는 세상 모든 것이 그 분을 위해 복종하게 되는 종의 자리에 안게 되는 모습이 바로 죄악된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소파를 사려고 하는 사람 눈에는 소파 밖에 안 보입니다. 예전에는 집에 마트에서 오는 전단지 오면 다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이제는 혹시 소파는 세일 안하나 찾아봅니다. 그리고 찾으면 매우 관심 있게 봅니다.길을 지나가도 가구 파는 가게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 집에 초대 받아도 그 집 소파 밖에 안 보입니다. 은행에 가도 소파만 보이고, 병원에 가도 소파만 보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소파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똑같은 사람이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 나겠습니까? 어딜 가도 예수님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처럼 살아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오락거리들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주는 기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사도 바울은 5절 말씀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땅의 지체에 해당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땅의 지체에 대한 설명을 하며 총 5가지가 등장하는데요, 이 중 나머지 4개는 다 ‘탐심’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먼저 음란과 악한 정욕은 모두 성에 대한 탐심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결혼 관계 외적인 대상과의 성적인 관계나 성적 탐욕을 의미합니다. 지난 2012년도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 가정 중 무려 22%가 배우자의 외도를 경험했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배우자의 외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90% 밖에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머지 10%는 배우자의 외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2012년 자료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렇다면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작년 2022년 통계를 보니까 “나는 평생 일부일처제로 살겠다”라고 대답한 미국인이 66%로 나왔습니다. 나머지 34%중 6%는 평생 미혼으로 살겠다는 사람들도 있고, 10%는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고, 무려 18%가 일부일처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표본오차가 약 3% 정도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 100명 중 최소 15명은 불륜이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불륜이 도덕적으로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현재 미국에서 불륜 때문에 이혼하는 가정이 전체 이혼 중 2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불륜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한 통계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만,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보면 대학가의 동거 문화가 확산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청년층에서도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살아가도 된다고 찬성하는 숫자가 50%를 넘었습니다. 이처럼 갈수록 성적인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성경과 다른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계를 보지 않아도 아마 TV 매체나 인터넷 또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나 세상이 성에 대한 인식이 나날이 급격하게 변해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성적인 탐욕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죽여야 할 탐심입니다.

또한 5절에 나오는 ‘부정’과 ‘사욕’은 둘 다 돈에 대한 탐심을 의미합니다. 부정은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돈이라면 부모, 형제도 서슴지 않고 배신하고 죽이는 마음이 바로 이 부정에서 나옵니다. 또한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부정입니다. 사욕은 돈에 대한 지나친 욕구를 의미합니다. 물질 만능주의라서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된다는 신념으로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치 돈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돈에 대한 탐심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다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가 되려고 하나님 믿는 분들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디모데전서에 의하면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성도는, 이미 시험에 빠진 자요, 세상이 펼쳐 놓은 함정에 걸린 자요, 어리석고 해로운 죄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 즉 우리 속에 있는 탐심의 죄를 죽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 지체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골 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탐심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에 우상을 모셔 두고 그것에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따라서 탐심을 제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탐심을 제거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우리의 죄악된 욕망들 곧 성적인 탐욕, 물질에 대한 탐욕을 죽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경건한 성품으로 성장하도록 인도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경건한 성품으로 성장하도록 인도합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이 다가올수록 뚝배기에 담긴 따뜻한 사골 국물이 생각납니다. 진한 사골로 우려낸 육수로 담은 설렁탕 한그릇은 얼마나 맛있습니까? 음식을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돈을 주고 사 먹는 설렁탕 한 그릇일지 모르지만, 음식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골을 우려내기 위해서 깊은 정성이 들어갑니다. 사골을 끓이면 하얀 기름이 둥둥 뜹니다. 그 기름을 제거할수록 국물 맛이 깔끔하고 단백 합니다. 전국에 소문난 갈비탕 가게, 유명한 설렁탕 맛집들의 특징은 바로 이 기름을 장시간 정성껏 제거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 속에 둥둥 떠 있는 죄를 제거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이 담백해집니다. 신앙생활이 담백해진다는 말은 하나님 섬기는 삶이 즐거워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삶에 풍성한 만족과 행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죄를 제거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곰탕을 먹을 때 느끼는 맛처럼 끝 맛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본래 이렇게 맛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갈비탕, 설렁탕 한 그릇을 팔아도, 맑고 단백한 육수를 내기 위해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12시간 이상 기름을 제거합니다. 세상에 음식을 파는 사람도 이런 이 정도 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열심으로 죄를 제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참 보물은 위에 있습니다. 옛 사람의 성품인 탐심을 죽이십시오.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만족과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