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2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 시리즈 (2) 확신을 가져다 주는가? (사도행전 3장 36-41절)

 

오프닝 스토리: 간음죄와 기도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 목사님께서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남자 성도님과 벌써 4시간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니, 이 남자 집사님은 이미 결혼하여 자녀들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다른 여자하고 눈이 맞아 바람이 났습니다. 그 여자 분도 이미 결혼한 분이고 아이들도 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여자 분도 교회 다니는 분입니다. 목사님은 무려 4시간 이상 이 남자 집사님에게 결혼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며, 그와 같은 관계를 끊어내고, 돌이킬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러자 남자 집사님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미 그 여자 집사님하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 서로에 대한 강한 사랑의 마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또한 저희 두 사람 각각 결혼할 때 맺은 부부 서약으로부터도 자유케 해 주실 것이란 기도 응답도 받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깊은 사랑의 감정이나 상황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저희 두 사람은 지금처럼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 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차분하게 성경 말씀을 보여주며, 그와 같이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집사님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 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주셨기에 그 확신을 따라 그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다 끝마치지 않아도 위 이야기 속 남자 분과 여자 집사님의 가정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남자 분은 결국 자기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집사님에게 세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아이들 모두 아빠에게 엄청난 배신감과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 분이 출석하던 교회와 성도님들도 큰 아픔과 상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분 주변에 있는 모든 분들이 다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위 이야기 속 남자 집사님이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십니까? 불륜이란 명백한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께 기도해 봤고, 그 길이 옳다고 응답해 주셨기에 그 길을 끝까지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주의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때 ‘잘못된 확신’을 갖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이 바로 ‘확신’이라는 감정입니다. 감정이란 것은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때 ‘확실하다’라는 근거 없는 감정만 가지고 분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때 나타나는 확신은 “근거 있는”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한 첫 번째 질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성경과 일치하는가?” “내가 가진 생각, 내가 품은 마음, 내가 내리려는 결정… 이것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바로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간음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결혼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두고, 결혼한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납하실 리 없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이 남자 집사님께서 아무리 ‘40일 금식 기도’, 40일 새벽기도’ 또는 ‘100일 작정 기도’를 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다거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랑을 이루어 주셨다고 ‘확신’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말은 전적으로 거짓이고 잘못된 분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거나 반대되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응답을 주시거나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간음과 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아무리 이 남자 집사님의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려도, 실상은 그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분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근거 없는’ 확신 때문에 지나친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 자기 확신으로 인하여, 자신의 탐욕과 정욕을 채우기 위한 일들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 냥 거짓으로 포장하고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지요? 심지어 자기 자신 조차 속여 버립니다. 그 남자 분이 속이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에게는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진 것이죠. 거짓의 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남들은 다 볼 수 있는데, 자신은 눈이 흐려져서 진실을 보지를 못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 남자 집사님 가정, 함께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오던 여자 집사님 가정이 박살이 나고, 교회에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벌어진 이후에야, 그제서야 남자 집사님은 다시 목사님을 찾아가 엉엉 울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못 분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사님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수차례 경고 하셨지만, 마음이 완강 해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한 마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근거 없는 감정의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약 50일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120명 즈음 되는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가 그들이 앉아 기도하던 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또한 마치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불이 각 사람들 위에 하나씩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나라와 민족의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오순절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락방에서 흘러 나오는 120명의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각각 자신들의 지방에서 사용하는 바로 그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데 전 세계 언어가 흘러나왔습니다.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리비아,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 언어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쩔 줄 몰라 어리둥절하고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평상시 영어 못하던 사람이 술만 먹으면 영어가 술술 나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 두 개의 외국어도 아닌 수많은 외국어가 동시다발적으로 제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은 술에 취하였다는 것으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합니다. 대중들도 이를 알만큼 충분한 지혜가 있었기에, 지금 하나님께서 무언가 큰 일을 하고 계시다는 생각과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일어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며, 얼마 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었으며, 그가 무덤에 장사 지낸 지 삼일 뒤에 다시 살아나셨고, 제자들과 함께 지내다가 하나님 계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자, 이처럼 120명의 제자들이 다양한 지역 언어로 말하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고, 이 상황을 해석하는 말씀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상황을 해석하는 말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 역사하는 힘이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말씀이 우리 삶과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인생을 해석해 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상황을 해석해 나갈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37절 말씀을 봅시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불과 한 달 반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하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한 상황을 말씀이 해석해 나가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음에 찔림이 나타났습니다. 즉 이들의 마음에도 지금 사도 베드로가 그들에게 전해준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발생한 것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들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도 우리가 처해 있는 그 각각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부인할 수 없도록 “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구나?!”하는 “성경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 우리 생각과 마음에 떠오릅니다. 바로 이 때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아닌 척 모른 척하고 그냥 이대로 있을 것인가?”하는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속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의 요엘 선지자의 글을 풀어 설명하던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 “아!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구나!”하고 확신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사도 베드로를 통해 선포된 말씀이 유대인들의 양심과 마음을 찔렀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였구나? 지금 그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와 민족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하고 있음을 우리가 듣고 있구나! 이 기적은 분명 하나님의 일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예수 사건은 사실이겠구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상황을 해석하기 시작할 때, 그 말씀은 반응을 요구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무시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삶의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들을 때에 성령께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아, 이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런 경험을 종종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순간들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주는 도전을 따라 삶을 변화해 나갈 것인가?’ 이 때 우리들은 성경과 일치하는 확신,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확신에 따라 순종하여야 합니다.

 

#2. 우리는 성경 말씀과 일치되는 확신만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토대로 전해 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했던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고, 말씀을 따라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떻게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37-41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유대인들은 베드로가 전해 준 말씀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양심이 이것이 옳은 길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말씀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각 사람들은 지난 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들, 자신들의 지난 날의 죄들을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어야 합니다. “잘못된 확신”, “말씀에 뿌리 내리지 않은 확신”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확신을 따라 갔다 망한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사울 왕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앞둔 사울에게 가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죽이고, 그들의 우양, 낙타, 나귀 가리지 말고 가축들도 다 죽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의 가장 좋은 양과 소와 좋은 것들은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합니다. “어째서 왕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시고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대답합니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고 왔습니다.” 이에 대한 사무엘 선지자의 대답은 매우 유명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을 읽어 봅시다. “[삼상15:22-23]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저지른 실수가 무엇입니까?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임의적으로 해석하였고, 변질 시켰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달랐음에도 자기 눈에 원하는 대로 행해도 하나님께서 좋게 봐 주실 것이란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 선택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하나님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고 당당하게 말했고, 스스로도 떳떳하게 자신 있어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확신,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확신을 따라간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자,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자기 확신은 우리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안을 놓고 선택할 때 단지 마음에 확신이 있다고 해서 그 일을 성급하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주어진 확신이 성경 말씀에 근거한 확신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주어진 확신을 따라가는데 그 선택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결정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항상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데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과 다른 영향들을 분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은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주어진 확신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그 확신을 따라 결정할 때 어떤 대가와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올바른 확신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 앞에는 놀라운 은혜의 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사 이직, 타 도시로 이사, 배우자 선택, 새로운 비즈니스 계획 등 우리 인생에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려운 사안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오늘날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의 결정, 나의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죄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자리로 향하게 만드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우리가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진리와 은혜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진리로 이끌며,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는 확신도 진리와 은혜로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