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3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저희 교회 바로 앞 120번 맥도널드가 있는 사거리에서 차 한대가 눈 길에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도 마침 토요일 오전에 그 사건을 목격했는데요. 사람들이 너도나도 차에서 뛰어나와 부상자를 구하려고 달려가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시민들이 사고 난 차 주변에 모여들어, 차 안에 사람은 괜찮은 지, 차를 다시 뒤집어야 하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잠시 후 경찰차와 응급차가 출동했습니다. 경찰들과 911대원들이 현장을 하나씩 정리해 나갑니다. 그 날 오후 그 같은 길을 지나가 보니, 길거리에 가득했던 사고 난 차에서 부셔져 나간 파편들조차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사고가 나거나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있을 때,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119지만, 미국은 반대로 번호가 뭐에요? 911 입니다. [밥 소르기]라는 이름의 목사님이 지은 “내 영혼이 마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보면 위기에 봉착한 한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부는 삶이 너무 힘들고 마음이 어려워서 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911로 전화하세요.”(If you need help, call 911.) 도움이 필요하면 911로 전화하세요.” 반복되는 소리에 ‘이게 무슨 소린가?’하고 거실에 나가 보니까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소방차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곧 실망하여 방에 들어온 부부는 911이란 숫자를 다시 한 번 떠오르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이 장난감이 왜 하필이면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울리게 하셨을까?” 하며 911이란 숫자를 다시 떠올리며 성경을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부부가 펼쳤던 말씀이 우리가 함께 읽었던 시편 91편 1절 말씀입니다. 삶의 짐이 무겁고 여러 가지 문제들로 힘들어 하던 이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위로로 주신 말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함께 다시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성경 주소를 외우기 참 좋은 숫자 아닙니까? 911! 우리가 힘들 고 어려울 때, 환난과 아픔이 있을 때, 찾아가야 할 911이 바로 시편 91편 1절 말씀 입니다.
시편 91편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이 사용 되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니 시인은 하나님을 ‘지존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엘리욘’이란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가장 높이 계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을 의미합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주님이 이 온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1절을 보니 시인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샤다이’라는 표현인데, ‘가장 강하신 분’, ‘모든 것이 능하신 분’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장 높으신 분이시며,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우리가 지존자 하나님의 은밀한 곳과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여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여기 ‘은밀한 곳’이란 단어는 영어 성경에는 ‘the shelter’로 번역 되어 있고, 이전 한글 성경에는 ‘은신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위험과 환난의 때에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다름 아닌 가장 높으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 속 입니다. 주님을 인생의 피난처로 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하와이 마우이에서 일어난 산불 사건은 이미 뉴스를 통해서 많은 분이 보셨을 겁니다. 이후 하와이 정부는 마우이 근처에 임시 여러 쉘터들을 오픈해 놓고, 집이 불에 타 없어진 주민들이 잠을 자고, 씻을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을 제공해 줍니다. 그런데 쉘터에서 생활하는 분들, 뉴스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빨리 이 쉘터에서 나가고 싶다는 겁니다. 차가 불에 타지 않은 사람들은 쉘터가 갑갑해서 차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쉘터라는 개념은 임시 거처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쉘터’는 이런 임시 보호소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하심, 부족함이 없는 안전과 위로하심, 풍성한 공급하심… 한 번 맛보면 떠나고 싶지 않고 평생 머물고 싶을 만큼 좋은 곳이 바로 지존자 하나님이 제공해 주시는 쉘터 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쉘터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우리를 오늘도 우리는 참 된 쉼터,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품 안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제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입니다. 제 힘으로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이시오니, 제 삶과 상황을 주님께 믿음으로 맡겨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합니다. 오늘 1절을 보면, “[시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즉 이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장소가 아니라, 상시 거주하는 장소 입니다. 하나님과 깊고 은밀한 교제를 지속적으로 나누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이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자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누릴 복이 무엇입니까?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게 됩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91: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2절 말씀에 “의뢰한다”는 표현을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 주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시인이 발견한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 피하면 되는구나?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분이구나?” 이러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쌓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로서 그의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그럼 하나님께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를 어디에서 건져 주실까요? 3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시91: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새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이 나옵니다. 사냥꾼은 새를 사냥할 때 몰래 숨어서 사냥하지요? 새를 잡으려고 사냥꾼이 올무를 놓습니다. 짐승을 잡으려고 사냥꾼이 덫을 놓습니다. 자기에게 곧 닥칠 위험도 모르고 올무에 들어가는 것이 새입니다. 마우이 산불 사건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밤에 그런 엄청난 재해가 일어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세상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찾아오는 환난과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는요 특별한 이유 없이 우리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악인들도 있습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피해를 당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억울함과 환란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3절에 나오는 “심한 전염병”은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 속수무책의 상황 가운데서도 책임져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말하는 심한 전염병이란 단순히 육식의 질병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악인들과 악한 환경으로부터 전염되는 병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전염병이 들어오면 참 무섭습니다. 절망의 전염병, 원망과 불평의 전염병, 미움의 전염병, 특별히 특별이 현대인은 외로움과 고독의 전염병이 많습니다. 세상에 즐길 것들이 가득 넘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게 맞는건가… 나만 이런가…” 하며 방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의 그늘아래 들어오면 마음의 전염병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로 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어떠한 어려움도 우리 앞에 두려움이 되지 못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4절 말씀 상반절을 보니까요 (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여기서 ‘깃’이란 단어는 깃털을 의미합니다. 즉 새의 날개에 해당하는 부분이지요.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 시골에 가면 병아리들이 암탉 주변에서 삐약삐약 거리며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당의 개나 하늘에 더 커다란 매와 같이 큰 새가 뜨면 어미 암탉이 ‘구구구’ 하고 병아리들을 부릅니다. 그러면 금방 병아리들이 날개 아래에 싹 숨습니다. 그러면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품고 공중을 쳐다보며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병아리들을 보호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날개로 덮듯이 지존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 속에서 담대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환난, 풍파가 닥쳐와도 주님 날개 아래에 탁 들어가기만 하면 평안함이 있습니다. 안전함이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만, 미국 플로리다의 한 아버지가 집에서 토네이도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자기 아들과 함께 집 Basement로 들어갑니다. 이대로 가면 집이 무너져 내리겠구나 할 때 즈음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자기 품 밑으로 데리고 와서 자신이 그 위를 덮어주었습니다. 토네이도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건물 잔해를 들어내었을 때 그 아버지는 죽어 있었습니다만 그 아래 아들은 살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새가 날개로 덮어주시는 정도로 구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우리들을 구원하신 것이지요.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1절 말씀에 보니까 전능자로 소개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 말로 “엘 샤다이”라고 합니다.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엘샤다이” 샤다이는 산같이 견고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산을 한 번 손으로 밀어보세요. 산이 밀어집니까? 저 거대한 산을 말 100쌍을 가지고 줄로 끈다고 산이 요동이나 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커다란 환난이 찾아와도 산과 같으신 견고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새사냥꾼의 올무도 전염병 같은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4절 후반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이 방패는 그의 백성들을 모든 위협과 환난,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방패를 의미합니다. 적들의 강력하고 거친 공격에도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서 우리들의 영혼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7절 말씀입니다. [시91: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내가 보니까 이건 내가 결코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나도 분명 실패해야 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원인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재앙과 어려움 속에서 내가 살아남습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뚫고 나왔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재앙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입니다.
나무는 예민한 식물이라 영양분이 가득한 옥토에 심어야 뿌리를 잘 내리고, 물과 영양분을 잘 흡수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휘어지지 않도록, 또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줄 지지대를 옆에 함께 세워 줍니다. 그리고 줄로 나무와 지지대를 묶어 줍니다. 그러면 그 가리고 여린 묘목이 그 단단하고 곧게 서 있는 단단한 막대기로 인해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곧게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으러 지지만 산처럼 견고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 옆에 딱 붙어 있으니까 내가 아무리 어린 묘목처럼 연약하고 별볼일 없어도 흔들리자 아니하고 곧게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저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골짜기지만,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나에게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간증의 장소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두려움과 근심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인생의 위협이나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사람도 아니요, 재물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되십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의지하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지켜 주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