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24.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8] 절망을 이기는 기도 (시편 88편 1-18절)

우리는 지난 두 달 동안 시편 속에 있는 다양한 기도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시편 88편을 살펴볼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모든 시편들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시인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서 시편 초반에는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고통스러워 하다 가도 시편 후반부에 가서는 구원해 주시고 도움을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고백, 그로 인한 감사와 찬양으로 끝나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88편은 전혀 다릅니다. 본 시는 처음부터 고통 속에 있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고통 속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나 찬양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의지에 대한 고백도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고통 받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죽도록 결국 내버려두실 겁니까?”와 같은 깊은 한숨과 절망만 가득해 보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편 88편은 그렇게 고독과 어둠 속에서 끝이 납니다. 히브리어로 시편 88편을 읽으면 제일 마지막 단어가 ‘어둠’입니다. 영어 번역 성경들도 보시면 대부분 마지막 단어가 Darkness 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88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다가 끝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장면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변하지 않는 상황과 해결되지 않는 극심한 고통에 대한 속상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과 자신의 신세 한탄만 하다가 끝난 시편을 ‘기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오늘 이 시편도 기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내용을 성경 안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면, 사기이거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합니다! 하는 모든 일이 다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걱정 근심 없습니다!” 이건 사기이고 거짓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연약한 인간인데 어찌 그들 마음 속에 걱정과 근심이 없겠습니까? 마치 기독교를 믿으면 이 세상에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 되고,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만병통치약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근심, 걱정, 눈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저 천국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현실 속 삶에서 처해 있는 각양각색의 고통과 아픔, 고독과 외로움, 저주와 재앙을 다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생에 이런 극심한 고통이 있다는 것과 인간이 그로 인해 절망과 고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하러 병원에 찾아간 사람이라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여러 가지 검사를 끝내고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와 병원 사무실에 일대일로 앉아 있습니다. 갑자기 의사 얼굴이 심각해 지더니 큰 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태까지 그 병은 다른 사람 이야기인 줄만 알았지, 내가 그 병을 가진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죠.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납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병의 치료를 기도 제목으로 놓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치료해 주십시오.” 기도 하다 보니, 사랑하는 가족 생각, 자식들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하나님, 저 아직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 가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미 두 뺨과 얼굴은 눈물, 콧물로 다 가득 젖어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 합니다. 병에 걸리게 하신 하나님께 서운하기도 했다가, 또 그 하나님께서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내게 놀라운 간증을 주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나에게 잠시 잠깐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나 보다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적인 업다운의 롤러 코스터가 계속해서 몇 일, 몇 주 동안 이어 집니다.

문제는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 입니다. 어느 날 또 병원에 진찰 받을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교회 성도님들도 나를 위해서 밤낮 열심으로 기도해 주시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합심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병원에 들어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소식 주시겠지…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겠지.” 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병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주치의에게 들려오는 말은 내 몸 상태가 처음부터 더 많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다 가는 곧 생을 정리하고 삶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밀려 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기고 이생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도 눈물도 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나쁘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또 밀려 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속 시인의 상황입니다.

자, 그렇게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입니다. 기도 방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습니다. 왜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답답한 심정으로 마음 속에 울분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기도 하시겠습니까? 이 때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로 양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하나는 욥기에서 욥이 보여준 기도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욥이 당한 고난보다 더 처참하고 고통스런 아픔을 당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먼저 그는 엄청난 재산 손실을 보게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전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둑 맞게 됩니다. 그는 하루만에 지역에서 소문난 거부에서 깡통 차고 살아가야 할 판에 놓인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또한 불의의 사고로 그의 자녀들이 모두 다 죽었습니다. 자녀가 하나만 죽어도 부모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고 가슴에 박힌 대못과 같은 슬픔일탠데 욥의 경우는 무려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 모두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사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이후 욥은 정수리로부터 발 끝까지 극심한 피부병이 도지게 됩니다. 그의 아내도 그를 혐오하게 됩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악한 사람이라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모욕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어떻게 기도했죠?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의 한 가지 반응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이라고 왜 안 슬펐겠어요? 그라고 왜 안 억울하고 화가 안났겠어요? 나중에 욥기 후반부를 보면 알지만 그의 마음에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울분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하기를 선택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극심한 고통의 상황 가운데 앞서 욥의 기도와는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여전히 기도로 여겨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기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88편과 같은 기도 입니다. 내 마음 속 있는 심정을 가감 없이, 숨김 없이, 꾸밈 없이 하나님 앞에 다 토로하는 기도 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가졌던 서운함, 내가 그 동안 느꼈던 울분, 내 속에 가득했던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원망까지도 모두 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 속에서 너무 많은 시간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감추고, 배려 차원에서 혹은 두려움 때문에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만한 말 혹은 듣기 원하는 말 만을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입술을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마음 가짐 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속이고 또 진실되지 못한 태도로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고, 슬플 때는 슬프다고 말하는 것을 다 받아 주십니다. 또 그와 같이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앞서 우리 자신을 큰 병에 걸린 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었죠? 이번에는 우리가 그 사람의 부모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분명 내 자식이 지금 무척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식이 병원에 가서 큰 병에 걸렸다고 판정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가 마치 그 병에 걸린 것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이후 어느 날 밤 늦은 새벽, 혼자 남몰래 방에서 소리 죽여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부모인 내가 걱정하는 마음에 묻습니다. “괜찮아?” 그러자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이야기 합니다. “그럼, 엄마 나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하고 말하며 억지 웃음 지으며 부모인 내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부모 눈에는 그런 모습이 더 마음 아픕니다. 차라리 어릴 적에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 “엄마 나 아파!”하고 엉엉 울며 내 품에 안겨 울던 것처럼, 나에게 와서 마음 속 깊은 아픔을 꺼내어 이야기 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그 모든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심정처럼 저렇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꽁꽁 감추고 있는 자녀의 모습이 부모가 볼 때는 더 가슴 아프고 애처로워 보이는 것이죠.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고, 교회 성도 관계도 마찬가지다. 진솔한 것이 가장 좋다.)

기도의 자리에서 습관적인 어투가 아닌,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진솔하게 대화하듯 나의 마음을 꺼내어 보여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긴 하지만, 상투적인 말들만 꺼내 놓으며 하나님과 매우 피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자, 그렇다면 과연 시편 88편의 저자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지 말씀을 한 번 살펴 봅시다.

3-4절을 한 번 봅시다. “[88:3-4]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이걸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하면 “하나님, 나 지금 죽을 것 같습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6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88: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제가 지금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You have put me in the dark and deep pit!) 7-8절도 이어서 보십시오. “[88:7-8]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하나님 제가 지금 죽을 것 같은 이유는 주님이 나를 심히 누르고 계셔서 그런 겁니다.” 8절 “심지어 하나님께서 제 가까운 친구들이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하셨고, 제가 그들 보기에 역겨운 것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금 시인이 어떤 구체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섭섭한 마음, 원통한 마음을 가감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10-11절도 이어서 읽겠습니다. [88:10-11]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이건 이런 느낌입니다. “하나님 제가 죽어야지만 속이 풀리시겠어요? 제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는 겁니까? 제가 죽으면 어찌 하나님 찬송하겠습니까? 저를 살려 주셔야죠!” 하나님과 따지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께 너무 서운한 거에요. 14절 이어서 봅시다. “[88: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하나님, 왜 저 버리셨어요? 왜 저를 피하여 숨으셨어요?”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바를 에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바를 하나님 앞에서 아주 직설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15절은 오늘 시인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88: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왜 자식이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 중에 “엄마가 나한태 해준게 뭐가 있어?”, “이럴꺼면 나 왜 낳았어?” 이런 말들 있죠? 시인도 그런 거에요. “하나님 제 평생에 언제 좋은 날이 있었습니까? 저는 어릴 적부터 늘 고난 뿐이었습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자기의 감정을 마구 쏟아내도 성경 속 대부분의 기도들은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끝나잖아요? 시편 88편은 다릅니다. 맨 마지막 절인 18절 보세요. “[88: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분위기에요. “하나님, 결국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망하게 하셔서 저는 이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주님도 제 곁에 안 계십니다. 이제 제 곁에 남은 친구라고는 이 어두움 뿐입니다.”

이게 이 시의 끝 입니다. 정말 시편 88편의 저자는 그의 생각대로 불행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의 고백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삶을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하셨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책 가지고 계신 분들은 시편 88편 위에 부제로 있는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 한 번 보십시오. 이 시는 ‘에스라 사람 헤만’이 저자 입니다. 혹시 [헤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열왕기상을 기록한 역사가가 솔로몬 왕의 지혜의 탁월함을 이야기할 때 견주어 비교했던 대상이 바로 이 헤만 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혜자 중 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 다윗 시대에 찬양대를 이끈 지휘자 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대 지휘자를 한다는 것은 온 국민들에게 영성으로나 인품으로나 인정 받은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다.”라고 인정 받은 사람인 셈입니다. 성경에 그의 이름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존귀하게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가 앞서서 “하나님 제 평생에 하나님이 제게 주신 것이라고는 고통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서러움 가운데 일반화 해서 과장되게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88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마도 그는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병 때문에 몸이 너무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가 그 고난의 때 정직하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한 글이 지금까지 우리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이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헤만처럼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이 이 기도를 읽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성경에 넣어 주셨습니다.

사실 앞서 말씀 드렸던 욥도 욥기를 쭈욱 읽어 나가다 보면 오늘 본문 속 헤만과 같은 기도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저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 저 하고 한 번 따져 보시죠. 제가 정말 그렇게 잘 못 살았습니까? 제가 이런 혹독한 아픔과 고통스런 시련을 당할 만큼 범죄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욥도 하나님께 마치 따지듯이 그 마음 속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그의 친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따지며 욥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 7절과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해 주십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마음, 상한 마음,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감 없이, 숨김 없이, 꾸밈없이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리는 것을 기도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헤만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봅시다. 10-12절 입니다. “[88:10-12]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놀랍게도 그의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다 무엇입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 지낸 후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우리들에게는 죽음조차 막을 수 없는 부활의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죽은 자들도 주의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이고,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도 다시 일어나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게 되는 그 날이 옵니다. 흑암 중에서 잠자던 자들이 다시 일어나 주의 기적과 땅에서 행하신 주님의 공의를 온 세상이 알도록 외치는 그 날이 옵니다.

만일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헤만의 부르짖음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재앙과 아픔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만은 자신에게 어둠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며 시를 마무리 했지만, 사실 그에게도 여전히 부활의 소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헤만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오래토록 해결되지 않는 육신의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거나,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억울해하며 하나님을 향해 섭섭한 마음을 느끼고 계시진 않았습니까?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감추려고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방긋 웃으며 피상적인 신앙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속 마음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대신 짊어져 주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까지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실 겁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하게 보시고 크신 긍휼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