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7.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7] 고통을 이기는 기도 (시편 46편 1-11절)

20세기 최대의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러셀은 인생의 고통이 너무도 이해되지 않았어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신이신데, 가만히 이 세상 자기 주변을 바라보니 온통 고통 당하는 사람들 뿐이거든요. 세상의 경험으로 추론할 수 있는 신은 적어도 둘 중에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전능하지만 도덕적으로 악하고 애매모호한 신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만 전능하지 못한 신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지요.

이러한 러셀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독교의 변증서 중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아주 지혜 있게 설명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작가 C.S Lewis 가 쓴 [고통의 문제]라는 책입니다. 이 글을 통해 루이스는 고통에는 인간을 치유하는 창조적 기능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안주 시킬 장애물을 제거하며 우리 영혼의 나침반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고정시켜 준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고통을 통해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나는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고통스럽다. 나는 오직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케케묵어 보이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크기와 강도는 다르지만, 모두 삶 가운데 고통 받고 있습니다. 나이와 처지에 상관없이 고통은 우리를 찾아냅니다. 고통 당하는 우리 인생 가운데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바로 [러셀]과 [루이스]의 반응입니다. 누군가는 큰 벽돌 같은 고통이 자신을 내리치면, 그것을 집어 하나님께 던집니다.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냐고,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그 고통이란 벽돌을 가지고 겸손하게 허리를 숙여 자기 밑에 계단을 쌓아 하나님께 더 가깝게 나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생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시편 46편을 통해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Q1. 고통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고통은 우리를 찾아낸다. 그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오늘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46:2-3]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본문이 말하는 고통의 특징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고통은 우리를 찾아냅니다. 아무리 조용히 평안히 인생을 살려고 해도요. 고통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를 찾아냅니다. 가난하고 힘든 시간들을 간신히 이겨내고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다 싶으면 예측하지 못한 병과 문제로 고통 당하는 게 또 인생이더라고요. “이것만 해결되면 이제 난 행복할꺼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이번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또 다른 문제들이 나를 찾아옵니다. “아니 이제는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의 고난과 고통은 반드시 다른 문제들로 또 우리들을 찾아옵니다.

둘째, 인간은 고통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고통이 지닌 특징입니다.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또는 해결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앞에서 무력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9월 8일 저녁 11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에서 규모 6.8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모로코를 강타한 120년 만의 가장 강한 지진으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지진이었습니다. 희생자 숫자가 벌써 3천 명에 육박합니다. 사실 지진 피해가 너무 커서 사망자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조차 없다고 합니다. 최대 1 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것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뉴스를 보니 무너진 건물들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잔해들 앞 거리에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시신들이 끝을 모르게 줄 지어 누워 있습니다. 더운 날씨 탓에 상온에 노출된 시신들이 급격하게 빨리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로 인해 전염병으로 인한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상황 판단에 모로코는 결국 신분 확인도 없이 시신을 집단으로 매장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존자들 가운데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며 슬피 울부짖는 노모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이 목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땅이 없어지고, 산들이 바다 속에 빠지고, 바다 물결이 으르렁거리며 철썩거려도 산들이 끓어올라 흔들리는 이런 상황에 빠진다는 것은요 속수무책이며, 진퇴양난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마치 활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이지요. 이처럼 인생의 고통은 우리가 아무리 숨어서 평안하게 살려고 해도요 반드시 우리를 찾아냅니다. 우리가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해도 고통은 우리를 기어코 찾아냅니다. 세계 최고의 보호막이라 불리며 기네스북에 오른 거대한 방파제도 자연이 일으킨 쓰나미 앞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형체도 없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 불리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통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오늘 시편 46편의 배경이 열왕기하 19장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눠져 있는 것처럼 예전 이스라엘도 솔로몬 왕이 죽은 이후에는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앗수르] 라는 거대 제국이 끝을 알 수 없는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와서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파죽지세로 남쪽에 있는 남방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앞까지 쳐들어 오게 됩니다.

당시 남방 유다의 왕이 바로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쉽게 설명하면 히스기야는 총 한 자루 구하기 힘들어 애굽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인데 앗시리아는 수 백대의 탱크 부대를 끌고 오는 것과 같은 전쟁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요 누가 봐도 승패가 뻔하고요, 게임이 안 되는 전쟁입니다. 말 그대로 임박한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히스기야가 사자를 통해 저 유명한 이사야 선지자에게 글을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님, 우리 죽겠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힘드냐 하면 해산의 수고를 하는 산모가 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산모가 아기를 낳을 힘이 없어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고 표현했습니다. 이대로 가다 가는 다 죽게 생겼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살았던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만, 그 역시 고통의 문제 앞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왜요? 나는 하나님 잘 믿고 섬겨 왔는데, 누구보다 열심으로 하나님 섬겼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왔죠?” 사실 히스기야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은 그 누구나 다 히스기야 같은 고통의 경험을 겪습니다.

고통의 특징 첫째, 고통은 우리를 찾아냅니다. 둘째, 인간은 고통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고통을 넉넉히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독일 나치가 수많은 유태인들을 실험하고 잔인하게 죽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이며, 이후 전 세계적인 심리학자로 명성을 날린 빅터 플랭클린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문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진짜 문제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를 기어코 찾아낸 이 고통,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기 이 어려운 고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 속에서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Q2. 고통 가운데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피난처 되심

우리 함께 본문 1절 말씀을 일겠습니다.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이 고통 가운데 우리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우리가 두려워 하지 않고 아직까지 소망함을 품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시편 46편을 보면 표제가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작곡가는 고라 자손이며, 콰이어 디렉터 즉 음악 감독에게 주어진 “알라못”에 맞춘 노래. [알라못]이라는 단어는요. 쉽게 말하면 [소프라노]가 부르느 높은 곡조의 음악 입니다. 즉 오늘 이 시편은 힘차고 높은 소리를 내며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지요.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땅이 없어지고, 산들이 바다 속에 빠지고, 바다 물결이 으르렁거리며 철썩거려도 산들이 끓어올라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46편 1절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이런 확신과 강한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며 1절 말씀만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볼까요?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1. 가장 위험한 새벽에도 도우심

오늘 본문 5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구절입니다. [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 본문은 특별새벽예배가 있을 때 교회에서 현수막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는 구절이죠? 그런데요 이 본문이 잘 못 해석되면 마치 하나님께서 새벽에만 잠깐 도와 주시는 걸로 해석될 수 있어요. 우리가 잠시 생각해봐도 본문의 의미가 그것이 아니란 걸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새벽 뿐만 아니라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표현은 무슨 의미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에게는 새벽만큼 두려운 시간도 없습니다. 그것은 적군이 공습해 오기 가장 좋은 시간이 때문이지요. 수많은 사상자를 낸 625전쟁도 북한군사의 새벽 4시 20분 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상륙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6월 6일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즉 새벽이야 말로 적군에게 침투하기 제일 좋은 시간이며, 반대로 적에게 공격 당하기 쉬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바로 이 새벽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기적은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새벽은 단순히 시간적인 어려운 시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 가장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 있는 영적 암흑기를 의미합니다. 가장 추운 것은 사실 밤이 아니라 새벽입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이 가장 춥고 힘들고 배고픈 새벽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신다는 거에요. 우리 인생의 새벽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앗수르 라는 거대 제국이 남방 유다를 침입해 왔을 때, 남방 유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남방 유다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 막대한 군대가 새벽에 쳐들어 오는 순간 남유다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라는 것. 그런데 아까 히스기야 왕이 누구에게 편지를 보냈지요? 이사야 선지자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님,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 왕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왕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호와께서 앗시리아 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소. ‘그는 이 성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는 화살 한 발도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성을 공격할 흙 언덕도 쌓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왔던 길로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이 성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신 그 날밤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 백성들이 아침 일찍 나가 보았습니다. 앗시리아 군대의 시체가 무려 18만 5천명이나 죽어 있는 거에요! 전날밤 두려움에 떨며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이지요.

 

Q3.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라파 (Rapa)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하여금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 되심을 확신케 합니까?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영어로는 Be still 이란 의미로 고요히 잠잠하게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요 이 단어를 원어로 찾아보면 “Rapa”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고요히, 잠잠하게 라는 뜻 말고도 “무기를 내려놓다.”는 의미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가운데 한 사람이 중재 할 때 주먹을 내려놓고나 손의 무기를 내려놓을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Rapa” 입니다. 어린이들이 싸울 때 부모가 와서 중재한다. 그러면 주먹을 내려놓는다. 아버지가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우리가 어린 시절 얼음땡 하고 놀던 것처럼 얼음이 되어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내 힘으로 이겨보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너 손에 있는 무기를 내려놓고 잠시 고요하게 잠잠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병사가 전쟁터에서 무기를 내려 놓는 게 쉽나요? 그것은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모세는 불안해하며 떠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삶의 문제들을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손에 칼과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나보다 더 뛰어나신 그분께 내 상황을 맡기시겠습니까?

 

  1. 셀라 (Selah)

저는 오늘 시편이 노래라고 여러분께 이야기해드렸습니다. 대부분의 노래에는 verse 즉 절이 있고 반복 되는 후렴이 있죠? 오늘 시편 46편의 후렴이 바로 7절과 11절입니다. 7절과 11절이 동일하지요? [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오늘 시편 기자는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가진 성경에 ‘셀라’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셀라]가 3절 뿐만 아니라 7절과 11절 이후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과연 이 [셀라]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일까요? 학자들 사이에서는 ‘셀라’가 ”영원히”라는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한 앞 구절을 강조하는 “아멘”과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은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셀라는 읽는 이에게 잠시 멈추어서 앞의 내용을 묵상하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즉 “멈춰서 들으라” 기도나 시편에서 “멈춰서 들으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영어에서 가장 가까운 단어가 “pause” 입니다. 즉 잠시 잠잠하게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be still 이란 라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나님을안다.”표현은 ascertain 즉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진짜 피난처시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확인하는 장면을 말한다. 우리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읽고, 주야로 그분을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셀라” 즉 고요하게 가만히 묵상하면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고요하게 그분을 묵상할 때 그분의 진정한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 속 중요한 메시지를 찾는 방법으로 늘 강조하는 성경 읽기 방법이 뭐죠? 반복되는 표현을 찾으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표현입니다. 성경 가지고 계신 분 한 번 밑줄을 그어 보시겠어요? 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1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오늘 본문 속 시인이 발견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내 인생에서 산이 흔들리고, 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솟아나는 듯한 엄청난 환산 속에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누가 나의 피난처 되시니?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인이 고백하는 피난처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능히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해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힘 되시며, 도움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