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0.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6] 구원을 위한 기도 (시편 13편 1-6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편은 일명 ‘비탄시’라고 불리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즉 저자가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과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 절규하고 탄식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는 시 입니다. 따라서 혹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님들 가운데 자신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거나, 위기 가운데 있다고 생각 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편 13편이 여러 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은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비탄시는 대부분 세 부분으로 구성 됩니다. [탄식-간구-확신]  입니다. 비탄시의 세 가지 구성을 한 번 따라 해 볼까요? [탄식-간구-확신] 입니다. 비탄시의 첫 번째 부분은 “탄식” 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은 펜을 들고 시편 13편을 3 부분으로 나눠 봅시다. 먼저 1-2절을 한 묶음으로 묶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탄식” 이렇게 적어 주십시오. 비탄시의 두 번째 부분은 “간구” 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하나로 묶고, 옆에다가 “간구”라고 적어 주십시오. 비탄시의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확신”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에 응답하실 것을 확신한다는 고백과 이에 대한 감사 찬양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하나로 묶어서 “확신”이라고 적어 주십시오. 오늘 이 시편 13편으 찬양입니다만, 동시에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다윗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가를 시편 말씀을 통해서 함께 배워 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비탄시의 구성이 세 가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탄식-간구-확신] 입니다. 그럼 이제 비탄시인 시편 13편의 첫번째 부분 탄식 부분인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편 131-2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자, 성경 가지고 계신 분들… 제 설교 들으실 때 가능하면 성경책을 펼쳐 놓으시고, 반복 되는 것을 찾아서 팬을 들고 반복 되는 것을 찾아보고 밑줄을 그어 놓으시면 좋겠습니다. 1-2절은 비탄시의 첫 번째 부분인 [탄식]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1-2절에서 시의 저자인 다윗이 탄식하며 하나님께 무려 4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입니다. “Oh, Lord, how long?” 주님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절규를 연신 쏟아내고 있는 것이죠.

지금 다윗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만에 끝나는 그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아니 끝이 있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었습니다.

지난 1952년 7월 4일, 30세의 [플로렌스 체드윅]이라는 미국 여자 수영선수가 카타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해협 횡단에 도전합니다. 그 거리가 자그마치 21마일, 약 33킬로미터(26마일)나 됩니다. 빠른 모터배를 타고 가도 대략 40분은 더 걸리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당시 미국 전국의 메스컴이 주목하는 가운데 드디어 그녀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수영하는 동안 주변의 상어를 감시하고, 예상치 못한 경련, 부상이 발생할 경우 도움을 줄 준비하는 팀과 함께 했습니다. 플로랜스는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심지어 잠도 자지 못하고 무려 열 여섯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물속에서 쉬지 않고 헤엄 쳤습니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과 편견을 깨고 긴 거리를 횡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짙은 안개가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덮었습니다. 이에 플로렌스는 자신이 얼마나 더 헤엄쳐야 하는지,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녀는 중간에 해협 횡단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안개가 걷히고 보니, 그녀가 포기한 바로 곳은 목적지에서 불과 500m 도 채 안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에서 나오자, 기다리던 취재진과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목적지가 있는데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였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포기를 하게 된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물이 차가워서도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이 무거워지고 이어서 몸도 점점 뻣뻣해 져서 도저히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삶 속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큰 절망감을 가져다 줍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 속에서 무려 4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께 했습니다. “주여! 도대체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까지도 오랜 시간 정말 어렵게 버텨왔는데 더 이상 얼마나 더 참고 인내해야 하나님의 구원이 펼쳐질 것인지 묻는 다윗의 절규 속에서 우리는 그의 좌절과 답답한 심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본문 속 다윗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곧바로 응답 되지 않는 기도들 때문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문제가 해결 되기는 커녕 이전보다 더 악화 되는 상황들을 보며 우리들은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절규하듯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 입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절박한 상황 속에 놓인 다윗의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사실 다윗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 속에서 본 시를 적었는 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학자들은 이 시가 아마도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한 약 10년 간의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지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합니다. 성경학자에 따라서는 그의 광야 생활이 무려 15년 즈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를 죽이려는 칼과 창을 들고 좇아오는 수많은 원수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매일 같이 도망치며 살아야 했던 시간이 1년, 2년, 3년도 아니고 10년 입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다윗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텼을까요?

처음 미국에 와서 이민 생활하면서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고생하셨습니까? “그래도 내년이면 조금 더 나아지겠지.”, “5년 정도 지나면 그래도 더 나아질 거야.”, “요것만 참으면, 요것만 해결되면 그 다음은 조금 더 숨통이 트일 거야.” 이런 소망이 있는 이민자와 “아, 이렇게 살면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똑같겠다…” 이렇게 절망적인 삶을 사는 이민자는 같은 미국이라도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죠.

어떤 분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잘 지내고 계시죠?”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합니다. “그냥 살지요. 죽지 못해 살아요.”  혹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죽지 못해 살아가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계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얼마나 삶이 힘들면 그런 표현이 우리 입에서 나올까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인관 관계에서 비롯 됩니다. 물론 재정적 부족으로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고, 업무가 비정상적으로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사람 관계 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사람 때문에 마음이 힘드십니까? 참 희한하게도 대부분 나를 전혀 모르는 남이 아니라, 의외로 나와 가까 왔던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극도로 미워하고,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장인어른 입니다. 장언어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의 목에 높은 현상금을 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과 현상금 사냥꾼들이 다윗의 목을 위해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을까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은 누구에게 배신 당하셨습니까? 지난 3년 반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열 두 제자, 예수님 곁 가장 가까이서 그와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 유다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사람 때문에 힘든 그 마음도 주님께 나아가 털어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1절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다윗은 자신이 느끼는 절망감을 가감 없이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시편 131]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셨 고서야 어찌 이런 극심한 고통이 내게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심정인 것이죠. 1절 후반절에 그가 사용한 “숨기시다”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숨어 피하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윗의 심정이 느껴지시죠? “하나님 왜 자꾸 저를 피하세요? 왜 자꾸 저를 피하여 숨으십니까?” 이런 심정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신실하게 섬겨왔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윗을 피하여 숨고 계신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2절에 나오는 다윗의 심정은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절망감]과 [당혹감] 입니다. 절망감은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 주지 않으신다는 현실 속에서 오는 감정이었고, 당혹감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속해서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서 오는 감정이었습니다.

2절 말씀을 봅시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하나님께서 그를 잊으신 것 같고,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을 피해 숨고 계신 것처럼 느껴진 다윗은 이제 스스로 비통해 하면서 마음 속에서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고통스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나눌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외로움 가운데 그는 자기 혼자 고통을 끌어 안고 마음에 근심하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왜 하나님은 나를 이런 상황에 오래도록 놔 두실까?”, “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걸까?” 다윗은 자신이 언제까지 이런 비통함 속에서 홀로 외롭게 눈물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2절 후반절 봅시다.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다윗의 원수들은 자신들이 다윗을 제압했다고, 이제 다윗은 끝장 났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교만해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잡은 이후, 이스라엘 국가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미워하기 전에는 천부장까지 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군대에서 별을 단 장군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쓸 당시에는 다윗은 국가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아무것도 아닌 도망자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사이 이 참에 다윗을 밟아 버리고, 그를 죽이려고 했던 다윗의 원수들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게 되었습니다. 한 때 사람들에게 존경 받던 다윗은 이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손가락질 받고 욕 먹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반면 그의 원수들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인정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래도록 지속 되니 다윗의 마음에 더욱 절망스러운 마음이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비탄시의 구성은 [탄식-간구-확신] 로 이어진다고 말씀 드렸죠? 탄식 속에서 터져 나오는 다윗의 간구를 봅시다. 3-4절 말씀 입니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먼저 우리는 깊은 탄식 속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호칭하고 있는지 부터 살펴 봅시다. 3절 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이 표현은 다윗의 신앙고백 입니다. “하나님, 비록 주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시기 더디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하나님께서 저를 피해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제가 홀로 외롭게 고통 속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제 모든 감정과 느낌을 뛰어넘어서 변치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와, 주님은 여전히 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비록 지금은 자신이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도와 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깊은 탄식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믿음의 경주]라고 비유합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란 트랙 위에서 지금 믿음의 달리기를 하는 중입니다. 이 경주는 단거리가 아니라 평생 달려야 하는 장거리, 마라톤인 셈입니다. 장거리 경주하는 선수에게 반드시 요구 되는 항목 중 하나가 있죠? 지구력 입니다. 끝까지 버티는 힘입니다. 신앙도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선배 다윗이 보여준 강점이 무엇입니까? 영적 지구력 입니다. 아무리 탄식이 깊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일수록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을 더 꽉 붙드십시오. “여호와여! 주님은 여전히 제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제 구원자 되십니다!”

3절에 다윗의 기도를 더 유심히 봅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소서!”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그 대상을 “골똘히 주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응답하시다”는 말은 작은 목소리로 읖조리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외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저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 주세요! 제 인생을 유심히 봐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제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제게 응답해 주세요!” 이처럼 깊은 탄식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관심과 응답을 간구 했습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 이어서 봅시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이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다윗이라고 왜 두려움이 없었겠어요? 이스라엘의 수백 수천의 군대가 날마다 자기 한 사람을 죽이려고 샅샅이 헤매고 다니는데, 왜 다윗이라고 불안함이 없었겠어요? “하나님 저 사실 죽을까 두렵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하나님께 털어 놓았습니다. 4절 봅시다.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다윗은 자신의 적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 그는 자신이 흔들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고소해 하며 기뻐하고 있을 대적들의 모습을 보기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그런 지경에는 이르지 말게 해 주세요. 저 정말 그런 꼴 당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 원수들이 기뻐하는 일 일어나지 않도록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다윗은 깊은 절망과 탄식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 했습니다.

자, 이제 비탄시의 마지막 파트 입니다. 비탄시의 3가지 구성 기억 나시죠? [탄식-간구-확신] 이제 마지막 세 번째 파트인 확신을 봅시다. 5-6절 입니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편의 마지막 파트는 분위기가 전환 됩니다. 1-2절에서 다윗의 절망의 어두운 터널 속에 있었다면, 5-6절 다윗은 기쁨과 찬양의 환희 가운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심정의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그가 가진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미 과거에도 1-2절과 유사한 상황들을 수차례 겪어 왔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다윗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이 무엇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까? “주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헤쎼드]라는 히브리어로, 영원토록 변함 없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과거에도 나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의지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다윗은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그 사랑이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계속 될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는 다윗의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진전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 없는 사랑이 과거에도 나를 붙드셨고,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시고, 앞으로도 미래에도 나를 붙드실 것이기 반드시 나를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6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하나님 저는 이 고통 가운데도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덕을 베푼다”는 말은 ‘관대하게 대하다’, ‘매우 후하게 대하다’는 뜻입니다. 혹시 식당 중에 자주 가시는 단골 식당 있으십니까? 식당 주인이 많은 손님들 중 단골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다릅니다. 분명 나는 남들 하고 똑같은 돈 내고 사 먹는데도 주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거죠.

한국 서울 종로3가(지하철로 15번 출구)에 나가면 가면 유목한 보쌈골목이 있습니다. 골목에 들어서면 ‘굴보쌈’ 이라고 쓰여진 식당이 가득 합니다. 퇴근 시간 되면 주변 직장인들이 회식하려고 자주 찾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가 원래는 감자탕 골목이었어요. 그럼 어떻게 하다가 감자탕으로 유명했던, 골목이 보쌈골목으로 변했을까요? 한 가게 주인이 단골 손님들에게만 감자탕을 시키면 서비스로 보쌈을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식당 손님들이 보쌈이 맛있으니까 갈수록 감자탕은 안 찾고 보쌈만 찾는 거에요. 보쌈 인기가 많아져서 감자탕 집 둘이 하나 둘씩 메뉴를 변경해서 아예 거리 자체가 보쌈 골목으로 바뀐 거죠. 지금은 어떨까요? 보쌈을 시키면 감자탕을 서비스로 줍니다.

한 번 우리가 이전에 종로 3가가 감자탕 골목으로 유명할 때, 이 가게 단골 손님이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다른 손님들 하고 다 똑같은 돈 내고 감자탕 먹는데, 주인이 내 상에만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맛있는 굴보쌈을 서비스로 내어 줍니다. 야들야들한 돼지고기, 경남 통영에서 공수해 온 탱탱한 생굴, 갓 김장한 새콤한 무김치 얹어 먹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손님들이 너무 부러워 하는 거에요. 이게 단골손님에게만 주는 메뉴라 자기들은 돈 주고도 못 사먹거든요. 특별대우 받는 기분이죠. 얼마나 좋습니까? 이 가게 더 자주 안 오겠습니까? 주인과 손님인 나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 거죠.

다윗이 자신의 인생이란 테이블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테이블에는 올라가 있지 않은 특별 메뉴들이 올라가 있는 거에요.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어? 하나님 이거 제가 시킨 적 없는데요? 저 이거 낼 돈도 없는데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윙크 하시며 다윗에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다윗 그거 내가 너에게 주는 서비스야!” 다윗이 이와 같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거에요. “하나님, 비록 제가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사랑, 헤세드를 저는 믿습니다. 이전에도 저에게 후대해 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주님의 그 한이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내 잔을 채우실 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에 절망은 단지 절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변함 없는 사랑, 헤세드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의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변함 없는 사랑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인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지구력을 가집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