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6.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1] 복을 위한 기도 (시편 1편 1-6절)

 

 

성경 66권 중 시편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또 읽히는 책 입니다. 내용이 간결하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인생의 희노애락의 감정이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시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낸 분들,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하여 괴로움에 빠진 분들, 인간 관계에 상처 받고 외로움에 빠진 분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져서 영적으로 괴로워 하는 분들 등등 다양한 상황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읽고 그들의 영혼이 위로 받고 치유 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시편은 묘한 매력을 가진 책입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딱 이런데! 지금 내 인생의 상황이 딱 이런 상황인데!”하고 시인과 공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참 놀라운 책이죠. 오늘부터 시편에 있는 말씀들 중 특별히 기도의 내용을 담은 시들을 골라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150편의 시들 중 가장 첫 번째 시이자, 시편 전체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편 1편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어느 한 남자 분이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산에 오르다, 어느 덧 산 중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들 앞에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길이 나왔습니다. 한 쪽 길을 보니까 길이 편해 보입니다. 길도 넓어 보이고, 잘 닦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길 앞에 쇠사슬로 체인을 쳐 놓고는 “들어가지 마시오! 위험!” 이렇게 쓰인 표시판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다른 길을 보니 경사도 올라가기 힘들어 보이고, 길도 바위도 많고, 나뭇가지들도 처 있는게 등산하기 험악해 보입니다. 갈림길에 서서 보면 두 번째 길이 더 위험해 보였습니다.

남성은 친구들과 함께 걷기 편해 보이는 길을 놔두고, 표시판에 쓰여진 경고를 받아들이고, 더 힘들어 보이는 길, 경사진 길, 험악한 길을 따라 등산을 이어갔습니다.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요? 잠시 후, 산 위에서 아래를 살펴보니 앞서 잠시 서 있던 갈림길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가지 말라고 경고가 붙어 있던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한 길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낭떠러지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발 한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아찔한 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걸어 온 길이 잠시 동안은 경사도 크고, 바위도 많아 오르기 어려운 길처럼 보였으나, 다른 길에 비하면 가장 안전한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었다는 것을 남성은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 1편은 이처럼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길 중 어떤 길을 걸어 가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지게 되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모습도 달라지게 됩니다. 첫 번째 길의 이름은 죄인의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고 세상의 거짓된 지혜를 좇아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길이 처음에 보면 너무 편해 보인다는 사실 입니다. 길도 넓고, 경사도 내리막 길이라 걷기에 참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 끝에는 심판과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다 걸어가서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죄인의 길 앞에 위험 표지판을 붙여 두셨습니다. “경고! 위험! 이 길은 위험하지 들어가지 마시오!” 이렇게 표지만이 붙어 있는 것이죠. 표지만의 내용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요? 시편 1편 1절 말씀입니다.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걸어가지 말아야 하는 길의 특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책 가지고 계신 분, 1절에 “아니하며”에 밑줄을 그어 보시겠어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제가 늘 말씀 드립니다만, 성경에서는 중요한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는 특징이 있다고요? 반복해서 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3번 반복하면 최상급 입니다. 경고! 경고! 경고! 입니다. 절대로 이 길로는 가지 말라는 겁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부정어인 ‘로’가 3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로’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의미를 가진 부정어 입니다. 이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함으로써 절대로 이 길은 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본문 속 악인들의 꾀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자신의 탐욕을 위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일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학교로 따지면 이런 거에요. “야, 우리 선생님 몰래 시험지 컨닝 하자.”, “우리 이따가 점심 시간 때 제 가방에서 지갑 훔쳐 가자.” 가게로 따지면, “이따가 사장님 밖에 나가면 우리 일하지 말고 놀자.” 회사로 따지면, “우리 이번에 나온 회삿돈 몰래 우리가 먹자” 우리 양심은 그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이 나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정직하게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머리 속에 꾀 즉 나쁜 생각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점점 구체화 되다 보니까 이제는 그 죄인의 길에 서 있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구체화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그 길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형통하고자 하는 죄인의 길에 서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러한 길을 걸어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양심을 속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이렇게만 하면 돈 번다니까? 이거 절대로 법에 안 걸려! 우리 사장 우리가 이렇게 물건 뒤로 빼는 거 몰라. 우리 절대로 안 걸려! 이렇게 안 하면 바보다!” 마치 자신이 택한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처럼 포장하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미련한 자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자가 되는 것이죠.

처음부터 “죄악의 길로 가리라”, “멸망의 길로 가리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댐 벽에 뚫린 구멍 속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물이 세듯이 처음에는 작은 일부터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댐이 압력을 이기지 못해서 방울로 세던 물로 인해 구멍이 커지고 물줄기가 되고 결국에는 댐이 무너져서 큰 재앙으로 이어지듯이, 악인의 꾀를 따르던 자들이,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결국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까지 앉게 됩니다.

 

지금은 제 설교 들으시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되지! 나는 절대로 죄인의 길로 안 가련다!” 이런 생각이 드실 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는 죄인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1절 말씀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개역개정 성경 읽고 있죠? 이번에 개역한글판에는 성경 히브리어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던 것들 중 이번에 개역개정으로 바뀌면서 성경 원어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게 바뀐 것들이 있습니다. 이전에 개역한글판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이렇게 단수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말씀 보시겠어요?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다 복수 입니다. 그런데 뭐만 단수에요? “복 있는 사람”은 단수 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죄인의 길을 걸아가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양심에 어긋난 일이고, 법에 접촉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큰 형벌을 받게 되거나 큰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 같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 대부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저렇게 하네? 그럼 나도 그와 같이 해야겠다.” 때로는 영적 싸움은 외로운 싸움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다 우상에게 절할 때, 이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왜 바보 같이 그렇게 살아! 그냥 눈 감고 딱 한 번 절하면 되! 그럼 고공 승진이야!” 그러나 죄인의 길이 아니라 의인의 길을 걸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선택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렇게 선택하는 것이 내게 유익한가?” 또는 “남들이 가는 길, 안전하게 나도 따라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삶의 선택의 기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물어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합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최근에 발표된 한 기독교 통계에 의하면 미국 내 그리스도인들 중 무려 82% 가 주일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읽는 성경읽기를 제외하고는 주중에 성경을 한 번도 보지 않는 것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인구 중에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한 번 이라도 읽어 본 사람의 비율은 30% 미만이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더 충격적인 통계는 미국 그리스도인들 중 불과 22% 만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통해서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죠. 갈수록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 안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지난 한 주간 성경 한 장도 안 보신 분 조용히 마음 속으로 손 들어 보십시오. 지난 한 달 간 주일예배 제외하고 성경을 한 번도 안 보신 분 조용히 마음 속으로 손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 중에도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자원해서 성경 보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서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원해서 성경 보고 살아가는 귀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저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성경을 읽어가고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무늬만 남은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정말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자 성경을 펼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사랑해요!”라고 수 백 번 말하고, 수 천 번 찬양을 불러도, 성경을 보지 않는 자의 고백이 어찌 진실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는 사람을 찾기도 힘든 시대입니다만, 목회자인 저도 요즘 시대에 드물게 만나게 되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성경 읽기를 뒤로 제쳐 놓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민 생활이 바빠서, 회사 생활, 가게 생활, 아이들 학교 보내느라 자녀들 키우느라 바빠서, 성경 읽을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다고 하죠?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 분들도 최근 유행하는 TV 드라마를 다 보고 산다는 겁니다. TV 뉴스도 보고, 책도 읽고, 신문도 읽고, 심지어 극장 가서 영화도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일에는 없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삽니다. 이런 시대에 성경을 즐겨 읽는 사람은 만난다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이 귀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성경을 즐겨 읽을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며,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준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살아 보니까 악인의 꾀를 좇아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결과가 더 좋습니다. 때로는 지금 당장 결과가 좋지는 않을 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에는 마음에 평안이 있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기쁨과 확신이 주어집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죠.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다”라는 말은 다시 해석하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행복인 사람, 그의 기쁨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악인과 죄를 도모하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기뻐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자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서 묵상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죠.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에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 등 유독 주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근육이 위축되는 일명 [각기병]이라는 것이 유행 했습니다. 아픈 사람들 보면 밥도 잘 먹고, 국도, 반찬도 다 잘 먹거든요? 그런데 자꾸만 다리 힘이 약해져서 걷지를 못하는 거에요. 다리가 저리고, 근육이 허약해 져서 어떤 분들은 발목을 집고 걷기도 하고, 근육통에 심지어는 호흡장애로 휠체어를 타기도 했습니다. 각기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아니, 나 평상시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지?” 알고 보니 기술이 발전하면서 쌀의 껍질을 많이 깎아 백미를 만들었던 것이 화근이었어요. 잡곡밥이나 도정이 덜 된 현미밥을 먹을 때는 그 껍질 안에 있던 비타민 B1(일명 티아민)을 섭취 했었는데, 이런 영양소가 제거 된, 껍질을 다 벗겨 버린 백미만 먹다 보니까 티아민이 부족해서 결국 “비타민 결핍증”에 걸리게 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아무리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가져봐도, 그 화려하고 비싼 모든 것들을 다 누려봐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읽어 버리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에는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재의 허무함과 외로움이 끊임없이 찾아오게 됩니다. 각기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밥도 더 먹어보고, 운동도 더 해 봤지만, 갈수록 몸만 더 망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없이 망가진 인생을 고쳐 보려고 해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각기병을 고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고도로 정제된 빵이나 떡 같은 것 말고, 잡곡밥 먹으면 됩니다. 현미밥 먹으면 낫습니다. 정말 간단하죠? 그런데 지난 1884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이런 사실을 몰라서 평생 발목을 집고 살았던 사람들, 호흡 곤란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웠던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죽었던 사람들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 모릅니다.

죄인의 길 걸어가지 않는 방법도 매우 간단합니다. 성경 보면 됩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3년이면 성경 일독 합니다. 하루에 4장씩만 읽으면 1년에 일독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평삼주오”라고 평일에는 3장 주일에 5장 읽어도 1년에 일독 할 수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이렇게 성경 읽는데 하루에 12-15분 정도면 됩니다. 이렇게 성경만 읽어도 우리의 영적 생활이 건강해 집니다.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미만 먹어서 비타민 B1 부족으로 각기병 걸렸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아서 영혼이 아프고 병들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해법은 간단합니다. 성경을 봅시다. 아침에 읽고 틈틈이 읽은 말씀 떠올리며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 의인의 길을 걸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 봅시다.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의인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 받게 될 복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형통함’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팔레스틴 지역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역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약 600mm 정도 되는데, 대부분 이 모든 비가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립니다. 그래서 팔레스틴에는 우기에는 물이 흐르다가도, 건기에는 말라버리는 일명 간헐천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간헐천 옆에서 자란 나무들은 우기에는 잘 자라다 가도 건기에는 뜨거운 뙤약볕에 말라 죽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는 건기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마르지 않은 샘이 되어 주십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물이 부족하여 매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그의 생수의 강, 생명의 근원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죠. 결국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잘 됩니다. 삶이 평탄하고 거칠 없이 형통합니다. 만사 형통 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편은 그 비결을 1편부터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는 거야!”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는 말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영원히 마르지 아니함으로 그의 모든 행사가 계속해서 형통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자, 그러면 반대로 죄인의 길로 갔던 자는 어떻게 됩니까? 4-5절 봅시다. “[1:4-5]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씀의 인도함 없이, 자기 탐욕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의견과 생각만을 추진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덧없는 인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바람에 나는 겨”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이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나한 인생이 되는 것, 그것이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마주하게 될 형벌 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를 누가 아까워 합니까? 그가 평생토록 수고하고 땀 흘려 번 돈, 축적한 재물과 재산 다 덧 없게 느껴지는 재앙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죄인의 길을 걸어간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은 견디지 못할 정도 입니다. “견디지 못한다” 표현은 악인들이 절대로 살아 돌아오거나, 살아 남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심판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결코 의인의 길을 걸아가는 자들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배제 되거나 공동체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길을 가는 자들을 그처럼 인생을 허무하고 외롭게 만드는 형벌을 내리신다는 겁니다.

오늘의 결론 입니다. 6절 봅시다.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 곧 의인의 길로 걸어가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여기서 ‘인정해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시고,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그들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어 주심으로, 주님 안에서 형통과 축복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 죄인들의 길을 걸어간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파멸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도는 “복을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가 진실로 복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