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7.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4] 믿음을 위한 기도 (시편 131편 1-3절)

우리가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살펴 보았던 시가 시편 1편이었죠? 시편 1편 1절 내용 기억 나십니까?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제가 늘 성경 볼 때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뭐죠? 반복되는 것을 찾으라고 말씀 드렸죠? 시편 1편 1절에서 반복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면 안된다! 이 길로 가면 안 된다!”하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력하게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말아라! 죄인들의 길에 서 있지 말아라!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말아라!” 시편 1편 1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서는 안 되는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1편은 마치 시편 1편에 대한 답장과도 같습니다. 오늘 시편 131편도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며” 이렇게 ‘아니하며’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말씀을 살펴볼까요?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편은 다윗이 기록한 글입니다. 다윗은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코 행하지 아니할 3가지 일을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교만함을 버렸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한 교만함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오늘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은 본래 가난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집안에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무시 받는 막둥이었으며, 무더운 낮이나 추운 겨울이나 들판에서 양들을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괄시 받고 자라난 막둥이로서 중고등부 시절에 맥도널드에서 패티 굽는 아르바이트 하며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십대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지금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이 정도 되면 교만해 질 수 있잖아요? “내가 이 정도 살아가는 것. 역시 내가 다 잘났기 때문이야. 내가 싸움도 잘 하고 전쟁도 꽤나 했지. 나니까 골리앗이랑 싸워서 이겼지. 다른 사람이 싸웠어 봐. 벌써 죽었어.” 다윗이 왕이니까 이런 마음 들 수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다윗이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저 본래 가난한 집안 막내 아들로 태어난 산골 촌놈입니다. 이런 제가 이렇게 까지 될 수 있는 모든 이유는 다 주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제가 어찌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뭐라고, 저를 이렇게 예쁘게 봐 주십니까? 저는 하나님께 지은 것이 아무것도 없건만, 어찌 하나님은 저에게 이렇게 좋은 것들만 주십니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 이게 바로 겸손함 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둘째, “하나님, 내 눈이 높지 않습니다!” 입니다. 눈이 높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을 깔보고 무시하는 눈을 의미합니다. 눈이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을 다 아랫사람 보듯이 대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 하고 격이 달라. 난 여기 위에 있고, 너는 거기 아래 있어.” 이런 식으로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다는 듯 세상을 대하는 교만한 눈이 높은 눈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러한 눈을 갖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했습니다.

셋째, “하나님,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입니다. 여기서 “큰 일”이란 중요한 일을 의미합니다. 이 성과를 이루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일, 말 그대로 ‘대사’를 의미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란 “위대한 업적”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크고 중요한 일들, 위대한 업적을 쌓는 데에 내 힘을 쓰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 받으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가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군가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 목적처럼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남에게 보여주기식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40대 중반의 아내가 저녁 늦게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야기 합니다. “여보, 나 다음 주 토요일에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잖아. 나 이 가방 들고는 못 나가! 혜진이 남편은 이번에 고급 승용차 하나 사줬다는데, 지원이 그 지지배는 SNS 보니까 그 구하기 힘든 명품 브랜드 신상 가방 샀더라고. 나 자존심 상해서 이거 들고는 못 나가. 주말에 나랑 백화점 가서 나 더 비싼 라인으로 신사 하나 사야겠어. 그리고 사는 김에 디자이너 옷도 하나 사줘.” 무슨 일일 드라마 대사 같나요?

최근 한국에서 출판 된 책 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책 제목이 [더는 나를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 라는 책입니다. 그냥 제목 자체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대략 아시겠죠? 이제 더 이상 보여주기식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거에요. 책을 보면, 상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K-pop 걸그룹 멤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족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왔어요. 직업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마음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의 한 마디가 이 걸그룹 멤버를 울렸어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하루를 분명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하루를 빼곡히 채울수록 왠지 마음에 공허함이 커집니다. 남들만큼 성공 못하거나, 어제의 나보다 성장하지 못하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초조함… “성취로 증명할 수 없는 나”는 가치 없는 것일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반인들이 1km를 뛰는데,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대략 평균 6분에서 8분 정도 걸립니다. 이에 비해 마라톤 국가대표들은 1km 를 달리는데 4분 안 쪽 입니다. 마라토너들은 엄청난 속도로 2시간 이상 달리는 강인한 체력을 가진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마라톤 선수들이 평소에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 경기 때보다 훨씬 느리게 달립니다. 달리기 속도는 느리지만 더 먼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훈련을 함으로써 마라토너 선수 몸의 산소통 크기를 늘리는 것이죠. 천천히 오래 달려야 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 시간 중 90%는 평소보다 천천히 달리고 나머지 10% 정도만 막판 스퍼트 훈련을 위해 빠르게 달립니다.

하루는 한국의 어느 마라톤 선수가 한강변에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 햇살이 비추고, 산뜻한 봄 바람도 불어오는 아주 기가 막힌 날씨였습니다. 개나리 피고, 나비가 날아가는 풍경 속에 아주 행복하게, 그러나 또 천천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중, 문득 주변 사람들이 달리고 있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또 주변에 자신처럼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거에요. 한 사람 두 사람 자신을 앞질러 가기 시작합니다. 왠지 사람들이 자기를 느린 사람, 잘 못 달리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 내가 한 번 보여줘?!” 그리고 그는 속도를 올려서 시합 때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앞서 제치고 지나갔던 한 사람 두 사람을 따라 잡았습니다. 그리고 누구 보다 앞서 뛰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훈련 때 목표로 하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전력 질주해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달리는 자신의 모습에 경의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만족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훈련을 마친 이후였습니다. 페이스를 잃고 무리해서 빠르게 달리다 보니 다리 근육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선수는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달리는 것일까? 왜 나는 훈련 중에 내가 목표로 했던 페이스를 잃어 버렸을까? 아, 내가 지금 남을 의식하며 달리고 있구나? 사람들에게 느린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자꾸만 증명하려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너 보다 더 잘 뛰어! 내가 더 보다 더 빨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보니 달리기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던 것이죠. 그래서 속도에만 신경을 쓴 채 달리다 보니 어느 새 달리기의 참 된 재미도 잊어 버린 채, 주변 자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재미 없는 달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사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에게 증명하려고 사려가는 사람은 결국 보여주기식의 삶으로 인해 가짜의 삶, 불안정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를 넘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성장을 이루도록 나가야 합니다.

1절 다시 보세요. 내가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기 ‘힘쓰다’란 표현은 영어로 ‘occupy’ 입니다. 내가 지금 무언가 하려고 몰두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왜 우리가 가끔 누군가 나를 불러도 몰두하고 있는 그 일로 인해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못 듣고 대답 못할 때가 있죠? 그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힘쓰고 있는 상태에요. 다윗은 큰 업적을 이루거나,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나를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일 때 행복합니다.

잠깐 1절 다시 보세요. 처음에는 마음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나하고”, 마음에서 어디로 바뀝니까? 눈으로 갑니다.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교만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교만함이 눈이라는 신체를 통해서 외부로 표출됩니다. 마치 시편 1편 1절에서 마음에서 시작된 ‘악인의 꾀’가 결국 ‘죄인의 길’에 서게 한 것처럼, 교만한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시편 1편에서 마음에서 시작된 ‘악인의 꾀’가 ‘죄인의 길’에 서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 길에 나아가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하는 것과 같이… 이제 시편 131편에서는 내 마음에서 시작된 교만이, 내 눈으로 남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일들, 남들이 알아줄 만한 업적을 쌓기 위한 삶,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점점 커져 갑니다. 다윗은 이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한 것입니다. 총 3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다윗은 한 가지 삶을 결코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삶입니까? 바로 ‘교만’한 삶입니다.

그럼 이제 다윗은 어떤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 합니까? 2절 말씀을 봅시다.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절 첫단어 ‘실로’는 영어로 Surely 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주님! 확실하게 저는 앞으로 이런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삶입니까? 고요하고 평온한 삶. “고요하다”는 것은 quite 한 삶, 소란스럽지 않은 삶이겠죠? “평온하다”는 히브리어를 우리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땅이 평평한 상태 입니다. 누가 와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해도, 내 마음을 격동 시켜도 흔들리지 않은 평평한 상태 그게 평온입니다.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불어서 넘실대는 파도 위에 있는 배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안정 하겠습니까? 그러나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 위의 배는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게 평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는 고요함과 평온함은 자기 인생이 잘 풀려서, 하는 일이 잘 되서 누리는 그런 고요함과 평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합니다만, 오히려 현실적인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요함과 평온함 입니다. 아무리 장대비가 내리고 천둥이 쳐도 벽돌로 쌓은 튼튼한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려서 그거 마시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유리창을 때리는 빗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인생에 어려움이 있어도, 보호자/구원자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있기에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이 머물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고요함과 평온한 상태를 젖 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이제 막 엄마 젖을 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무릎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엄마 품 속에서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나를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해 주는 엄마가 내 곁에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어린 아기가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는 우주다!” 아이에게 엄마가 없다? 그 아이에게는 우주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전부에요! 아이에게 엄마는 우주에요. 어린 아이들이 가진 그 천진난만함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엄마가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기에 생기는 기쁜 감정 아니겠습니까? 아이가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도, 엄마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면 그 때부터는 인형도 장난감도 소용이 없습니다. 엄마 다시 돌려 달라고 엉엉 우는 거 보신 적 있으시죠? 오늘 다윗의 고백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저에게는 우주세요! 하나님이 저의 전부세요! 하나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다윗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왕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영토 확장하고, 자기 이름으로 기념비 세우고, 국가적 사업 이루어서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고 하고 했지만, 다윗은 그런 것 안 했어요. “여호와가 저의 목자 되시니 저는 아무 것도 부조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우주 되십니다!” 이 고백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다윗의 영혼을 고요하게 만들어 주었고, 평온함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제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인생이 이미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3절 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스라엘아!” 라는 말은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이렇게 해석해도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지금부터 미래까지 이런 느낌이 아닙니다. 내가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순간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그 순간에도! 비록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려울 지라도, 그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 초청입니다.

오늘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 120-134편, 15개) 오늘 우리 상황으로 말하면, [주일에 교회에 예배 드리려 가면서 부르는 노래]인 셈입니다. 오늘 교회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나도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인정 받는 삶을 살고 싶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인생은 왜 이것 밖에 안 될까?” 하는 식의 마음은 없었습니까? 더 이상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지 맙시다. 남에게 보여주기 식의 인생을 사는 것은 공허함과 후회만 남을 뿐 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욕망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며, 불안과 강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그 분을 예배 하는 것(Worship!) 그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입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우주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주이십니다. 우리의 전부 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고백함으로써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머무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