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13. [시편의 기도들] 시리즈 [2] 회개를 위한 기도 (시편 130편 1-8절)

지난 주일, 우리는 시편 1편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죄인의 길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둘 중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옳은 길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옳은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가라고 보여주신 의인의 길을 갈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경고하신 죄인의 길을 걸어가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의 길을 걸어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고발했고, 사도 바울은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 1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죄인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인간은 결국에는 또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알게 모르게 죄인의 길을 또 다시 걸어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죄인의 길을 걸어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우리 모두가 이미 죄인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0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을 걸어간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이 걸어가던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아서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한 단어로 ‘회개’라고 말합니다. 시편 130편은 회개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봅시다.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은 시편 130편을 보면 위에 제목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시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총 15개가 있습니다. 시편 120-134편까지가 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입니다. 이 노래들을 언제 불렀을까요? 타 도시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절을 맞이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고향 땅을 떠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명절 때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던 노래들이 바로 시편 120-134편 인 거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30편도 그 노래 중 하나 입니다. 명절이란 즐겁고 기쁜 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30편 1절을 보십시오. 마치 탄식하는 목소리처럼 오늘 본문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130: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인은 자신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곳’이란 죄인의 길을 걷다가 빠져 버린 깊은 웅덩이, 수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길로 걸어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자의 삶은 결국 깊은 곳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고통이 찾아오고, 환난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길을 걸어간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이고 벌입니다. 결국 시인도 시편 1편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인의 길을 걸어가다가 그만 인생의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걸어가지 말라고 하는 길을 걸었더니 결국 이처럼 내게 고통이 찾아오는구나?” 인생의 나락을 깊게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고, 죄악의 길을 선택한 지난 날이 후회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복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의 길을 걸어감으로 인해 인생이 심연에 빠진다 해도 여전히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고, 우리가 당한 환난이 아무리 크고,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1절 다시 한 번 보십시오. “[130: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 말은 “주님, 제가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죄인의 길을 걸어가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저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인정합니다. 이 모든 상황은 제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죄악을 선택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제 제가 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저를 이 깊은 곳에서 건져 주십시오!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2절에 나오는 시인의 울부짖음을 들어 봅시다. “[130: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절 자세히 보세요. 언뜻 보면 잘 안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실 시인은 똑같은 요청을 두 번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이 간구하고,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는 사실 같은 내용입니다. 왜 같은 기도를 이렇게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일까요? 2절에는 시인의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기도가 간절해지면요, 기도가 단순해 집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 제목만 반복해서 기도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지금 시인의 기도는 편안할 때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큰 위기와 환난 속에서 올려 드리는 간절하고 절박한 간구였습니다. “하나님 제발 좀 살려 주세요. 하나님 제발 좀 도와 주세요. 하나님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이런 기도처럼 사실 내용은 다 같은데, 반복해서 기도하는 거죠. 그만큼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번 시인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도 자신이 왜 이런 위기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걸어 가지 말라고 하신 죄인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인데 그 누구를 탓하겠어요?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으로 한 가닥 소망으로 붙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못난 죄인들일 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새로운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어서 이렇게 기도 합니다. 3-4절 봅시다.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3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두 눈으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훤히 다 뚫어 보고 계시는데,이 세상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 없다’하고 감히 서 있겠습니까?” 요즘 한국이 마약 때문에 비상이죠? 한국은 요즘 말 그대로 마약과의 전쟁 중입니다. 뉴스 보니까 인천 공항에서 불법으로 몰래 숨겨 가지고 오다가 발각된 마약의 양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전에는 마약을 밀수할 때 인형이나 신발 같은 물품 안에 숨겨서 가지고 오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마약을 밀수하는 방법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케나다에서 한 어린아이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생일축하 카드가 도착 했습니다. 본래 생일카드 종이가 다른 일반 종이에 비해서 좀 뻣뻣하고 두껍잖아요? 그 사이에다가 마약을 집어 넣었습니다. 요즘에는 쿠키, 초콜릿, 젤리 등 눈으로 보면 일반 아동들 간식처럼 보이는 마약류들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비누 속에 마약을 숨기는가 하면, 몸에 바르는 특유한 향이 나는 바세린 안에 밀봉된 마약을 넣어서 냄새가 아예 차단된 상태로 마약을 밀수하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공무원들이 땀을 흘려가며 다 잡아내도, 한계가 있어 한국에 어떠한 경로로든 지금 계속해서 마약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꽃 같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서 인간이 숨길 수 있는 죄악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그거 제가 한 거 아닌데요?” 이렇게 변명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어찌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죄악을 알고 계시고,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고백합니다.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질 나쁜 죄악 된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하고, 침을 뱉을 정도로 추악한 죄인일 지라도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은 또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 대목에서 기독교를 오해합니다. “어? 목사님 그럼 죄 짓고 또 회개하면 되겠네요?” 실제로 저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제 주일학교 선생님께 물어본 질문입니다. “선생님 그럼 도둑이 도둑질 하고 회개하고, 다음 날 도둑질 하고 회개하고, 또 계속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죄악을 짓고 살아도 된다는 안심과 방종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하는 회개는 가짜 회개 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드리며, 진정한 회개의 열매는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져 삶의 변화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다시 그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지난날 저지른 커다란 죄와 과오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을 경외하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두려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운명이 판사의 선고에 따라 운명이 좌우 될 수 있음을 알기에, 판사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깊은 웅덩이에서 끝내 버리실 수도 있고, 혹은 웅덩이에서 건져 내실 수도 있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주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누구라도 진실 되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고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하게 신뢰하기로 다짐했습니다. 5절 봅시다. “[130: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인은 지금 “깊은 곳”, 즉 환난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5절 후반절에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되어 있죠? 이 말은 더 쉽게 해석하면 “나는 주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에 제 소망을 둡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비록 죄를 지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이곳에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 하셨어. 내가 부르짖으면 반드시 또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실거야!” 이런 믿음이 있기에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6절 봅시다. “[130: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파수꾼은 모두가 잠든 늦은 저녁 시간 성벽 위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해가 뜰 때까지 성 밖에 적군이 공격해 오지는 않는지, 성 안에서 도둑이 있지는 않은 지 보초를 서야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혹시 밤새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주변에 계십니까?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파수꾼은 오피스 안에서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 직업이 아니에요. 추운 겨울에도 살을 에는 듯한 칼날 같은 바람을 다 몸으로 맞아가며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무게가 꽤 나가는 보호대를 착용하고, 무거운 무기를 들고 밤새도록 서서 일해야 합니다. 파수꾼의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파수꾼이 얼마나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습니까?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깊은 웅덩이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린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파수꾼이 깊은 밤, 날씨가 춥고, 몸은 무겁고, 배는 고프고, 눈꺼풀은 감기고, 피곤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한 가지 분명한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다음 날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의 마음도 같습니다. 비록 지금 자신이 깊은 곳에 갇혀 있고,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으며, 언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7절에 사용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표현은 앞서 5절에서 사용된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는 표현과 같은 말씀입니다. 즉 7절을 다시 해석하면 “이스라엘아 너의 소망을 여호와께 두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하반절에 나온 것이죠. 우리가 여호와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면 구속,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고, 고난 중에 처한 그의 백성을 수차례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보고 싶은 표현이 한 가지 있습니다. “풍성한 속량”이란 표현입니다. 속량을 이해하기 쉽게 구원으로 바꾸자고 했죠? “풍성한 구원” 무슨 뜻일까요? 풍성하다는 말은 사실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차고 넘치게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버지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하고 구하면, 아버지가 조그마한 티스푼으로 밥 한 숟가락 퍼 주겠습니까? 아니죠. 큰 밥주걱으로 고봉밥처럼 넉넉하고 풍성하게 퍼 줄 겁니다.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부서질만큼 풍성하게 밥상을 맛있게 준비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풍성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고, 구원 하시는데, 우리가 감동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시편의 결론은 8절 입니다.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죄의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이 미련하여 각기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길로 살겠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죄인들입니다. 혹시 그러다 깊은 곳에 빠지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깊은 곳에서부터 친히 건져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이 길은 회개를 통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인생이 깊은 곳에 빠져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다시 주님을 부르짖으십시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기다리십시오. 날이 아무리 어두워도 반드시 해가 뜨듯이, 우리 인생의 고난이 끝없이 길어 보여도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풍성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