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9.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요나 1:1-17)

Q1. 왜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는가?

하루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죄악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습니다.’하고 외쳐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신 명령은 2가지 입니다. “어서 니느웨로 가라!”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고 외치며 회개하라고 전해주어라!” 선지자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더니, 그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말입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은 여기 3절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라는 표현에 밑줄을 그으십시오. 오늘 1장에 이 표현이 3번 반복 됩니다. 성경 요나서 1장에 제목을 붙여 본다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요나” 이렇게 잡아 볼 수 있겠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한 단어로 요나의 마음을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망’입니다. 누구에 대한 실망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왜 요나가 실망했어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 이름 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적들과의 전쟁에서 사로 잡은 자들은 코를 배고, 목을 쳤습니다. 임산부들의 배를 갈랐고, 뱃속의 아이까지도 다 죽였습니다. 전쟁의 포로로 끌려온 남자들의 사지를 자르고, 심지어 산 채로 사람의 피부 가죽을 벗기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당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악하고 질 나쁜 극악무도한 원수가 또 없습니다.

요나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당장 앗수르를 불로 심판하셔서 그 큰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것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 말로 공의가 완성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죄가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선지지이기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앗수르가 악한 나라요, 잔인한 민족이지만 그들이 만일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란 사실을 요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사역이 실패할까 두려워서 니느웨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성공할까 두려워서 니느웨에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잔인한 원수 국가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란 것을 요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요나는 하나님께 대한 밀려오는 ‘실망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악랄한 원수 앗수르를 용서 하시려고 하시지? 임산부들의 배를 가르고, 이스라엘 군사들의 피부 가죽을 산 채로 벗겨 죽이고, 코를 배고 목을 밴 저 악인들을 왜 용서하려고 하시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난 필요 없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난 안 믿으련다. 이제 하나님 하고 나 하고는 끝이다!” 이와 같은 깊은 하나님을 향한 실망감 또는 배신감에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실망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어쩌면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그토록 간절히 구했던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 했던 직장을 안 주셨습니다. 그토록 기도하던 배우자를 안 주셨습니다. 자녀를 안 주셨습니다. 오래된 질병이 낫거나 큰 문제가 해결 되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아니면 특정한 상황에서 이렇게 해 주시기를 바랬는데, 하나님께서 전혀 간섭 하거나 일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 깊이 실망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 정말 실망했어요.” 라고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실망감 또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우리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 상태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며 “괜찮아. 괜찮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께 엄청 실망했는데, 마치 실망하지 않았다는 듯이 쿨한 척 하며 그냥 그렇게 마음 속에 감정을 감추며 지내는 겁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기도해도 소용 없어.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하나님 뜻은 내 뜻하고 다른데 뭐…” 하나님께 실망하게 되면 이처럼 실망의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거나, 아예 완전히 실망해서 기도 조차 포기하고 살게 되거나 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반응 중 한 가지라도 하고 있다면, 비록 우리가 요나처럼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타고 있지 않아도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요즘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몸은 주일에 교회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삶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떠한 기대도 없이, 소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자신의 실망감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안은 척 신앙생활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적신호 입니다.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빨리 케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빨리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 요나의 영혼을 보십시오. 그의 영혼도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느낀 실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3절에 ‘다시스’라는 단어 보이시죠? 스페인에 있던 고대 항구 도시 이름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아직 지구가 평평 하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유럽 사람들에게 지구의 끝은 서쪽 끝에 위치한 나라 곧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도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서 자기가 갈 수 있는 땅 끝, 스페인에 있는 항구 도시인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한 거죠. 그런데 여기 3절 말씀 다시 보세요.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니…” 그 다음 단어가 뭐죠? “마침!”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무슨 뜻이 되는가 하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항구에 땅 끝까지 가는 다시스 행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에요.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도망치려 결심하면, 사탄은 항상 완벽한 교통 수단을 제공합니다.” 이게 무서운 거에요. 여러분 상황이 열린다고 해서 다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해요. 요나 보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고 살아가던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스 행 배 보자 마자, ‘옳다구나!’ 하고 배에 승선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나의 인생에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인생에 주어지는 형벌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Q2. 도망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은 추락의 연속(고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요나,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낀 요나, 그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항구에 정박해 있던 다시스 행 배에 배삯을 주고 배에 오르게 됩니다. 3절 맨 마지막 단어 주목해 보십시오. 맨 마지막 단어가 뭐에요? 배에… ”올랐더라” 이게 요나서 1장에서 나오는 유일한 올라가는 표현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내려갈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지금 당장은더 잘 살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성공하는 삶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은 결국 추락의 연속일 뿐입니다.  요나의 인생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이제부터 계속해서 내려가는 인생이 됩니다. 한 번 말씀을 찾아볼까요?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이후 그의 인생은 점점 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게 되면 고난의 연속이고 추락의 연속이 찾아오게 됩니다. 성경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83년 7월 18일, 당시 미국 공군 대령이었던 윌리엄 화워드 휴즈 주니어라는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미국의 핵무기를 유지하고 연구하는 분야였습니다. 또한 그는 국가의 중대한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소련과의 핵전쟁에 언제라도 지구상에 종말이 올수 있다고 위협받던 시기 입니다. 따라서 당시 윌리엄 대령의 실종은 미국 군대에서는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납치 되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 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소련으로 망명 했다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35년이 흘렸습니다. 모두들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기억 속에서 그의 이름은 지어졌습니다. 그러던 지난 2018년도 6월 6일 아침, 미국 공군 특수 요원 팀이 샌프란시스코 외곽에서 35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윌리엄 대령을 탈영 혐의로 체포하게 되면서 미국 전국의 메스컴을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난 35년간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도피 생활을 했을까요?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그가 도망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Depressed about his job, he had simply run away.” 조국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죠. 그로 인해 그는 평생 언제라도 붙잡힐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은 35년간 눈물과 아픔 가운데 살았습니다. 조국의 수많은 군인들은 핵전쟁의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윌리엄 대령처럼 실제로 인생에서 탈영하거나, 내게 주어진 임무를 버리고 갑작스럽게 떠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 내가 고백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인생은 매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도망친 요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4절 말씀을 봅시다.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를 항해하고 땅 끝으로 도망치고 있는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큰 폭풍으로 인해 발생한 강력한 파도로 인해 요나가 타고 있던 배는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배를 타고 있던 사공들은 두려워하며 각각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들을 배 밖 깊은 바다로 던졌습니다. 이들은 해로를 이용해 물건을 사고 파는 무역상으로 짐을 바다로 던진다는 것은 엄청난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런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죠. 한편 이 긴박한 순간 요나는 배 밑층에 누워 깊이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배의 선장이 요나를 깨웠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선장은 배가 파선하기 직전에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보고 소리치며 나무랐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지금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요나는 굳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런 요나의 속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 선장이 와서 요나에게 “왜 당신이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습니까?”하고 책망한 것이죠.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기가 막힌 지혜요,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요나가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궁지로 그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본문 속 요나의 모습을 묵상해 보면, “내 죽으면 죽었지, 나 하나님은 안 찾는다!”고 똥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선지자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이처럼 고집을 피우는 동안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끝내 선원들은 이 재앙의 근원이 누구 때문인지, 그 어떤 못난 이가 신을 화나게 만들어서 이 재앙을 자신들에게 끌어 들였는지 찾기 위해서 제비 뽑기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무역을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찾아 온 이방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방신이나 갖가지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신의 존재는 믿고 있었습니다. 무신론자도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의 상황에서는 초월적인 존재인 신을 간절히 찾기 마련입니다. 자, 선원들의 제안으로 신의 화를 불러온 사람을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가 진행 됩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신의 심기를 건드린 재앙의 원흉으로 누가 뽑혔습니까? 놀랍게도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 때 요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속으로 이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내시는구나? 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구나?’ 요나는 지금 자신이 가는 이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도 가는 중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는 중대한 죄악을 저지르는 중이라는 것을 속으로 꽁꽁 숨기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요나의 입으로 그의 죄악을 고백하게 만드셨습니다.

8절을 봅시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재앙의 원흉으로 지목된 요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10절, 요나가 자수하는 장면을 봅시다.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0절을 통해서 우리는 선지자인 요나가 분명하게 왜 이 고난이 자신에게 임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분명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9절에 요나가 고백하잖아요.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바다에도 계시고, 육지에도 계시고, 하늘에도 계십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군요…” 이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 이 정도 됐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 두 손 두 발 들고 회개 해야죠. 요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어떤 분들은 한 가지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고집 부리며 끝까지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매우 미련한 것입니다. 술에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까? 술 끊고 돌아오면 됩니다. 음란한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이제라도 음란한 삶을 끊어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 인생은 치명적인 실수로 돌이킬 수 없고 이제 다 끝났다는 듯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십니까? 아니죠?! 그럼 우리에게는 지금도 소망이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나는 곁에서 이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극단으로 치우칩니다. 11-12절 봅시다.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왜 제가 요나가 극단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요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잔인하고 흉악한 앗수르 사람들도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용서해 주실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내사, 그가 탄 배에 폭풍우를 일으키시고, 제비뽑기에서 그가 뽑힘으로서 그의 입으로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도록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한 마디도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도 안했습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요나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에요? 끝까지 고집 부리고 있는 거에요. 요나가 바다에 빠져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그 시도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트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봅시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은 여기 “이미”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한 번 쳐 봅시다. 요나는 자신의 인생을 불순종한 선지자로서 바다에 빠져 죽는 불명예스러운 삶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불순종한 요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회복되어 다시금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삶, 사명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처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했던 요나, 이제는 다 끝이라고 생각하며 바다에 빠져 죽으리라고 생각했던 요나,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야 말로 은혜 중의 은혜 입니다.

 

옛날 고려 시대에는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고려장]이라고 부릅니다. 부모가 늙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산 채로 산이나 들에 내버리고는 돌아 가시면 이후에 그곳에 매장하는 비정한 풍속이었습니다. 고려장에 관한 설화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하루는 고려장 풍습대로 어머니를 산에 버려 두기 위해 등에 지게에 매고 그 위에 어머니를 엎어 태웠습니다. 한참 깊은 산속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머니도 아들도 말 한 마디가 없습니다. 서로 이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어머니가 자꾸만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가 버리는 거에요. 긴 침묵을 깨고 아들이 나이 든 백발의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 손목도 안 좋으신데 왜 그렇게 자꾸만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다가 버리세요?” 그 때 노모가 하시는 말씀이 “니 돌아가는 길 못 찾아서 산 속에서 헤메이다 길 잃어 버릴까 그러제.”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껴안고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는 설화가 있죠. 부모의 마음이 그런 거겠죠? 자식은 부모를 버리고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해도, 부모의 마음은 행여 내 자녀가 길 잃으면 어떻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부모 마음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요나서 1장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사용하셨을까? 요나보다 더 나은 사람,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많았을탠데. 왜 하나님은 굳이 요나를 끝까지 사용하셨을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왜죠? 제가 하나님께 들은 대답은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요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들 중 요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하나님께 실망해서 더 이상 간절하게 기도도 안 하고, 하나님하고 서먹하게 지내면서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에는 지우개가 하나 붙들려 있습니다. 그 지우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내 아들 예수의 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그 지우개로 지우지 못할 우리들의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지우면 깨끗하게 씻기고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회복의 길을 준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그만 도망칩시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실망한 것,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계획 앞에 서운했던 것… 그러한 감정 조차도 숨기려 하지 말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의 관계 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 그 끝 없는 사랑 안에서 날마다, 매 순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