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30. [요나서 강해] [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자비 (요나 4장 1-11절)

 

우리는 지난 주 요나서 3장 말씀을 통해, 본래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쳤던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를 향해 나아가는 장면을 함께 살펴 봤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큰 성 니느웨를 돌아 다니며 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여 버릴 심판을 경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은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심판하시려던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여기까지가 3장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요나의 분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 잔뜩 화가 났을까요? 요나가 볼 때 니느웨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선량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다가 죽였고, 산 채로 피부를 벗기고, 목을 베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잔인 무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불이라도 내려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망시켜 버리실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요나가 볼 때는 악한 니느웨 사람들이 받아야할 매우 정의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기대와 다르게 니느웨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악인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이런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아주 오래 전 시골에 사는 서준이란 이름의 한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하루는 수업이 다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박 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하나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초등학생은 주위를 둘러 보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몰래 수박을 서리하자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밭 주인인 과수원 주인 아저씨에게 걸렸습니다. “네 이놈! 어린 녀석이 어디 감히 과일을 훔쳐?!” 주인 아저씨는 학생을 혼냈지만, 또 학생이 얼마나 수박이 먹고 싶었으면 서리를 했을까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마을 정자에 학생을 데리고 가서 맛있는 수박을 하나 칼로 잘라 먹게 해 주었습니다. 서준이는 평생 그렇게 달고 맛있는 수박은 처음 먹어 봤습니다. 아저씨가 먹고 가라고 조청이 발라 있는 찹살 유과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가래떡도 먹고 가라고 주시고 심지어, 꿀도 내어 주셨습니다. 과수원 주인 아저씨가 내어 준 시원한 식혜까지 먹은 서준이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 길에 서준이는 또 수박 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서 보니 평상시 학교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때리고, 무척 괴롭히고, 학교에서 못된 짓만 일삼던 병철이가 수박 밭에 몰래 들어가 수박 서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병철이는 쉬는 시간만 되면 서준이를 놀리고 괴롭히던 못된 친구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과수원 주인 아저씨가 또 나타나 뒤에서 병철이 오른쪽 귀를 잡았습니다. “네 이놈! 도둑놈 잡았다! 어디 어린 녀석이 남의 밭 과일을 훔쳐가!” 아저씨는 혼이 나가도록 병철이를 혼냈습니다. 서준이는 이 모습을 보고 속으로 고소해 하고 있었습니다. “옳지 병철이, 너 평소에 나 못 살게 굴었지? 이 참에 아주 혼나 봐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좀 전까지 불 같이 화를 내던 과수원 주인 아저씨가 병철이를 정자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지난 번 자기에게 주었던 것처럼 유과도 내어 주시고, 이번에는 이번에는 맛있는 수정과도 내어 줍니다. 서준이가 헐레벌떡 정자로 달려갔습니다. “주인 아저씨! 얘는 이렇게 잘해 주시면 안 되요! 병철이가 얼마나 못된 애인데요?! 수박 서리 했다고 빨리 경찰에 신고하셔야 되요! 저 맛있는 수박을 내어 주다뇨?! 아저씨가 병철이를 모르셔서 그러는데 제 진짜 나쁜 아이에요!” 서준이는 지난 날 자신도 과수원 주인 아저씨 밭에서 수박 서리 하다가 혼난 것을 잊어 버렸나 봅니다.

요나의 마음이 딱 서준이 마음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탄 배에 폭풍우를 보내셔서 결국 바다에 던져졌고, 큰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가 3일 동안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자,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뭍 밖으로 꺼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한 번 선지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이죠. 요나는 이처럼 자기 자신도 큰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받아 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시려던 것을 돌이키신 것을 보고 매우 싫어하며 크게 화를 내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나 같을 때가 없습니까? 가까운 사람이긴 한데, 무언가 그 사람이 내 맘에 들지 않습니다. 멀리서 지낼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가까이서 지내 보니까 알고보니 자기 밖에 모르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고집쟁이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그 사람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싫어 집니다. 욕하거나 저주한 적은 없지만, 그 사람 잘 되는 꼴은 더 보기 싫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들려 옵니다. “김 집사님 들었어? 그 최 집사님 있잖아? 이번에 그 좋은 도시 있잖아. 거기로 집 더 큰 구입해서 이사간데. 그 아들 있잖아 이번에 하버드 대학교 간데. 그 남편 있잖아 이번에 회사에서 임원진으로 승진했데. 연봉이 꽤 올랐다고 하지?” 분명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인데, 듣는 나는 속으로 너무 싫은 거에요. 막 짜증이 나는 거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아니 하나님, 그 최 집사님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 사람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데요? 얼마나 고집불통이고, 맨날 교회에서 분란만 일으키고 얼마나 사고뭉치인데, 하나님 어떻게 그 사람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어요? 하나님 저 너무 답답해요. 솔직히요 하나님, 저는요 하나님 차라리 그 분이 망했으면 좋겠어요! 그 분은 한 번 쫄딱 망해봐야 되요. 그래야 정신을 차리죠! 그래야 사람이 겸손해지죠!” 이게 오늘 본문 속 요나 마음입니다.

우리들도 겉으로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이처럼 다른 이들의 기쁜 소식에 짜증을 내고, 불만을 갖고 살아간 적은 없습니까? 내가 볼 때는 상대방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화를 당해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더 마땅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자꾸만 그 사람을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느껴지니까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요나가 오늘 하나님께 느낀 마음은 두 마디 정리하면 ‘분노’와 ‘서운함’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 인간에게 저렇게 잘 해 주실까? 저 사람은 저런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는데 말야! 제는 한 번 크게 한 번 당해 봐야 되!” 이런 마음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라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영적 교만 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요나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마음은 없습니까? “나는 주일에 교회를 나오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있지! 나는 저 집사님 보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을 자격이 있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영적 교만 입니다. 우리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이 은혜 입니다. 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셨는지, 왜 나 같은 못된 사람을 구원해 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역시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교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보고 왜 분노 했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을 자격이 있지만, 니느웨는 그럴 자격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그의 영적 교만 때문입니다.

요나가 얼마나 크게 짜증을 내며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 하고 있는지 한 번 말씀을 봅시다. [4:2-3]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한이 없으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는 선지자이기에 하나님의 이와 같은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와 자비를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 사람들이 받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처음부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철회하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요나가 생각할 때 니느웨 사람들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반드시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악인들이었습니다. 그런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아 용서를 받았으니, 요나는 머리 끝까지 화를 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지 3절을 보니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을 할 정도로 불쾌감과 화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런 마음은 실상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서 자비와 은혜를 받아 용서함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영적 교만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요나가 속한 북이스라엘은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며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니느웨 사람들의 부패상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고, 니느웨는 용서해 주셔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요나의 이런 잘못된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4절 입니다.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신 일에 대하여 요나가 분을 내고 있는 것은 부당한 반응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되신 권리를 가지고 행하시는 일에 요나가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분노할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느 일에 대해서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만 보여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요나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사명을 버리고 도망친 요나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한 길을 걸어갔던 니느웨도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절, 9절, 11절에 걸쳐 총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질문형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답을 구하기 위해 물어 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명확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들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자신의 기준에 맞게 제한하려고 했던 요나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질문이었습니다. 요나는 깨닫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번에도 부당한 분노를 내고 있는 요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그에게 또 한 번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요나는 니느웨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보시고 심판을 철회하셨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니느웨 성읍의 상황을 감찰하기 위해 성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5절을 봅시다. [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요나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악인들이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셔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 성읍이 회개하지 않으면 40일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메시지를 주셨기에, 요나는 장기간 머물며 성읍의 동태를 살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성읍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관찰했습니다.

이 때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키보다 더 큰 박넝쿨을 자라나게 하사 그의 위로 그늘 지게 하셨습니다. 잎사귀 크기만 해도 30cm 보다 크고, 줄기가 약 3m 까지 자라는 큰 넝쿨 식물입니다. 이는 뜨거운 태양빛(뙤약볕)으로부터 요나가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6절을 봅시다.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 주신 박넝쿨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역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 입니다. 7절 봅시다. “[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이튿날 새벽이 되자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사 어제 주셨던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셨습니다. 결국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 버렸습니다. 곧이어 해가 뜨자 뜨거운 사막 동풍이 불어 왔습니다. 무서운 태양 빛이 요나의 머리를 비추니 그는 덥고 어지러워 몹시 힘들어 했습니다. 요나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제가 하나님의 선지자 아닙니까? 저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 박넝쿨 제가 잘 쓰고 있었는데 왜 가지고 가셨어요?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 주세요!” 요나는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고 시원한 그늘막이 되어 주었던 박넝쿨이 시들어 죽은 일에 대해 몹시 아까워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서 요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9-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9-11]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는 박넝쿨을 심기 위해 씨를 뿌린 적도 없습니다. 비료를 준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넝쿨이 시들어 죽자 요나는 분을 내며 스스로 죽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나의 고집과 잘못된 주장을 역이용 하셨습니다. “요나야, 너가 박넝쿨을 키우기 위해서 수고한 일이 있니? 너가 박넝쿨을 자라도록 땀을 흘렸니? 아니지 그런데도 너는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이 시들어 죽었다고 이렇게 안타까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물며 너가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 니느웨 성읍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되지 않니?” 여기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란 뜻은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 수준이 낮은 대략 6세 미만의 유아들을 의미합니다. 그 어린아이들의 숫자만 12만 명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성읍에 대략 60만명 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나야, 이 성읍에는 좌우를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들 숫자만 12만명이나 있고, 이 성읍에는 가축들도 많단다. 너가 박넝쿨을 아꼈듯이 내가 이 성읍을 어찌 아끼지 아니 하겠니?” 요나서는 하나님의 이 질문으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문학의 한 용법입니다. 즉 요나서의 저자는 이 글을 읽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지옥에 가도 마땅한 저 악인, 하는 일마다 다 안 되었으면 좋겠고, 망해 버렸으면 좋겠고,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 원수들…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는 그들도 불쌍한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내가 볼 때는 정말 왜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예수 믿는 사람인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 사람이 예배 드리고 은혜 받고 신앙생활 하게 놔 두십니까? 저 사람은 망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서 쫓아내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잊어 버린 사람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 받아 죄사함을 받은 빚진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일은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고 누구는 자격이 없다’를 따지는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 끝이 없는 사랑과 다함이 없는 은혜로 지금도 죄인들을 불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증거하며, 또한 우리들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