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3. [요나서 강해] [3]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요나 3장 1-10절)

 

1929년, Rose Bowl 이라 불리는 college Football 경기가 있었습니다. 1930년만 해도Rose Bowl은 당시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이 보는 대학 챔피언십 게임이었습니다. 1929년에 Georgia Tech는 Rose Bowl 에서 University of California 와 결승전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경기 중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 선수가 실수로 공을 떨어트렸습니다. 바로 그 때 Georgia Tech의 “로이 리겔”(Roy Riegels)이란 선수가 그 떨어진 공을 주웠습니다. 그는 터치 다운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공을 차지하기 위한 몸 싸움 중간에 그만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상대팀에게 점수를 주게 되려는 끔찍한 상황이 버려지려는 순간,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그를 따라잡고 골 라인에서 6인치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로이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축구로 따지면 자살골이죠? 미식 축구 선수로는 최악의 실수였습니다. 결국 Georgia Tech는 자기 팀 골 라인 근처에서 공을 다운 했고, 캘리포니아 대학이 다시 공을 가졌습니다. 로이의 이 엄청난 실수 덕분에, 상대팀은 득점하는데 아주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첫 번째 하프 타임이 끝나려고 하는 바로 직전, 켈리포니아 대학이 득점했습니다. 로이는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매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점수 차는 7점 차로 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프타임이었습니다. 축구에서 하프타임 때 보통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만일 팀 선수들이 잘 못하거나 실수하면 코치들은 선수들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치곤 합니다. 미 전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기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코치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로이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그의 선수 생활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의 팀원들마저도, 모두가 그를 안타까워하며 조용히 벤치에 앉아, 코치가 무엇인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로이는 구석에서 울면서,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자책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전 세계의 수백만 명이 이 챔피언십 경기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두 번째 하프타임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습니다. 선수들이 라커룸을 나가기 직전, 그제서야 코치가 입을 열었습니다. “전반전에 나갔던 모든 선수들이 나머지 후반전도 뛴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모두가 급하게 떠났지만, 로이는 뒤에 남아 있었습니다. 눈물이 그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로이가 코치에게 말했습니다. “코치님, 저는 다시 시합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를 실망시켰어요! 저를 다시 경기장에 내보내지 마세요. 저는 너무 큰 실수를 했어요. 저를 다시 거기에 보내지 마세요.” 코치는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로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너는 아직도 우리 팀원이야. 지금 다시 거기에 들어가서 강하게 끝내라.” 코치의 말을 들은 로이는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경기에서 이긴 팀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로이의 팀인 Georgia Tech 였습니다. 이처럼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운동 선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코치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바로 두 번째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누구나 잘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기회를 받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나서 1장에서는,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그의 사명을 버리고 멀리 숨으려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거나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요나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찾아냈습니다. 요나서 2장에서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를 봤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며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큰 물고기는 요나를 다시 뭍으로 내뱉어 냈습니다. 그로 인해 요나는 이제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절과 2절을 읽어봅시다 [3:1-2]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게 복음이고 은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요나를 부르시고 이전과 같은 사명을 그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낸 후,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선지자 자리에서 해고 당했다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를 대신하기 위해 다른 선지자를 고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은혜로운 사실은,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삼진 아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항상 한계를 설정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몇 번의 기회를 줄 수 있지만, 그들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버림 받고 쫓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해봐.”라고 말씀 하십니다. 삼백 번, 삼천 번, 삼만 번 실패해도 주님으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시도해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는 예수에게 “선생님, 남을 용서하는 것이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베드로야, 일곱 번은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70번 7번을 용서해야 해.”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490번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숫자 7은 완전한 숫자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베드로에게 계속해서 모두 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그들을 얼마나 많이 용서했는지 세는 것을 그만두어라. 너는 계속 용서하며 살아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주님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크게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를 저지르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실패하더라도, 얼마나 크게 실패하더라도, 은혜로운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좋은 일을 해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예배에 충실히 참석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는 이유는 주께서 단지 은혜로 우리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우리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는 두 번째 기회를 백 번, 천 번도 주십니다. 우리가 잘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반항하며 계속 도망치던 선지자 요나에게도 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단지 다시 물고기 배에서 나와서 다시 사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처음과 똑같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3절을 읽어봅시다.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기회를 받은 후, 이제 드디어 요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갔습니다. 4절로 넘어가 봅시다. [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4절 마지막을 보면 ‘무너지리라’라는 표현 보이시나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죄악의 삶을 무너트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무너트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죽음으로 무너지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선포입니다. 3장 전체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단지 요나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 사람들과 같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니느웨 도시를 언급할 때 항상 특정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위대한 도시’라고 말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던 3절을 다시 보면 니느웨가 “큰 성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지 니느웨가 큰 도시라는 뜻 뿐만 아니라, 이 도시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큰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성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책에서 하나님은 세 번이나 이 도시를 언급할 때 ‘위대한 도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1:2, 3:2, 4:11).

니느웨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살아있는 채로 가죽을 벗겼고, 사람들의 머리를 찍어내고 가족들에게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 들게 했습니다! 그것은 끔찍하고 끔찍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죄가 많은 도시”, “불행한 도시”, “끔찍한 도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도시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큰 도시 중요한 도시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성읍이 그 잔혹함으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 도시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이 도시는 큰 죄로 가득했습니다: 매춘, 폭력, 부정부패, 횡령, 음란, 거짓, 패악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이 도시를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회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이제 이 악한 도시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봅시다. 그 전에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요나를 봅시다. 요나는 상당히 짧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비록 요나의 메시지는 짧았으나, 그 파급력은 가히 온 도시를 흔들 만큼 대단했습니다.

5절,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선지자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의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도시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자시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르짖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절을 보니, 가장 높은 사람들부터 가장 낮은 사람들까지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굵은 베는 편안한 일상복이 아닙니다. 소재가 매우 거칠고 불편해서 일상복으로 사용할 수 없는 옷입니다. 그럼 니느웨의 사람들은 왜 이런 불편한 옷을 입었을까요? 그것을 입는 것은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회개는 진실되었습니다. 5절은 요나의 메시지를 전해 들은 니느웨의 시민들의 반응을 답고 있습니다. 그들은 굵은 베를 입고, 금식하고,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 운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봅시다. 6절을 읽어봅시다. [3: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요나가 왕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회개 메시지는 빠르게 퍼져 왕궁 안에 살고 있는 왕에게까지 도달했습니다. 6절을 보면, 니느웨 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으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즉 먼지에 앉았다고 합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기억하십니까? “회개하거나 멸망하라?!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무너뜨리십시오!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심판과 죽음에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니느웨의 왕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무너트리기로 선택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바꾸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왕국, 자신의 삶의 왕좌에서 내려와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변화 입니다! 내 삶의 모든 주도권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넘기는 것이 진짜 회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죄인지 집어내고,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완벽하지 않은 지 알고 있어도, 그렇다고 우리가 복음에 의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완전히 변화되어 삶의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주님의 소중한 아들의 피로 우리들을 구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변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우리가 뒤에서 다른 사람들 험담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여전히 악담을 좋아하거나, 악령의 영역을 찬양하는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거나, 사람들을 학대하거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특히 여성과 아이들, 그런 일을 계속 사랑하고 있거나, 그럴 가치나 필요가 없는 인터넷 서핑에 열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데 큰 열정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마음이 복음에 의해 뒤바뀌었는가?”를 진단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복음에 의해 바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변하고,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죄를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를 싫어하는 것이 증가하고 있습니까? 죄인을 싫어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변화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영혼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증거야 말로 복음이 천천히 우리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삶을 바꾸기 시작한 니느웨 사람들처럼. 우리들의 삶에 죄악으로 인해 비참해 진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날 교회의 현 상황들과 문제들을 보면, 우리들은 변화를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우리 영혼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사모하는 것에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 체계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치로 변화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나는 십일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십일조가 10%인 것을 알고 있지만, 1%만 하면 안됩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고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이 은혜이며, 모든 것이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쉬운 선택입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만을 원하며, 저는 주님을 위해 금식하며, 주님 저는 이 죄를 미워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가치 체계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앞으로 죄와 싸울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면, 복음으로 영혼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그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고, 싸우며, 애원하며, 금식하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삶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감정이 변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변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만약 우리가 복음에 의해 변화되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일부가 될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내의 삶의 일부가 되어 일요일에 예배 나오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모든 면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돈을 쓸 것인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누구와 가까운 관계를 맺을 것인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예수께 기준을 둡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내 삶의 왕이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 니느웨 왕처럼 우리들의 삶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7-8절을 읽어봅시다. [3:7-8]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니느웨의 왕이 조서를 내려 어명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들으라! 힘써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라! 악한 방식과 폭력을 포기하라! 그리고 모두가 기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 겸손하라!”

구원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왕은 또한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악한 방식과 폭력을 포기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해왔던 일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증가하고, 우리의 죄에 대한 혐오감이 증가해야 합니다.

왕이 이처럼 행동하고 있는 이유와 동기가 무엇입니까? 9절을 봅시다. [3: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니느웨 왕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말했습니다, “누가 알겠는가?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참된 하나님,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포하고 있는 이 유일한 참된 하나님에 대해 들었다. 나는 그가 자비롭고, 분노가 느리며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그의 길을 들었다. 아마도.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이렇게 하면 그가 용서해주실 것을!” 니느웨 왕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의 자리에 내던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행동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0절을 읽어보자.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겸손해지고 그에게 돌아갈 때 자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겸손한 사람들이 그에게 호소하는 것을 보면, 그는 자비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들, 계속해서 하나님의 두 번째 기회를 받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반응은 무엇인가?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무엇인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예배다. 그것이 적절한 반응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가 살아 있는 더러움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시는 것에 대해. 말하라 “하나님,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예배합니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은 좋으시고,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롭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당신의 자비가 없었다면, 은혜가 없었다면, 하나님이여, 나는 멸망합니다. 이 생명에서나 영원에서나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적절한 반응으로 예배한다.

두 번째로,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그가 우리의 삶에 대해 가장 좋은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역보다 순종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보다 그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길이 최선입니다. 당신의 행위, 당신의 명령이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당신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의 지도를 따르고 순종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따라가며, 우리의 삶을 은혜로 뒤집게 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니느웨가 있으며, 그들은 은혜의 전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메신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실수해 왔어도 괜찮습니다. 아직 우리의 영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시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일어나렴, 함께 가자! 강하게 마무리하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사역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