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 방황의 끝: 벧엘 (창세기 28장 10-19절)

     이제 2일 뒤면 4th of July 연휴 입니다. 4th of July 연휴 기간에도 가게마다 sale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매년 뉴스를 보면 시카고에서도 서로 주먹질하고 피 흘리며 싸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주먹을 들고 상대편을 때린 것이지요. 심지어 수년 저에는 총기사고까지 났습니다. “내가 이 물건을 가지면 정말 행복할꺼야.”라는 상상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소비의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서 지배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물건이 정말 필요해서 사는게 아니라, 저걸 샀을 때 행복해질 내 마음 때문에 사는 거에요. 물건을 구입할 때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 됩니다. 그래서 구매하는 그 순간은 기쁩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계속 얻고자 끊임없이 무언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유의 기쁨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저것만 있으면 행복할탠데…” 하고 간절하게 목표 했던 것을 이루면 계속 만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밑빠진 독과 같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하나를 이루고 나면 우리는 또 다시 다음 소유물들을 어떻게 또 가질 수 있을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Threshold syndrome,” “문턱 신드롬 혹은 문턱 심리”라고 부릅니다. 내가 저 문턱만 넘어가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인 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그 어려운 문턱을 넘어가면 또 다른 문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대학만 들어가면 행복하겠지! 그런데 대학에 들어 가니까 또 거기에서 더 심한 경쟁이 펼쳐집니다. 졸업하고 좋은 직장만 구하면 되겠지! 했는데 직장 들어가면 또 경쟁입니다. 삶이 계속 그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장자권만 받으면 행복하겠지?” 그런데 막상 그가 바라던 그 장자권을 얻게 되자. 그가 예상치도 못하던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형 에서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분명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야곱의 양심도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어머니의 고향이자 외삼촌 집이 있는 하란 땅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하란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고단한 광야 길이었습니다.

앞으로 야곱의 인생에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 이삭에게 받은 엄청난 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복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넘쳐나고, 둘째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을 받은 야곱의 인생은 이후 20년 동안, 자신이 받은 복과는 전혀 반대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는 커녕 밤에는 추위와 낮에는 더위와 싸워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매일같이 새벽이슬 맞으며 출근해서 밤공기를 맞아가며 가축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을 다스리기는 커녕 악질 외삼촌 라반에게 열 번도 더 속으며 20년 동안이나 삼촌의 품꾼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그가 훗날 자신의 아들 요셉을 따라 애굽 땅에서 바로를 알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바로가 야곱에게 물어봅니다. “네 나이가 몇 살이냐?” 그 때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나그네 길 세월이 130년입니다. 내가 비록 내 조상들의 나그네길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지난 날을 회고해보니까 사는게 얼마나 힘들고 고생뿐이었는지 모릅니다. 세상말로 얼마나 팔자가 기구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그리 원하던 장자권을 받았음에도 그의 삶이 평탄대로가 아니었음 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장자권만 있으면 다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이뤄보고 나도 여전히 인생의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함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밑 빠진 독과 같아서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습니다. “내가 저것만 가질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내 인생에 저 일만 해결되면 정말 행복하겠다.” 하고 자주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승진 좀 했으면 좋겠다.” “내 연봉 끝에 0 하나면 더 붙으면 소원이 없겠다.” 길을 가다가도 “이야 내가 저 정도 되는 차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네. 이야 내가 저런 집에 살면 굶어도 행복하겠지?” 그런데요. 인생은요 막상 내가 원하고 목표하는 것을 얻거나 이루어도 그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면 또 그 다음 것들을 같고 싶어하는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소유로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생의 참 행복은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영혼의 참된 안식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내 소유와 상관없이 우리는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그가 드디어 형 에서의 눈을 피해 아버지 집을 떠납니다. 장자권만 받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한 야곱의 인생이 오히려 그 장자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도 모른 채 무려 450 mile 724 km 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생의 방황이란 게요 다른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앞으로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방황하는 삶이지요. 이 세상 사람들은 야곱과 같이 방황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도, 어디로 가야 육지에 도착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해 도중 거친 파도와 궂은 날씨를 만나도 나침반을 가지고 정확하게 방향을 잡고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바다 위에서 갖가지 위험이 찾아와도 계속해서 목표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침반이 없는 사람은 바다 위에서 표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다 위에서 나침반이 없는 경우 우리는 표류라고 합니다만, 인생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경우 우리는 방황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인생의 방황을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 야곱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나침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파도를 만난 선원처럼, 그의 인생은 광야 사막 길 위를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는 이 길에는 호텔도, 모텔도, 그 흔한 여인숙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차를 타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 흔한 가게도 없어서 중간에 식료품 사기도 힘들었을 거에요. 배고프면 중간에 식당이라도 들려서 뭐 좀 먹고 가야지 하고 가는 길이 압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광야 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야! 내가 이 장자권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올무가 되었구나!” 그제서야 야곱은 스스로 판 함정에 떨어진 사냥꾼처럼 형의 장자권을 뺏어간 죄값을 치르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 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야곱은 춥고 배고프고 앞날이 막막한 이 여행길에서 한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멈춘 이유는 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옛날은 지금과 달라서 길에 가로등도 없고, 건물들이 비추는 빛도 없잖아요? 기름도 귀했던 때라 야곱은 컴컴해지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거부였습니다. 야곱 역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내 아버지 집에 가면 진수성찬으로 가득 차려진 음식도 가득하고, 마실 음료도 넘치고, 편안한 잠자리도 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구나” 그러나 그가 다시 갈 수 없지요 왜요 그의 형 에서가 살기가 가득해서 그를 죽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면 야곱은 여정을 떠난 첫 날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40miles 60 km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한 곳에 머물게 된다. 어떤 성경은 머물기 좋은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 나무가 있던지, 지형이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루 동안 40mile을 걸어왔으니 얼마나 고되겠는가. 우리 교회에서 다운타운 밀레니엄공원까지 35mile 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다운타운까지 두 다리로 걸어갔거나 낙타를 타고 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처럼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휴게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야곱이 얼마나 고되었을까요?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서는 퉁퉁 부은 두 다리보다도 매서운 밤공기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일 또 해가 뜬다는 사실입니다. 내일이면 오늘처럼 또 다시 고된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희망 없이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1. 돌베개.

야곱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잠 잘 때 그는 돌을 배개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돌이란 단어와 베개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과학이 발달해 돌침대는 만들어 온돌 침대로 쓰지요? 돌베개도 있긴합니다만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의료용으로 사용합니다.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베개만큼 편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정말 푹신한 베개가 없으니까 야곱은 돌을 베개 삼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배도 주리고, 몸도 춥고,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야곱은 돌을 배고 잠을 잡니다. 만약 우리가 돌을 배고 자고 있는 내 아들 혹은 딸의 모습을 보았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 추운 광야에서 바람 막아줄 벽하나 없이, 뻥 뚫린 캄캄한 하늘 아래서 돌을 배고 자는 야곱. 그것은 참으로 눈물 나는 광경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는 처량하고 불쌍한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 깊이 잠이 든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만약 오늘 야곱이 자고 있는 광경을 누군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는 여전히 돌베개를 자고 잠이 든 처량한 신세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는 이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감기어 있지만, 그의 영의 눈은 떠 있는 것이지요. 그 날 밤 야곱의 꿈은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꿔보고 싶을 만한 그런 위대한 꿈이었어요. 그가 꿈에서 본 것은 세가지 입니다. 첫째 그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두 번째, 그는 그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그 사다리 위에 계신 즉, 하늘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즘 이런 꿈꿔보고 싶지 않으세요? 세상 사람들이 꾸고 싶은 꿈은 돼지들이 떼로 나와서 “자 너 내일 이러나면 젤 먼저 가까운 편의점 가서 복권 사렴. 자 그리고 이게 로또 번호야 받아 적어.”하고 알려주는 꿈이지요? 그러나 만약 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큼 위대하고 놀라운 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 축복의 하나님은 오늘 야곱의 꿈에서도 나타나 그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13-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광야 길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중요한 교훈을 하나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야곱아, 네 아비 이삭이 주는 장자권이 중요한 게 아냐 야곱.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 내가 너에게 복이야 말로 참 복중의 복이란다!”

 

Ⅲ. 본론-2 (함께하심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서서히 드러나는 복의 실체..

야곱의 여정은 우리의 삶과 참 많은 부분 비슷합니다. 분명 우리도 야곱처럼 야곱처럼 하나님께 놀라운 복을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보면 야곱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과 달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은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내 모든 소원이 이뤄지고 일이 잘 풀리는 것만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다 염두해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를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여전히 선한 계획을 가지고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누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애굽의 총리되는 길임을 알았을까요? 그 누가 모세가 갈대상자에 눕혀 강가에 떠내려가는 것이 애굽의 왕자가 되는 길임을 알았을까요? 주님의 지혜는 뛰어나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거 맞아? 난 잊혀진 거 아닌가? 난 이렇게 끝나는건가…?” 하며 좌절하는 내 험악해 보이는 세월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기를 통해서 기회로 사용하십니다. 신앙인의 위기는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복을 주시고자 우리 삶에 위기마저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승승장구하고 잘 나갈 때야 누군가 우리에게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이 있을꺼야.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올꺼야.”하고 말하면 믿기 쉽지만, 사람이 힘들고 어렵거나 사업이 망하고 나이 들고 다 끝났다 생각했을 때 누군가 와서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꺼야”하고 말해주면 그것이 위로로 받아들여졌으면 했지, 결코 희망찬 내일을 약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이게 우리 하나님께서 자주 쓰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꼭 우리가 믿기 힘들고 어려울 때 오셔서 약속을 주세요. 아브라함도 한창 젊을 때 찾아오셔서 약속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늙어 나이가 99세 되었을 때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 모세도 애굽에서 왕자로 잘 나갈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게 아니라, 나이 80살이 되어서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은 내가 널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양치기요. 집에서 무시 받는 막내아들에 불과했을 때 그에게 이스라엘의 왕권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타이밍을 보면 기가 막히게 당사자가 믿기 힘들 때에 좋은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들이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 그러면 비밀번호를 요구하죠? 내 돈이 아무리 많이 은행에 입금되어 있어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10센트도 10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복을 약속하셔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약속을 받을 수가 없어요. 믿음이야말로 복을 받는 축복은행의 비밀번호입니다. 야곱도 꿈에서 깨어나자 마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함께 16-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 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이 당시 기름은 화폐처럼 쓰였습니다. 기름은 그의 부모가 준 여행경비이고. 어쩌면 타지에서 그나마 자리잡으라고 준 종자돈, 시드머니 같은 거에요. 지금 그 중요한 기름을 다윗이 뭐하고 있어요? 자신이 배고 자던 돌베개를 기둥삼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붙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아예 자신이 잠자던 곳의 지명까지 바꿔버립니다. “벧엘”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지명은 예루살렘입니다. 그 다음이 어디일까요?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집 바로 벧엘 입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내가 지난 밤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 줄 알고 홀로 방황하는 인생인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하고 계시구나!”하고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Ⅴ. 결론: 똑같은 상황 다른 시각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내가 있는 곳이 벧엘이구나? 그렇다면 소망이 있다! 답이 내 삶에 주어지지 않아도 답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야곱은 가장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밝게 비추고 있는 빛을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내용으로 현상 공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상금도 제법 짭짤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수학자와 교통학자들까지 응모했다. 비행기 · 기차 · 자동차 ·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방법, 지도상에 지름길을 측정해서 이들 교통수단을 적절하게 혼합하는 방법 등 다양했다. 현상 공모에서 정작 1등으로 뽑힌 사람은 평범한 보통사람이었고, 정답 또한 뜻밖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결정에 수긍했고 요즘도 회자되고 있지요? 답이 뭐였어요? 정답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아내 · 친구 등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좋은 길 같아 보이고, 제법 속도가 나는 차를 구입하는 것이 답처럼 보여도, 사실 가장 빠른 길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 길을 보여주신 거에요. 비록 걸어가야 하는 광야 길은 동일해도, 여전히 내 갈 길은 멀고 험해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그 길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진실로 인생은 “얼마나”라는 질문보다 “누구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이 벌었나, 얼마나 크고 많이 모였나, 이런 것들보다도 과연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든 방황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에서 어디로 나아가는지 모르는 인생일지라도, 지금 내 몸과 마음이 지쳐 있고 광야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을 지라도, 내일을 맞이하기가 두려운 인생일지라도, 비록 방황하는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모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벧엘로 올라갑시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그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한 야곱과 같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환난 가운데 응답하시고 우리의 인생 길에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