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4 광야에서도 함께하신다 (신명기 8:2-6)

          한국에서 백주년기념교회를 시무 하셨던 이재철 목사님께서 쓰신 책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은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과외를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이재철 목사님께서 시무하고 계시던 교회에 서울 잠실에 사는 신실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집에 아이가 고3인데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주일에는 교회 와서 모범적인 자세로 예배도 드리고, 예배 후에는 교회에 남아 열심히 봉사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 집 여자 집사님에게 찾아와서 이야기 하는 거에요. “애기 엄마,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가 서울대 의대 가는게 꿈인데 고3 때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 사람들이 다 안 하는 것 같아도, 다 과외 하고 있어. 집사님 아이도 과외 시켜.” 이 엄마와 아이는 굉장히 고지식 했어요. 아이도 “저는 주일을 지키고 봉사도 하겠습니다.” 했고, 아이 엄마도 “이 아이는 과외를 시키지 않고 해보렵니다.”하고 말했어요.

시험을 봤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떨어졌어요. 교회에서 집사님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해요. “거 보라고… 할거는 해야지…” 이 아이가 재수를 했어요. 재수하면서도 주일에는 교회 나와서 열심히 예배 드리고 예배 후에는 또 열심히 교회 일하며 봉사 했어요. 교인들이 아이에게 말했어요. “지금은 너가 공부를 해야할 때야. 하나님 어디 안 가셔. 시험 끝나고 서울대 붙고 나서 예배 드려도 되니까 그 때까지만 공부에 집중 하렴” 집사님들이 아이 엄마 붙들고 이야기 해요. “애기 엄마, 제 좀 말려봐. 이 아이가 대학에 붙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어?” 그러나 엄마나 아이나 고집을 버리지 않았어요. 이 아이는 재수 때에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했어요. 시험을 봤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떨어졌어요. “거 보라고. 할거는 해아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아이가 삼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삼수 때에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게 되었어요.

이 학생이 삼수 때에 서울대 의대 붙은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아들이 인생에서 2년이나 낭비 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봤을 때 그것은 낭비가 아니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고3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시간에서 예배를 뒷전으로 하고 자기 살길을 찾아 갔지만, 이 아들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예배 드리고 봉사를 했어요.

나중에 그 아이들과 이 자녀가 세상에 나가서 중요한 일, 급한 일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아이가 2년을 허비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웠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웠어요.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늦은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어요.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인생에서 무언가 빨리 이루기를 원합니다. 내 기도 제목 갖고 있는 것도 빨리 일어갔으면 좋겠고, 시작한 일도 빨리 이루어 졌으면 좋겠고, 궤도에 올랐으면 좋겠고… 한국 사람들은 기질이 빠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획 했던 것 보다 더 멀리 돌아가게 하실 때가 있어요. 때로는 우리 삶에 재수, 삼수와 같은 좌절을 겪게 하시고 우리 삶에 실패라는 좌절감을 경험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아마 오늘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왜 지금 이러한 상황에 두셨나… 빨리 좀 도와 주시지”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게 아닌데…”하고 자기 삶을 보며 탄식하고 계신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어요. 사실 지나 온 삶을 한 번 돌아 보시겠어요?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되는 일들이 더 많을까요?

이런 건 예를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여러분 중에 태어날 때 나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야겠다.”하고 태어나신 분 계세요? 아니에요 없을 거에요. (정주영 회장 아들, 이병철 회장 아들…) 그럼 반대로 자식을 낳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기고, 이런 성격의 아이를 낳겠다 해서 장시간 고객 상담을 통해 주문해서 자녀를 낳으신 분 계세요? (좀 얼굴도 송중기처럼 잘생긴 아들, 효너 심청이처럼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내놓을 심성이 고운 딸) 여기 계신 분 중에, 10 여년 혹은 20 여년 전에 “내가 2023년 6월 4일에 그레이스레이크에 위치한 코너스톤 장로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야지!”하고 계획하셨던 분, 혹은 이렇게 될 거라는 알고 계셨던 분 계세요? 아마 없으실 거에요. 우리 삶을 돌아보면, 사실 대부분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우리들의 삶을 보며 조바심을 갖게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 왜 내가 원하는대로 안 해주시지? 하나님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인 들어주시지?” 심지어 우리 인생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100%다 그렇게 흘러 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조바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자기 상황에 대하여 불만을 표출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왠지 섭섭한 마음도 갖게 됩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생각한대로, 내 뜻대로 해주시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 같고,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은 이 문제에 한 번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의 뜻대로 우리 삶이 펼쳐질 때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뜻대로 우리 삶이 펼쳐지지 않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일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내 삶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아도, 지금 내 배우자가 내가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주지 않더라도, 내 자녀들이 내가 간절하게 꿈꾸는 그 계획대로 살아주지 않더라도, 내 비즈니스가 내가 목표하고 열심히 일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세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시겠어요? “나의 감정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하고 계신다.”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세요.

그럼 이런 질문이 또 듭니다. “목사님, 만일 기도해도 내가 원하는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럼 무엇 하러 기도하죠?” 혹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도가 무엇인지 반은 알고 반은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기도는 단순히 내 필요를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뭡니까?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기도 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선교사님들이 젊은 날 기도하다가 열방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선교지로 가는 것이죠. 우리가 원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의 아집과 나의 고집이 깨지고, 하나님 앞에 나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참된 기도 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오늘 아침 여러분과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정말 선하고 좋으신 분이시라면, 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삶을 인도해주시지 않을까요? 왜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이렇게 힘들고, 왜 우리는 밤낮 쉬지도 못하고 일하며, 매일 피곤에 찌들어 살아야 하고, 왜 우리들은 많은 시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가족 문제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가게 문제 때문에 잠 못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몇 일이면 갈 거리를 40년 동안 걸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억울한 삶 산 거에요. 뺑뺑이도 이런 뺑뺑이가 없어요.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지도자 모세를 향한 원망이 끊이지 않았어요. “하나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보내 주셔야죠. 하나님 마실 물은 주셔야죠. 하나님 먹을 고기는 주셔야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불만과 불평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질문이 떠올라요. “아니 이 사람들 자기 눈으로 홍해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 아닌가? 직접 그 홍해를 건넌 사람들 아닌가? 자기들 눈 앞에서 바로와 애굽 군사들이 전멸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거 보지 않았던가? 반석에서 물이 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이렇게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기적들을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불평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나 성지순례 가본 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좀 이해하시더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간 광야는 적도 부근에 있어요. 6월에 가면 온도가 120도 입니다. 섭씨로 해도 50도에 육박합니다. 싸우나 안에서 먹고 자고 사는 거에요. 가만히 있어도 등에서부터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시카고에서 성경을 읽으며, 이 사람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40년간 걸어간 그 길은 불평할만한 길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힘든 여정으로 몰아 넣으셨습니까? 오늘 분문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  너를 시험하사 /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두셨어요? 무엇 때문에 그들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 길을 걷게 하셨어요? 그들을 낮추시려고.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굳어도 너무 굳은 사람들이에요. 조금만 숨통이 트여도 자기 잘난 맛에 하나님 버리고 살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셨어요. 그리고 또 무슨 목적으로요? 너를 시험하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에 두셨어요. 그 시험이 무슨 시험입니까? “네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아는” 시험이에요…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만 더 빨리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면 ‘고통의 의미’를 파악했다면 조금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정말 아무 목적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까요? 오늘 예배 드리는 분들 가운데도 남에게 말 못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계실 거에요. 아니면 지금은 그래도 감사하게도 마음이 평화롭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내오신 분들도 계실 거에요.)

오늘 정말 힘들어 하는 분들께 꼭 이 말씀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한 번 더 따라해 주시겠어요? “이것 또한 지나갑니다.” 어머니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이 키우는게 얼마나 어려웠어요. 똥기저귀 갈아주고, 새벽마다 우는거 다시 재우는 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아이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또 아이가 어때요? 크더라고요. 아버지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군대 가서 이등병 시절 얼마나 많이 힘들었어요. 난생 처음 보는 선임들이 욕하고 괴롭히죠. 잘못한 것 없는데 얻어맞죠. 그 때는 죽을만큼 힘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또 어때요? 전역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힘들어 하는 일들도 지나가게 될 거에요.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이 오듯이,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면 또 가을이 오듯이 지나가더라고요. 그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섭리인 것 같아요. 지나가요. 옆 사람 보고 이야기 한 번 해주세요. “집사님 이것 또한 지나갑니다.” “집사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우리가 견디고 있는 그 시간이, 지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이 고난의 터널이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통치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 삶에 그러한 시간을 허락하신다고요? 우리 마음에 자꾸만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래요. 조금만 잘나가도 하나님 떠나 내 맘대로 살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길 원하세요. 정말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그 믿음이,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진짜 금 같은 믿음인지, 아니면 겉은 금이지만 깨물어보면 금박만 씌어 놓은 가짜 믿음인지 테스트 하세요.

금이 진짜인지 순금인지, 아니면 불순물이 낀 가짜 금인지 확인하려면, 뜨거운 불에 녹여봐야 아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결정적으로 증명되는 시간은, 언제에요? 보통 때에요? 내가 잘 나갈 때에요? 일상도 아니에요.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위기의 상황에 드러나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진짜 믿음 좋은 집사님, 진짜 믿음 좋은 장로님 권사님 언제 알아요? 교회가 평안할 때는 다 믿음 좋아 보여요. 그러나 교회에 큰 사건이 터져서 교회가 흔들릴 때, 아니면 그 집사님, 그 장로님, 그 권사님 가정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저 분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처신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요. 똑같은 암 판정 받고도 환하게 아주 방긋 웃으며 찬양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는 분이 있어요.

저 몽골에 가면 들판에 말이 많이 있죠? 그 많은 말 중에 어떻게 명마를 구별할까요? 말에게요. 갈증이 날 때가지 물을 안 먹여요. 그러다가 말들을 풀어 놓으면 말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물이 있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갑니다. 그 때 주인이 뒤에서 ‘휘익’하고 돌아오라는 신호의 휘파람을 불어요. 그 때 돌아오는 말이 ‘명마’인 거에요. 가장 힘들 때도, 주인이 부르면 돌아올 수 있는 말이 ‘명마’인 거에요. 우리의 믿음은 언제 증명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언제 증명 됩니까? 우리의 인생이 가장 힘든 때를 지나가고 있을 때, 인내하며 끝까지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3절에서는 어떻게 이야기 하십니까?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리게 하셨어요. 광야 가운데서 철저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셨는데, 그 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데요. 죽을 것 같은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끊이지 않는 은혜를 주신다는 거에요. 우리의 욕망을 채울 목적의 만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인도해 가고 계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만나’를 주세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 주신 말씀이 있어요. “그 날 먹을 것만 가져와.” 더 가죠 오면 어떻게 됩니까? 썩어요. 하나님 뭘 훈련시키세요? “매일매일 너가 나를 의지해라 . 네가 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꺠달아라! 그게 믿음이야” 우리들이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련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세요. 우리들이 어려운 시간을 지날 떄, “이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저희 부모님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고 느낀게 하나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여보 나 그것 좀 갖다줘..”하고 간단하게 말씀하셔도 신기하게 어머니께서 “그것”을 갖다주세요. 두 분이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쌓인 관계 때문에 서로 알아 들으시는 거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아, 하나님께서 그래서 나를 이 길로 인도하셨구나?! 아, 하나님께서 그래서 나를 이런 상황에 넣어 두셨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인내하면서 소망하는 삶보다 멋진 모습이 없는 거 같아요. 우리가 믿음으로 자라간다는 것에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일이 어렵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서두르지 마세요. 하나님을 기다리세요.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인이 손짓 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하는 것을 보고 빌립보를 가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이 아시아를 뛰어넘어 유럽으로 간거죠. 바울은 빌립보에서 믿음의 동역자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소녀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평범한 생각을 가지면 이런 거죠. “하나님께서 저를 여기로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를 옥에 가두시면 어떻해요? 저를 여기에 이렇게 가두어 놓으시면 어떻합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바울에서 뭐했어요? 기도하고 찬송했어요. 그에게 믿음이 있었던 거죠. 나를 여기로 부르신 하나님, 나를 이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조바심이 나지 않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여기서도 이루실 뜻이 있음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기도하며 찬송한거에요. 그래서 그 감옥에서도 간수를 전도하고 그 가족을 구원하는 역사가 생긴거에요. 하나님을 믿으면 감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인내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도 큰 과정 가운데 하나 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는 분 아니세요. 주님은 오히려 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 되심을 깨닫기를 원하고 계세요. 오늘 이 주일 아침,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 많이 계실 거라고 믿어요. 그러나 포기하지 마세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세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가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