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11. 예수님의 세 가지 음성 (마태복음 9장 1-8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시자,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집에 찾아 왔습니다. 가버나움 뿐만 아니라 주변 갈릴리 각 촌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많은 인파로 인해 집 안은 물론이고 문 밖에서도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참 말씀을 전하고 계신 이 집에 다섯 명의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네 사람은 건강한 사람들이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에 걸려 있습니다. 네 친구들은 자신들의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파로 인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자, 네 명의 친구들은 주께서 계신 집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를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으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친구가 누워 있는 침상을 줄에 달아 바로 예수님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진 않으나, 어떤 이들은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나오려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화를 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명의 친구들은 어떤 욕을 먹어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남의 집 지붕까지 뜯어가며 예수님 앞에 병들어 누운 친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만, 그가 누워 있는 침상을 줄에 달라 땅에 내리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네 친구들은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는 친구들의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그의 침상은 예수님 앞에 놓여 있고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친구들에게서 예수님으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이제 다 예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어쩌면 들고 온 침상 그대로 들고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 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이 데리고 온 나머지 한 사람, 지금 침상에 누워 있는 이 사람은 중풍병 환자입니다. 중풍병은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로 뇌동맥이 파손되어 출혈이 일어나서 발병합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중풍이란 말보다는 스트로크 혹은 뇌졸증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일단 머리에서 출혈이 일어나면 전신이나 반신 또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이 중풍병자도 침상에 누워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몸의 상당한 부분이 마비가 되어버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중풍병은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평생을 식물인간처럼 온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중풍병 환자의 고통이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이 환자도 알고 있고, 그의 친구들도 알고 있고, 지금 예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많은 사람들도 다 이 병이 결코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은 온전히 더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포함한 다수의 종교인들도 과연 예수님께서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 하실까 호기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예수님을 바라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1. 작은 자야 안심하라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2)

예수님은 침상에 누워 있는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예수님은 이 두 마디로 먼저 그의 마음을 위로 해주셨습니다. 이 말은 “얘야, 기운을 내라.” “얘야 이제 마음 편하게 먹으렴.”라는 의로의 말씀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침상 위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였다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요 사람들 많은 곳에 가는 게 별로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뻔히 바라보고 있는 상황은 부끄럽고 심지어 수치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안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이 상황에서 지금 온 집 안팍을 다 둘러싸고 있는 이 수 많은 인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그의 마음이 불안하고 떨렸겠습니까? 게다가 가뜩이나 유대인들은 병든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무슨 큰 죄를 지었구나… 하나님께 벌을 받거나 저주를 받았구나…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러니 사람 많은 곳에 덩그러니 침상에 누워 있는 이 중풍병자의 마음은 몹시도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 먼저 “작은 자야 안심하라…” “얘야 안심하렴.” 하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가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작은자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어가 성경 다른 본문에서 쓰인 용례를 찾아보면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때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와 다른 친척 식구들과 예루살렘 성전에 가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가는 날, 예수님은 성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샅샅이 돌아다니게 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시 열 두 살이었던 아들을 향해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에게 다그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여기서 쓰인 아이야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자야”라는 단어 입니다.

즉 삼십대 초반이신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환자를 작은 자야… 라고 부르셨으니 이 사람의 나이는 많아 봤자 20대 입니다. 어쩌면 10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삼십 대 젊은 예수님께서 “얘야”, “작은 자야…”하고 부르실만큼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살아갈 10대 혹은 20대 나이에 스트로크가 왔으니… 뇌졸중이 왔으니… 그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상에 누워서 밤낮 살아가니 얼마나 비참 합니까? 차라리 담배를 피워서 간암에 걸리거나, 술을 너무 마셔서 위암이라도 걸리면 좀 더 억울 할 것입니다. 중풍병은 내가 뭘 잘 못해서 걸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찾아온 것이니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울까요? 밤마다 “왜 하나님 저입니까?” “왜 하나님 나한태 이런 일이 있어야 했습니까?”하고 억울함에 울음으로 그의 베갯잇을 적셨을 것입니다. 밤낮으로 침상에 누워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살아도 사는게 아니고,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에도 이 중풍병자와 같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침상이 있습니다. 가난의 침상, 질병의 침상, 외로움의 침상, 염려의 침상, 고통의 침상, 눈물의 침상 입니다. 교회는 다니고 예배 드리러 와도 어딘가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늘 쓸쓸하고,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거 같고, 세상에 내 마음 알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것 같고, 왜 나만 이렇게 인생이 힘든 것일까… 하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처럼… “왜 하나님 저 입니까…”하게 만드는 어떤 상황과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 속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얘야… 괜찮아 기운내렴, 마음 편안하게 가지고 안심하렴… 힘을 내자. 용기를 가지렴.” 예수님이 염려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이처럼 위로하여 주십니다.

정말 우리 인생이 힘들 때, 한 사람이라도 내 곁에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내 상황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나를 위로해준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이 사람을 데리고 온 친구들은 무슨 병인지 무슨 사연인지 예수님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작은 자야… 안심하렴…”하고 말씀하시니… 주님의 이 두 마디 음성만 들어도 두 눈에 눈물이 핑 돕니다. “아.. 주님이 다 아시는구나.. 주님이 알고 계셔…” 마음에 가득 쌓여 있는 염려가 눈 녹는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 참 가슴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남들에게 말 못할 사연을 가지고 오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얘야… 내가 다 안다.. 내가 다 알고 있어… 안심하렴…”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심 (영혼 구원/2)

둘째로,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왜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전에 그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는 당장 눈 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만 바라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까지 주의 깊게 보고 계십니다. 보이는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의해 다스려집니다. 따라서 아무리 표면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내면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문제 해결인 셈입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는 것은 문제의 진정한 원인과 뿌리는 다루지 않고 문제의 증상만 해결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세차 할 때 겉에만 청소하고 차 안은 청소하지 않는 것은 차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겉은 번지르르 해도 그 차는 여전히 더러운 차입니다. 때로는 차 매트도 꺼내서 햇빛에 말리고, 차 시트도 닦고, 차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이나 쓰레기들을 다 치워야 진짜 청소가 끝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지금 당장 해결되길 원하는 그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아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몸 속에서 장기가 썩고 있는데 겉에 피부에 연고만 발라주는 의사가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영혼의 문제, 내면의 문제를 다루시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중풍병자를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제가 중고등부 학생들 수련회 장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중고등부 학생들이 죄의 문제 때문에 너무 많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젊은 아이들이 죄를 짓는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죄를 짓겠나 싶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요즘에는 애들이나 어른이나 짓는 죄가 다 거기서 거기에요. 수련회와 같이 영적인 공간에서 있다 보니까 내면에 감추려고 했던 죄의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릅니다. 그 죄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거죠. 이게 해결이 안되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이게 용서를 못 받을 거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죄 때문에 나를 버리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못 사용 받는 것은 아닐까..? 또 수련회 가 보면 주변에 기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옆에 보니까 저 학생은 진짜 열심히 하나님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나 같이 죄 지은 사람이 버림받고 저 런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찾는 사람은 구원해 주실 것 같은 어떤 영적 정죄 의식이 학생들을 사로잡습니다. 내가 그 죄를 안 지었으면 모르는데… 이제 나는 정말 버림받았구나… 비록 부모 따라 평생 교회 다녔지만, 난 구제불능이구나… 복음이 아무리 죄인을 구원한다고 해도… 나만큼은 예외구나…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죄의 노예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에 예외라는 것이 있습니까?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크기의 죄가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의 크기가 따로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내 스스로가 범죄해 놓고도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도저히 남들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죄까지도 하나하나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여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 하러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내 죄는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크다. 혹은 내 죄는 용서받을 만큼 작다 감히 누가 자신의 죄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오직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죄 사함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사슬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내가 과거에 지은 그 어떠한 죄도 나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거하고 있는 심각한 죄도 내가 미래에 지을 그 어떠한 끔찍한 죄라고 할지라도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는 없는 것입니다. 죄의 힘은 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더 크십니다. 죄의 사슬은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 강하여 그 사슬마저 끊어냅니다. 아무리 괴수와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표면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문제들의 뿌리요 원인인 내면적인 문제 우리 영혼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전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의심하였던 죄들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 받는 복된  되시길 바랍니다.

 

  1.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심 (치료/6)

첫째로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염려하지 않도록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의 표면적인 문제, 즉 그의 질병을 치료 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침상에 누워 있는… 아니 그 침상에 갇혀있는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주님… 그 동일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말씀으로 고치십니다. 병을 고치는 치료의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십니다.

어린 시절 유년주일학교 때 즐겨부르던 찬양의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네 //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거친 바다가 잠잠해졌네 //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자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할렐루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중풍병자의 질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었던 온 몸의 마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들을 고통의 침상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질병의 침상, 눈물의 침상, 염려의 침상, 우울함의 침상, 외로움의 침상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세 가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 뿐 입니다. 세 가지 음성… 그런데 주님의 이 세 가지 음성이 중풍병자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말씀하시자, 염려로 가득 찬 그의 마음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그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시자 그의 질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밀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그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한 없는 능력과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