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7. [빌립보서 강해] 시리즈 (6)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장 5-11절)

 

정채봉이란 이름의 시인이자 작가가 쓴 글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란 시가 있습니다. 시를 읽어보면 이 세상에는 총 5가지의 만남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는 생선과도 같은 만남입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입니다. 처음에는 싱싱하지만, 금방 상하고 비린내가 나는 생선처럼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만 남는 만남입니다. 두 번째는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만남입니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만남은 건전지 같은 만남입니다. 가장 비천한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억에서 지워지는 만남입니다. 다섯 번째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생선과도 같은 만남, 꽃송이 같은 만남, 건전지 같은 만남 또는 지우개 같은 만남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다가 내가 가진 힘과 재산이 사라질 때는 나를 버리는 관계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또한 의미 없이 피상적인 거리만 유지하는 관계를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손수건 같은 만남처럼 내가 힘들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슬플 때는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진실되고, 변함 없는 영원한 관계를 꿈꿉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바로 그와 같은 관계성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갈수록 세상은 개인주의가 심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잘 관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문제에 관심 갖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 눈을 감아 버리고, 타인의 어려움에 귀를 닫아 버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아픔이 있고, 눈물이 머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삶이 힘들어 어려워 하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처음에는 이와 같이 참 아름다움이 머문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도시에 새로 새워진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물질을 자원하여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시간을 내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속속 등장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여 도울 만큼 교회는 성숙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한 가지 발생했습니다. 교회 안에 두 여성 리더십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두 여자 권사님 사이에 싸우는 일이 생긴 거죠. ‘유오디아’라는 이름의 여성과 ‘순두게’라는 이름의 여성 사이의 다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한 마음을 품지 못했고,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의 벽을 세워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이 서로 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 공동체도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서로 니 편 내 편하며 나뉘게 됩니다. 열심으로 섬기며 기쁨으로 성장하던 빌립보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란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오늘날 미국 내에 수많은 교회들이 분쟁 중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다가 법적 분쟁까지 나아간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교회에 오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서로 한 마음으로 섬기며 헌신하는 교회여야 하는데,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헐뜯고 욕하고 고성이 오가고 주먹 다툼하는 모습 보고 상처를 입고, 교회에 실망하며,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2세 자녀들 가운데서도 이런 상처 입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며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위와 같은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교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드는 성품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성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겸손의 모델로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 말씀에 “하나님의 본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과 별들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그 가운데 충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의 작품이요, 피조물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온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되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6절을 봅시다. 여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체’라는 말은 헬라어로 ‘내적본질’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본질을 내적으로 소유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이며 아무리 유익한 가르침을 전해주어도 결국에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 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내적으로 소유하고 계십니다.

6절 말씀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가지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존재이시지만, 그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해서 ‘정통 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을 나누는 교리의 기준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입니다. 그러나 이단이라는 말이 비슷하지만 끝이 다르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도 우리가 믿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유사한 부분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오늘 우리가 말하는 개념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우리 보다는 높은 존재이지만, 하나님보다는 낮은 분으로 애매하게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격이 낮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6절 말씀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이 말을 해석할 때,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질적으로 떨어지고, 신적 존재가 아니다라고 해석해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이다.”하고 주장하는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7절에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이 구절을 잘못해석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시기로 포기하셨다는 말은 결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7절을 봅시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하여 여인의 몸에 잉태 되셨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같이 성장기를 거치셨고, 우리처럼 땀을 흘리며 일하셨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종”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톰 소여의 모험]이란 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또 다른 책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왕자 에드워드가 거지 소년 톰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얼굴이 매우 비슷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왕자는 자신의 깨끗하고 화려한 왕자의 옷을 벗어서 거지 소년 톰에게 주었고, 톰은 자신의 더럽고 꾀죄죄하고 냄새하고 남루한 옷을 벗어 왕자 에드워드에게 주었습니다. 이후 거지 소년 톰의 옷을 입은 에드워드 왕자는 졸지에 거지 신세가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몸소 겪게 됩니다. 거지 소년 톰은 왕자 에드워드가 벗어준 옷을 입고 왕궁에 들어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산해진미를 먹고, 왕궁에서 상상할 수 없던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후에 두 사람이 다시 옷을 갈아 입음으로 에드워드 왕자가 이후 낮은 자들을 더 잘 이해하고 선정을 베푸는 좋은 왕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왕자가 거지의 옷을 입은 것도 충격적인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스토리는 훨씬 더 충격적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사 사람이 되셨습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통치, 다스림, 하나님 되심의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버리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많은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주님께 봉사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 봉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내 뿌리를 흔드는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해 봤습니까? 헌신과 희생 없는 사랑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 바로 주님의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셨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주님께서 도리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7절에서 ‘비었다’라는 말은 컵의 물을 다 쏟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 소유,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고, 버리지 않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것 하나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포기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을 다 주장하면서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부싸움의 본질은 포기하지 않은 채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문제의 갈등도 거기에 있습니다. 내 것, 내 소유, 명예를 다 지키면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포기가 없으면 사랑은 실체가 없습니다. 언어는 있는데 실체가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언어는 있는데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직업을 옮겨보고, 자기 몸을 찢는 아픔을 경험하고, 억울한 누명을 써 보신 적이 혹시 있으십니까? 희생이 없으면 사랑의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주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8절을 봅시다.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절을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원어의 맞게 해석하면 “겸손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바로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낮아지심은 구유에 태어나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낮추시고 하늘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우리들이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간 결과가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값인 죽음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이는 잔인한 처형 방법입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노예들, 강도들, 암살자들, 국가 반역자들 등 극도로 악한 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얼마나 잔인했는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당하지 않는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수반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한 것이 없었고, 아무런 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품고 이웃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대가이십니다. 우리 끼리 서로 비교해 가면서 “그래도 나는 저 집사님보다는 겸손하지”, “나는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꽤 겸손한 편이야.”하고 자신을 평가하는 분은 이미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며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 합니다. 혹시 수영 좀 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박태환 선수와 붙어 보십시오.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바둑 좀 두 두시는 분 계십니까? 이세돌 9단하고 바둑을 둬 보면 겸손을 배우게 될 겁니다. 유도 좀 하시는 분 계십니까? 추성훈 선수하고 붙어보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대가 앞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겸손의 대가이십니다. 주님 앞에 서면, 우리가 가진 겸손이 사실 참된 겸손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겸손의 대가이신 예수님의 삶을 볼 때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얼핏 보면 굉장히 멋진 구절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 보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말입니다. 포기해야 하고 낮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삶의 태도인 겸손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생각의 차원으로서의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태도와 같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 포기 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자식 앞에서 부모는 자존심과 체면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 포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존심, 권위, 위치, 신성의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다른 이름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신분, 위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겸손한 척 해도 포기가 없으면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하고,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겪고, 분한 일, 원통한 일을 겪지 않았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고난입니다. 사랑은 자기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고, 종이 되고, 낮아져서 말구유에까지 오셨던 사고방식, 가치체계, 태도,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