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31. 새로운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3장 21-31절)

본문 23절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그분의 완전하심, 그분의 거룩하심에 미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제출한 이력서로는 도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높은 기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20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도덕적인 노력이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매일 아침 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거울을 한 번 즘은 보셨지요? 간밤에 자고 일어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머리는 이리저리 헝크러져 있고 얼굴도 꾀죄죄 합니다. 거울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오직 거울을 본 사람만이 자신의 참 모습을 압니다. “지금 내 머리가 부시시 하구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교회 가면 큰 일 나겠구나?” 이처럼 거울은 본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율법을 통해 우리는 죄로 인해 망가져 버린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거울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거울과 같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병원에서 주는 일종의 진단서와 같습니다. 진단서는 환자의 병이 이러이러하다고 정의를 내릴 뿐 환자의 질병 자체를 고쳐주지 못합니다. 진단서는 다만 환자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럼 율법이 죄인에게 내린 진단서에는 뭐라고 써 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성경은 죄를 지은 인간 앞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죽음 입니다. 죄의 결과가 바로 지옥 입니다. 따라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인류에게 또 중요한 숙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죄인 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 입니다. 다 함께 본문 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한글 성경을 보면 21절은 “이제는”이란 단어로 시작 됩니다. 그렇지만 사실 원문 헬라어 성경을 보면 하나의 단어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나”라는 단어 입니다. 영어 NIV 성경을 보면 21절이 ‘그러나’ 란 뜻을 가진 “But”이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앞서 2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안에서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 21절은 인간이 직면해야 하는 이 죄와 심판을 향해 대전환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는…” 본래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 말고는 의롭다 하심을 없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삶 말고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여태까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영적인 이력서를 제출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나타났습니다. 21절 말씀을 보니 이 길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전부터 증거해 온 길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란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면요 그것은 ‘구약성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쓴 글을 선지자는 선지자들의 글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때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이 있음을 증거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수 천년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해오신 또 하나의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구원의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에게 “하나님의 의” 곧 완전무결한 의가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주지 못한 완전무결한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는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방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놀라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특별히 본문에는 “모든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요즘 같은 때는 차별도 심합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이 되는 과정에는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처럼 전에는 율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 24절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이란 말은 대신 값을 지불해 준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생을 노예로 일해도 빚을 다 갚아서 다시 자유인이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죽음과 심판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있어, 이 빚은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 값을 수 없는 빚을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곧 속량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죄의 노예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이제는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우리가 잘 나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7절 말씀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우리가 무슨 법이나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에 내 힘으로 구원 받은 것처럼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 말씀처럼 ‘구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간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이 매일 땀을 흘리며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 달리신 채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가장 큰 희생을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누군가는 죄의 값을 짊어지고 죽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25절 말씀에 이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본래 우리는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표준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해 주십니다. 따라서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심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신학자 존 머레이(John Murray)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없애기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몰아 그 피를 흘리게 하실 만큼 진노의 대상인 인간들을 지독히 사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