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27. 복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로마서 1장 1-17절)

인간이 붓으로 기록한 책 중에 로마서만큼 사람들을 변화시킨 책이 없다고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로마서를 읽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로마서를 읽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수사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읽고 이신칭의 교리를 정리하여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이 책을 읽고 청교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이 로마서를 읽고 힘을 얻어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존 칼빈은 말하기를 ‘로마서는 성경의 모든 보화들을 이해하도록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첫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쓰인 ‘종’이란 단어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하고 스스로를 소개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갔던 사람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몰랐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그 분의 종이 된 것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의 삶이 변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 종은 종인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使徒)”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권세자의 위임을 받아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사’ ‘Ambassador’를 칭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만드시는 목적, 복음을 전파하라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1절에 바울의 고백이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따로 떼어 두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하는 사도로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이 있으니까요. 너무 행복한 거에요. 심지어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당해도 하나님께 감사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전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임무를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인데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복음’ Good News 를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좋은 소식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이란 원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승전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과 은총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2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약속’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복음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 가운데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해 두신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시리라 약속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두 가지로 증명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예수님의 혈통으로 증명합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십니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 입니다. 구약에 수많은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해 왔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님의 ‘성결의 영’으로 증명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100% 인간이이시며, 동시에 100%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고 계셨습니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100% 인간이시며 동시에 100%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절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다면 4절은 그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이 예수님의 육신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강조한다면 4절에 쓰인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영’ (Spirit)이 하나님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고 계십니다. 이단들을 살펴보면 이 둘 중 한 가지를 부인합니다. 그 분의 인성을 부인하던지 그 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00% 사람이시며, 동시에 100%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4절은 바로 예수님의 이 인성과 신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시는 화해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가장 큰 증거가 바로 그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되셨습니다. 본문 4절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는 말 가운데 ‘인정되다’라는 말은 “선명하게 나타났다. 완벽히 나타났다.”는 뜻 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중심이며 복음 자체이십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구원을 주신다는 말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신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는 아무나 못 갑니다. 시험성적이 뛰어난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미국의 백악관도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오직 자격이 있는 사람만 들어갑니다. 문턱이 높아도 너무 높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모든 믿는 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 누구나 들어가는 거에요. 아니 이처럼 들어가기 쉬운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본래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버드, 백악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비결은 단 한 가지, 죄가 없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 기준을 놓고 보니까 단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가면 검색대를 지납니다. 엑스레이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잡아냅니다. 하물며 기계도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데 천국에 있는 검색대는 얼마나 더 자세히 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죄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다 착하고 선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 안에 있는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불과 유황이 꺼지지 않는 지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16절을 보면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이스라엘 족속을, 헬라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첫째가 유대인인 이유는 그들은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이 그들과 먼저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수서로만 차이가 있을 뿐 구원에 관하여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누구든지 복음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야만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바바로이스”라는 말로 야만인을 뜻하는 영어의 “Barbarian”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 범절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 야만인들에게 쉽게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저런 야만인들, 저런 무식한 사람들, 저런 예의범절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거야. 뭐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중요하기나 하겠어?”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잘못된 믿음입니다.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목욕탕’과 같습니다. 목욕탕은 깨끗한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 더러운 사람들이 오는 곳입니다. 머리가 단정한 사람은 이발관에 갈 필요 없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식당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깨끗한 사람은 목욕탕을 갈 필요가 없다. 씻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목욕탕에 갑니다. 따라서 교회는 죄로 물든 사람이 오는 곳이죠. 문제가 많은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환영해줘야 합니다. “그래 교회가 소망이지! 교회 아니면 어디에서 이 죄를 씻겠는가?”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목욕탕과 같습니다.

지난 1994년도 대한민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 기억하고 계세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해하고 암매장하고 그 밖에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악행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들이죠. 지금도 ‘인면수심’ 사람의 얼굴을 쓰고 있으나 마음은 동물 같은 사람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그 잔인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TV와 신문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을 들으며 사람들은 천하에 이런 악인들이 있는가 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뉴스를 접하며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평신도 전도자들이 그 무서운 감옥을 들락거리며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지존파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 복음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1994년 성동구치소 보안계장으로 근무처를 발령받은 박효진 장로였습니다. 그는 서울구치소 교도관 형제들과 함께 이 전대미문의 범죄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믿음의 교도관들은 지존파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피눈물나는 몸부림으로 그들의 마음을 열고 회심의 문으로 인도했습니다.

어느 날 서울구치소 재소자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세상을 경악케 했던 지존파 두목 김현양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며 인육을 먹었다고 고백한 김현양 그는 복음을 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옆에서 지켜본 박효진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지존파 두목 김현양은 사형 집행일 마지막 순간에 찬송가 405장 불렀습니다. “말할 수 없이 큰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과분한 사랑을 받고 갑니다.” 이 고백을 남긴 채 그는 구원의 나라로 떠났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존파였던 한 사람은 사형수였으나 감면을 받아 세상에 나온 뒤 찬양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주 부르는 찬양이 바로 Amazing Grace 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서울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박효진 장로는 살인자라 불리던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고 하나 둘 점차 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지금도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야만인 같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안에 복음이 역사할 때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이처럼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목욕탕’입니다.

사도 바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 복음이야말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이 그러한 것처럼 이 복음을 자랑스러워 합시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자랑으로 삼으십시다.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는 복음이 충만한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