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0. [빌립보서 강해] 시리즈 (5) 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라 (빌립보서 1장 27절-2장 4절)

서론. 매너에 대하여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킹스맨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스파이에 대한 액션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더 유명해진 계기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멋진 명대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Manners, Maketh, Man.”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대사 입니다. 매너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키는 행동하는 방식이나 자세를 의미합니다. 말투, 얼굴의 표정, 손짓, 앉는 자세, 걷는 자세, 머리 스타일과 옷 스타일 등 사회 생활 속에서 지켜지는 일종의 예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같은 나라를 가 보셨습니까?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떠 먹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수저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손으로 음식을 떠 먹는 것이 그 나라들의 매너 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식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상대방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밥도 손으로 떠 먹고, 반찬도 손으로 잡아 먹습니다. 마음이 불편해 질 겁니다. 시간이 더 지나가면, ‘왜 저렇게 먹지?’하는 생각에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 상대방을 향한 불쾌함까지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한식을 먹을 때 수저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매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지역에 가면 우리가 볼 때는 속옷에 해당하는 수준의 옷들만 입고 생활하는 원주민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날씨가 무덥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아 생긴 하나의 문화일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그와 같이 옷 입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옷을 입고 다니면 큰 문제가 됩니다.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매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 헝가리, 로마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인사할 때 서로 양쪽 볼에 키스를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남녀사이에서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이고 매너 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똑같은 행위를 사우디 아라비아나 수단, 이라크 같은 곳에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범죄자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각 국가마다 가지고 있는 매너가 전혀 다릅니다.

 

  1.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매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민권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시민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시민들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지켜야 하는 매너, 즉 영적 생활양식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무언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성경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매너, 즉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핵심 메시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실까요? “믿음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라!” 오늘 제 설교를 다 기억하기 어려우시면 두 마디만 기억하십시오. “함께 살아가라” 하나님 나라 시민은 홀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함께 살아갑니까? 함께 살아갑니다.

27절 말씀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매너를 갖추고 살아가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매너는 어떤 모습입니까?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 다시 보세요.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마음으로 서 있으라!” 입니다. 우리 나라 성경에는 단순히 ‘서다’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굳게 서라’ (stand firm)는 말이 맞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위협 받고,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 서지 말고, 형제들을 떠나지 말며, 한 마음으로 함께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굳게 서 있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전쟁 용어로 설명하면, 적들이 두렵다고 탈영하지 말고, 영적 전우들과 함께 끝까지 전선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혹시 총소리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군대 훈련병 시절, 난생 처음으로 사격 훈련을 하기 위해 사격장에 갔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군대 사격장은 고요 합니다. 군인들에게 M16을 줍니다. 동시에 30명 정도 되는 군인들이 과녁을 향해 총을 쏘는데요, 총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를 막아야 할 정도 입니다. 또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제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훈련장에서 듣는 30명이 쏘는 총소리에도 가슴이 떨리는데, 포탄이 폭발하고 수류탄이 터지고, 수백 수천명이 쏘는 총소리가 들리는 전쟁터는 얼마나 무서울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그것도 적과의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입니다.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진격해 오는 적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습니다. 참호에서 몸을 일으켜 적을 향해 총을 쏴야 하는데, 빗발치는 적군의 총공세에 두려움에 굳어버린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적군이 쏜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가 사람의 이성을 마비 시키는 거죠. 실제로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전선을 이탈하는지 모릅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탈영한 병사들의 숫자만 2백50만명이 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죽음이 무서워 도망친 사람들의 숫자도 어마어마 했습니다. 작년 12월, 성탄절을 불과 3일 정도 앞두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병사들 중에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전선을 이탈하고 탈영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고, 엄청난 추위가 몰려오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속출하자 탈영 비율이 급증했다고 뉴스 기사들을 발표했습니다. 30만명이 넘는 새로운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냈는데도, 계속해서 전선을 이탈하는 탈영병들이 증가하니까 러시아는 전쟁할 병사가 부족했습니다.

전쟁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신앙생활도 전쟁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여러가지 어려움 그 자체가 전쟁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전쟁이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일이 전쟁이고, 직장이나 가게 나가서 일하고 사는 것이 전쟁입니다. 생존이 곧 전쟁인 셈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신앙도 믿음도 다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교회 나가는 것이 귀찮고, 사람들 하고 만나서 대화 나누는 것도 싫어 집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챙겨주던 사역을 하던 이들도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어 집니다.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을 돌 볼 여력이 어디 있나?” 이런 생각이 들며 이제 다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 오릅니다.

세상에 사는 게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어렵습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다 보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낮에는 에메랄드 빛깔의 푸른 바다에서 튜브 타고 놀다가 자유롭게 수영하고, 저녁에는 한 손에는 칵테일 한 잔 맛있는 랍스터 테일 먹으며 살아가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나홀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시민의 매너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편안하게 사는 삶, 여유를 누리는 삶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버리고 나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삶을 반대하는 겁니다.

 

  1. 혼자가 아닌 함께살아가라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27절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곧 내가 너희 곁에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너희가 한 마음으로 굳게 서 있어라!” 이 세상을 나홀로 살아가려고 하지 말고, 내 가족만 챙기려고 하지도 말고,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말그대로 함께 전쟁에 참전한 ‘전우’들 입니다. 세상이란 전쟁터에서 구원이란 승리를 얻기 위해 날마다 믿음으로 함께 싸워 나가는 전우들입니다. 하나님은 “너의 소중한 전우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지 말고 함께 끝까지 믿음의 전선을 지키라”고 말씀입니다.

미국 해병대(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가 가진 모토가 아주 유명하죠? “Until they are home, no man left behind.” 미 해병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우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전우가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을 반드시 구해 옵니다. “Leave no man behind.” 전쟁을 하다 보면 총에 맞는 군인들이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류탄 폭발로 팔 또는 다리가 잘리는 (amputee) 군인들도 있습니다. 지금 나 혼자도 살아남기 어려운 전쟁터 입니다. 적군이 부상자 발생했다고 사정을 봐줍니까? 아니요? 더 거세게 공격합니다. 그럼에도 미 해병대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부상당한 전우를 구해 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저자이자 강연가인 Simon Sinek 이 미 해병대의 이러한 부분을 아주 인상적으로 케치하여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고 연구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총알이 빗발치고, 수류탄이 터지고, 탱크가 밀려오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내버리고 전우를 구해 올까?” 답은 딱 하나 였습니다. “Because they would have done it for me.” Simon Sinek 이 얻은 결론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만일 내가 전쟁 중에 부상을 당했어도, 내 전우들은 나를 위해서 똑같이 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상당한 전우를 홀로 전선에 버려 두지 않고 목숨을 걸고 구해 오는 것이 미 해병대에게는 당연한 매너라는 거에요.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이처럼 어떤 어려움에도 신앙의 전선을 이탈하지 아니하고 한 마음으로 굳게 서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매너라고 가르칩니다.

“목사님, 하지만 제 삶도 지금 엄청 힘든데요? 저 힘든 사람 살리려다가 오히려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목사님 정말 그러다가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한 번 들어 봅시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참 신비한 이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것 같은데 살아남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살아남을 것 같은데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택하는 자는 오히려 그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오히려 그의 목숨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명량]을 보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명장면이 있습니다. 왜군의 엄청난 숫자의 배들과 군사력 앞에서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죽을 것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왜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는 커녕 저마다 육지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요동하는 조선의 군사들을 보고 소리칩니다.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병법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떨게 할 수 있다 하였다!” 난중일기에 실제로 기록된 말입니다. 필사즉생필생즉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막강한 왜군을 상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들을 수차례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목사님, 제 삶도 지금 엄청 힘든데요? 저 힘든 사람 살리려다가 오히려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목사님 정말 그러다가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어가는 형제를 위해 사랑으로 함께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붙드시고, 책임지고 살리십니다.

 

  1. 성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절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글 성경을 보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낫지. 저 사람이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본문의 “낫다”는 표현 보다는 “중요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3절을 다시 해석하면 “아무 일에든지 개인적인 야망이나 속임수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각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십시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나보다 형제들을 더욱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 시민이 가져야 할 매너 입니다. 시편 16편 3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한 번 볼까요? “[16:3, 새번역]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하겠습니다.” 다윗은 왜 성도들을 존귀한 자라고 평가했을까요? 그들이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라서요? 배움이 있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라서요? 아닙니다. 사실 다윗 주변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일명 트러블메이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다윗은 성도들이 존귀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다윗이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들인 성도들이 그의 기쁨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주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기뻐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4장 1절 말씀입니다. “[4:1, 새번역]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바울이 성도들을 향하여 뭐라고 지칭했습니까? “My brothers, My joy, and my crown!”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나의 기쁨이고 여러분이 곧 나의 자랑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 보시면서 한 번 인사 해 봅시다. “집사님, 집사님이 제 기쁨이고, 제 자랑입니다.”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기쁨이고, 또 저의 자랑 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단순히 나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의 방향이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4절 말씀을 볼까요?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나 자신의 건강, 나 자신의 비지니스, 나의 자녀들, 나의 가족 물론 이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다른 형제들의 사정을 돌볼 수 있는 매너를 가지라고 이야기 합니다. 4절에서 사용된 ‘돌보다’는 말은 단순히 ‘돌봄’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상대방은 무슨 일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필요가 있는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관찰하라는 겁니다. 형제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고,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함께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합니다.

지난 1998년 개봉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 중 4형제가 나란히 전쟁에 참전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쟁으로 4형제 중 3형제가 목숨을 잃고 막내 [제임스 프란시스 라이언] 만 남았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그의 어머니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밀러 대위와 그의 부대에게 라이언 일병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밀러 대위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얼굴도 몰랐던 말단 병사인 라이언 일병을 전쟁터에서 찾아오기 위해 여러가지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밀러 대위의 부대원들이 적군의 공격에 하나 둘 죽게 됩니다. 라이언을 살리려다가 밀러 대위도 죽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 임무에 들어간 수색조 중 단 2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과연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러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정말로 가치 있는 인생은 어떤 모습의 삶일까?”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던 밀러와 부대원들의 목숨을 단순히 수적으로 계산하면, 한 사람을 위해 한 부대를 희생하는 상부의 명령이 부조리해 보이고, 이 영화가 주는 진정한 감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준 밀러와 부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을 보기 시작할 때 영화는 가슴을 울리는 명작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 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 삶을 희생해야 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수적으로 계산하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매너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가치, 한 영혼의 가치, 한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형제들을 살리는 그 일을 기쁨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올바른 매너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서로를 돌보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죽어가는 형제를 살리며, 아픈 형제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 주신 영적 전우들을 소중히 여기십시다. 나도 힘들다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는 결국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힘들어도 나보다 연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들을 살리는 길을 걸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