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7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9장 1-13절)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쫒아내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친구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거동이 불편한 친구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고 직접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예수 앞에 눕히려 했지만,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모인 인파로 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찌할까 발만 동동 구르던 네 친구들, 그들은 사람들이 한적한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 바로 위의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자리에 눕힌 채 사람들 한가운데로 그를 달아내려 바로 예수 앞에 놓았습니다. 잠시 여기서 멈추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데리고 지붕에 올라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남의 집 지붕을 뚫는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다소 무모한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그들은 실행할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내 친구의 중풍병도 고치실 수 있을 거야.”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에 이들은 과감하게 지붕을 뜯어내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길과 방법을 찾아냅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린 이들의 행위를 보시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 행동 이면에 있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행함 = 기적입니다.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주님께서는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안심하렴 네 죄가 용서받았단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친구의 중풍병이 낫기 위해 예수님께 어렵게 나아온 이 사람들에게 주님은 “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나 친구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금 죄 사함 받으러 이토록 고생한 줄 아시나? 죄 사함 받으려면 우리가 제사장에게 가서 소를 잡다가 제사를 드렸을탠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거에요. 이처럼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건강을 구하는데 오히려 병을 주시고, 부함을 구하는데 오히려 가난에 머물게 하십니다. 자녀가 잘 되길 구하는데 오히려 어려워지고, 평안함을 원하는데 삶이 더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사실 그럴 때가 더 많은 거 같아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잘 못 들으신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좋은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들을 주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계시기에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장 좋은 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생활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더 좋은 목적을 가지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한 목적을 알리 없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권한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십니다.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서기관들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평범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율법을 어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죄 사함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정답은 “일어나 걸어라” 하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일어나 걷는 것은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 금방 눈으로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그에게 병 고치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선한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병원에서 일하는 환자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만 치료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해결 할 수 없는 영적 질병인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리신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십니다. 무엇으로 치료하십니까? 좋은 약입니까? 비싼 침을 놔주십니까? 아닙니다. 6절 말씀을 보니 우리 주님은 말씀으로 치료하십니다. 병만 나았으면 죄사함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시자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중풍병자는 평생 침상을 벗어날 수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있는 말씀이 임하자 그는 그 날 마침내 침상을 벗어났습니다. 그 집에서 나갈 때는 침상을 손으로 들고 나갔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함께 해주실 때, 우리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삶에 임할 때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삶에 임할 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상황이 변화될 것입니다. 치유 받지 못할 것 같은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통스럽고 힘들던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자 깨끗하게 해결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능케 됩니다. 오늘 7절 말씀은 그가 침상에 누워서 집에 갔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돌려드렸습니다.

서기관들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병을 고쳐주실 수 있겠지 하고 믿음으로 중풍병자를 들고 나온 사람들처럼,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말씀으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금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9절부터는 예수님과 세리 마태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도 세리 마태는 평소처럼 자기 사무실에 앉아 세금을 걷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사무실이었던 세관 앞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세고 세금을 작성하고 있는 마태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Follow me! 마태는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늘 즉시 순종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으며, 사도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잡이 배와 그들의 아버지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태 역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손에 쥐고 있는 서류들과 세금들을 내려놓고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 내가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께요! 주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내가 이 비지니스만 마무리하고 따르겠습니다.”하고 미루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 마태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이 장면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선지자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더러운 죄인이요 민족의 배신자인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집에 초대받은 자들 역시 세리들이고 죄인들이 많았습니다. 새까만 까마귀들 노는 곳에 가 있는 새하얀 백로 한 마리가 있는 것처럼, 이 장면을 이상하게 여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12-1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세상 의사들이 환자의 병든 몸을 고치듯이, 천국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로 물든 영혼을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세리들과 죄인들의 삶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는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요? 의사가 환자의 동의 없이는 수술을 할 수 없듯이, 예수님은 자신들이 병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볼 일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겸손하게 죄인 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왔더라면, 그들도 죄 사함의 은혜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므로 예수님을 필요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들은 제사도 잘 지내고, 안식일도 잘 지키고 나머지 법들도 누구보다 열심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기 의로움을 추구했을 뿐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열심은 마치 악성 암 말기 환자가 운동해서 병을 치료하겠다고 Gym에 가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병든 자는 Gym 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합니다. 우리 죄의 문제는 의롭게 산다고 착하게 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인간의 선행 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종교적 행위로 죄에서 자유케 될 수 없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몸을 맡기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수술하시도록 우리 몸을 회개란 이름의 수술대 위에 올려놓을 때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죄로부터 자유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를 빗대어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 주님께서는 완벽한 의로움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상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내 영혼이 고장 나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바로 상한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마음으로 나오는 자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세리 마태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세리 마태의 삶에 찾아오셨고, 그의 인생을 고치셨습니다. 세관에 갇혀 세금을 거두는 삶에서, 세상을 다니며 생명을 거두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사도 마태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버림받은 찌꺼기처럼 여겨지던 세리였으나,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깨끗하게 치유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민족의 배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았습니다. 마태를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 삶에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사무실에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오늘 주께서 부르실 때 즉시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께 상한 마음을 고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