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베스트셀러로 등록 되어 장안의 지가를 높인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의 장르는 현대인들이 가장 즐겨있는 소설도 아니었으며 수필도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가장 읽기 힘들다는 철학서였습니다. 본래 독일어로 쓰여져 독일의 주요 신문들과 방송 매체들이 앞 다투어 책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피로사회] 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조형예술대학의 교수며 한국인인 ‘한병철’ 작가 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논제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성과중심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성과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아간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즉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성과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무언가 일을 하고 성취하고 이뤄내야만 내 존재가 확인되는 사회…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뒤쳐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이런 “피로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교수의 책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수많은 젊은이들과 직장인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왜 이토록 읽기 어려운 철학서가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한경쟁 속에서 지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과거에 비해 과학과 기술은 눈에 띄게 발달했으나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쟁과 쉼이 없는 피로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서 쉼 없이 안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장입니다.
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수고하다’는 말은 분사능동형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지친 상태입니다. 새벽 일찍부터 출군하여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 늦은 시간까지 야근 일하고 돌아온 직장인처럼 파김치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피곤함에 침대에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그런 몸 상태 입니다. 28절에 ‘무거운 짐을 졌다.’는 말은 분사수동형입니다. 즉 나는 이 짐을 별로 들고 싶지 않은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 이 무거운 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돈을 많이 벌어도 여전히 우리 삶에는 염려와 걱정이 가득합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한 수고로 피곤한 몸과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괴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습니다. 그가 그 크고 무거운 돌을 간신히 정상에 올려 놓으면, 애석하게도 그 돌은 다시 밑으로 데구르르 굴러 내려가 그는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은 끝없는 노동과 쉼 없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절망 가운데 우리들을 향해 오늘 한 줄기 빛 같은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처럼 아무도 도와줄 이 없어 홀로 힘들게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오늘 그 분은 자기를 어떤 분으로 소개 하고 있습니까? 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가 방금 읽은 28절과 29절의 자연스런 연결을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은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힘이 세고 가진 게 많단다” 하고 말씀 하시는 게 논리적으로 더 맞아 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힘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도와줄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소개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능력과 소유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의 성품을 나타냈습니다. “힘들지? 여기 내게로 와서 쉬렴 나는 말이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단다.” 어쩌면 28절을 읽고 인생의 희망을 발견했던 사람이라면 곧이어 29절을 읽고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온유가 밥 먹여주나? 겸손이 무슨 도움이 되나?” 우리도 언뜻 읽으면 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우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과 겸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 낙스라는 목사님이 쓴 [성령의 열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온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온유를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와 같다고 말합니다. 돌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상처를 입으면서 돌을 튕겨냅니다. 또한 유리병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유리병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호수에 던지면 호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잔잔하게 흐릅니다. 호수에는 무엇을 던져도 잔잔합니다. 온유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방을 하고 상처를 줄지라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다 받아주실 만큼 넓은 품을 가지신 온유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온유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근처에도 못 갔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께 가려고 해도 그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온유하시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둘째로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이 낮고 낮은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구간 구유라는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죽는 그 순간에도 해골이란 뜻의 골고다 언덕에서 사형수들이 매달리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겸손하시다는 것은 그분께서 피조물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치른 희생의 대가를 떠오르게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능력자요, 부자로 소개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질적으로 힘으로 또는 물질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향하여 끝까지 참으시는 온유한 사랑으로 인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와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란 두 짐승을 함께 묶어 놓는 나무로 된 틀을 의미합니다. 유대교에서 멍에를 멘다는 것은 한 랍비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율법을 배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멍에를 매라는 표현 다음에 내게 배우라는 말이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죽은 율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닮게 돼 결국 마음의 쉼을 얻게 됩니다. 진리를 알진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멍에와 죄의 멍에 그리고 모든 두려움과 염려의 멍에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참된 쉼을 얻는 제자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