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0. 다가오시는 하나님 (욥기 38장 1-18절)

 

만일 오늘 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그 어떤 질문이라도 반드시 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묻고 싶으십니까?” 내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묻고자 하는 그 질문이 나의 신앙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간절히 나타나시기를 기다린 욥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싶은 질문이 명확했습니다. “하나님 큰 잘못이나 죄악을 저지른 적 없는 제가 왜 이처럼 큰 고통과 무시무시한 재앙을 당해야 합니까?” 욥은 평생을 의롭게 살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자신이 당한 상황이 억울했고, 재앙을 겪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고,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몰라 황망해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고,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신앙생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목사님께 설교 말씀으로 들어 익히 잘 알고 있었다고 느꼈던 하나님의 모습도 아닙니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했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으신 하나님, 분명 가장 좋은 길로 내 삶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는데, 내 삶에 고통과 재앙만 허락하신 하나님… 욥은 평생을 섬겨온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해서, 주님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도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죽고 싶을 정도로 삶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오늘 욥과 같이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분이 이 자리에 없으십니까? 죽고 싶을 만큼 영혼이 괴롭고 심장을 쥐어짜듯 눈물이 앞을 가리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분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 본문 속 고난 속에 있는 욥에게는 하루가 1년 같았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통 속에 나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욥기 38장에서 욥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8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줄 믿습니다. 따라서 욥과 같이 억울하고, 힘든 상황을 만난 사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더욱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니,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종종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폭풍우는 우리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입니다. 즉 폭풍우는 사람이 경이로운 자세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위대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욥이 그토록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 뵙기를 원했던 이유가 있었죠? 그는 왜 자신이 까닭 없이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 책망하며, 그를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이와 같은 큰 재앙을 당할 만큼 악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변론하였습니다. 억울함에 갇힌 욥,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과 변론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재앙의 이유나 원인이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나요?” 욥의 이 질문이야 말로, 우리 모든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는 지식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과 같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놓아 두셨나요?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을 허락하시나요? 왜 악이 이토록 가득한 세상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나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과 같은 비극이 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나요?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싶습니다. “왜 아무런 죄 없는 갓난 아기들과 어린이들이 날아오는 총알과 미사일 공격에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하나요?”, “이 추운 겨울날 시카고와 뉴욕과 같은 도시들을 찾은 수많은 난민들이 잠잘 곳이 없어 건물 밖 길거리에서 슬리핑백 안에 들어가 밤새도록 떨면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추위와 사투를 벌이는 고통과 아픔은 왜 일어나나요?”

욥의 질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Q. 왜 선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과 우리 인생에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바로 이 질문이야 말로 전 인류가 이 긴 역사 속에서 그토록 해결하고 싶어도 풀지 못하는 궁금증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 같나요? 그러나 지금도 이 질문을 해결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고, 지금도 이 질문을 해결하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세계 2차 대전 속에서 독일 나치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처참히 죽여가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어느 젊은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선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병으로 먼저 보내야 했던 남편, 아내, 부모, 자녀들도 “성경이 말하는 선하신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없다!”하고 외치며 교회를 나갔습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전쟁, 가뭄, 기아, 질병 등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바로 이 질문인 것이죠. 사실 욥기를 계속 읽어오며 우리들도 한 가지 강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게 되면, 이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께서 주시겠지! 이런 부푼 마음으로 욥기를 읽어갑니다.

인생에 찾아온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욥의 세 친구들은 말했습니다. “인과응보다! 죄악을 지어서 심판과 벌로 고통이 주어진 거다.” 인생에 찾아온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엘리후라는 젊은이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악행을 버리게 하는 차원으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주는 대답들은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답변으로 치부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이 세상에 있는 고통의 원인과 우리 당하고 있는 아픔과 눈물과 억울함의 원인과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원인 말고, 하나님께서 직접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는 그 정확무오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 욥기 38장에서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했을 때 욥의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요? 욥기의 맥락을 잘 따라서 성경을 읽고 있는 성도들의 가슴도 두근거립니다. 그러나 욥기를 읽는 모든 이들의 기대와 다르게 하나님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폭풍우 가운데 하나님은 욥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이 가진 유한한 지혜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깊은 원리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8:2-3]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2절 말씀 다시 한 번. 봅시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새번역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 되어 있습니다. [38:2, 새번역]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여태까지 욥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죠! 제가 얼마나 평생토록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는데! 저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하나님 이건 아니죠!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해주셔야죠!” 하고 욥은 하나님께 훈수 두려고 했던 거죠.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십니다. “너가 하나님이니? 너가 나 보다 더 지혜로우니? 욥, 너 말대로 너가 그렇게 지혜로우면, 그럼 어디 한 번 내가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네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한 번 대답해 보겠니?” 그리고 이제 4 절부터 하나님께서 욥에게 불처럼 폭풍처럼 질문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는 질문의 숫자가 무려 77개 입니다. 욥이요 이 모든 질문에 하나도 입도 뻥끗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는 질문들이 무엇인지 한 번 볼까요? 4-6절 입니다. [38:4-6]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하나님께서 욥에게 묻고 계신 거에요. “욥아, 너 이 세상이 창조될 때 너가 거기 있었니? 너 이 세상이 어떠한 원리와 방법으로 창조 되었는지 너 알고 있니? 세상의 기초가 무엇 위에 세워졌는지, 누가 그 모퉁이돌을 놓았는지 너 알고 있니?” 욥은 자신이 가진 지혜로는 입이 열개라도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너 바다의 한계를 정한 자가 누구인지 아니? 바다의 한계선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아니? 네가 새벽에게 명령해서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니?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까지 들어가 봤니?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 본 일 있니?” 18절만 읽어 봅시다. [38: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욥아 너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니? 네가 이 모든 것을 다 알거든 한 번 말해 보렴!”

사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면 자신이 이길 줄 알았어요. “하나님, 이건 아니죠! 이번에는 하나님이 틀리셨네요. 이번에는 제가 맞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셨어야죠!” 이렇게 자신이 훈수 두어서 하나님을 이길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욥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이 실수하신 거에요. 이렇게 해 주셔야죠!” 마치 하나님보다 내가 더 지혜로운 냥 하나님께 훈수 두는 냥 하나님을 타이르고 가르치는 냥 교만한 마음과 목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욥이 주장하고 의지하던 지혜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작은 것인지 깨닫게 하시자, 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장면이 나오는 욥기 40장 1-5절을 새번역성경으로 한 번 읽어 봅시다. “[40:1-5, 새번역] 1 주님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셨다. 2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3 그 때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은 여태까지 자신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자신은 억울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다스리고 계신 거라고 내심 생각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불평을 터트리고자 했고, 자신이 하나님과 변론하면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욥은 하나님 앞에 서자, 자신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 서 보니, 자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자신의 지혜나 의로움이 정말 초라하고 볼품 없는 쓰레기나 더러운 걸레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몸을 숙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만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무한하신 지혜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자세히 다 설명해 주신다 한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선하신 지혜를 가지고 그의 전능하심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고난을 이 세상과 우리 인생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의 숨어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다 말해 주신다고 해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우리의 유한한 지혜로는 그 뜻을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상을 보기 전 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기본적 개념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다 보니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거에요. 영상 속 해설자는 상대성 이론을 자신 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1+1=2 를 설명하는 초등학교 산수 선생님처럼 자신의 말을 듣는 시청자들이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그런데 듣고 듣고 또 들어도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안 가는 거에요. 영어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평상시 사용하고 있는 모국어인 한국말로 또박또박 설명하고 있는데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구글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검색해보고, 글을 읽어 보고 또 읽어봐도 개념이 다 이해 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아, 내가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구나? 여태까지 내가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구나?”

사람은 어떤 분야이든지 공부하고 깊게 연구하기 시작하면 분명 새로운 단계의 지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 순간 그 사람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아, 아직도 내가 모르는 무수한 단계가 이보다 더 깊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평생을 연구해도 아직 모르는 것이 이렇게나 많구나? 나는 한 가지를 발견해서 이렇게 좋아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구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고 여겨진 소크라테스는 평생토록 지혜를 추구했습니다만, 그가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축적해온 결과 깨달은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너 자신을 알라!” 내가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인정하라!” 이런 뜻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10대 혹은 20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 또는 청년들을 보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으시죠?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깨달은 것 느낀 것 알려주고 싶으시죠? 그런데 지금 말해줘도 어린 아이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야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 깨닫습니다. “아, 내가 그 때는 뭘 몰라도 진짜 몰랐구나?”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내가 나의 10대 혹은 20대 때의 젊은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죠? “내가 지금 알고 있었던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하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20대가 되면 자신이 10대 때 얼마나 지혜 없이 살았는지 깨닫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 후회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지 모르지만 여전히 30대가 되면 20대 자신이 또 얼마나 지혜 없이 살았는지 깨닫게 됩니다. 40대가 되면 30대 때 이런 것을 알았었더라면 더 좋았을탠데 후회하고, 50대가 되면 40대 때 이렇게 해봤으면 좋았을 탠데 하고 또 후회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인간은 평생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그 때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지혜가 부족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속 우리 모습들도 다시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때 내가 참 미약하고 미련 했었구나?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하고 깨닫게 되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것대로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삶을 마감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 입니다.

 

이제 욥기는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인간의 미련함과 무력함이 계속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인간 욥 사이의 절대적인 간격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우리들이 감히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지적 한계선 밖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크나큰 간격을 발견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지혜를 소유한 사람 입니다. “[28: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은 자신이 당하는 억울한 상황이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 들일 수는 더더욱 없는 고통 가운데 놓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하나님께무언가 착오가 있거나 하나님께서 무언가 실수하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다가오시고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대면한 욥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틀리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그 고백이 욥기의 마지막장인 42장에 있습니다. 욥기 42장 1-6절 말씀도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42:1-6, 새번역]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6절에서 욥이 말하고 있는 “제 주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틀리고, 내가 맞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십니다!”하고 주장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겁니다. 결국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그 크신 지혜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제가 어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과거에도 옳으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이와 같은 욥의 고백으로 욥기는 마무리 됩니다. 욥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완전하신 지혜 그리고 선하심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갑절의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을 맞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괴로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억울함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맞고 하나님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무한하고 완벽하신 지혜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 그 분께서 우리를 고난 중에도 붙들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님께 우리 삶을 온전히 맡겨 드리며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