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2. 힘겨움 가운데 드리는 호소 (욥기 3장 1-26절)

[핵심 메시지] 의인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토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 앞에서 울 수밖에 없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눈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닦아 주실 이가 주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양이 3천 마리, 낙타가 3천마리, 소 5백 마리, 암나귀 5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종들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포브스]라는 잡지는 매년 세계 최고의 부자들을 조사해서 기사로 내놓습니다. 아마 욥의 시대에 [포브스]가 있었다면 1위가 욥이었습니다. 욥은 이와 같이 엄청난 부자일 뿐만 아니라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아들은 7명 딸도 셋이나 있었습니다. 욥이 이와 같이 큰 부를 소유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욥을 이렇게 특별하게 대해주셨을까요? 이는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욥기 1-2장에서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의 회의에 찾아온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신앙은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단지 그와 같이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을 바라고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 좋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만일 욥이 가진 재산, 욥에게 주어진 자녀들, 욥이 가진 건강이 다 사라지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할 것이 분명하다고 따졌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재산, 자녀, 그의 건강을 그의 손에 맡기되 생명은 해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던 욥은 하루만에 연달아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들로 전 재산과 열 자녀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몸을 긁지 않으면 가려워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던 욥의 아내도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자살하십시오!” 하고 말할 정도로 욥은 정말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욥의 세 친구들은 처음 욥의 모습을 보고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으나, 곧 그가 욥인 줄 깨닫고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밤낮 7일 동안 그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욥의 참담함이 큼으로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이 너무 커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어 그의 곁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1.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1-10)

드디어 길고 길었던 일주일 동안의 침묵을 깨고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먼저 오늘 3장에 나오는 욥의 말을 듣기 이전에, 그가 전 재산을 잃고, 열 자녀가 죽었을 때 욥이 무엇이라고 말했었는지 봅시다. “[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이 정수리로부터 머리 끝까지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반응을 또 봅시다. “[2:9-10]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이처럼 욥은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열 자녁들이 다 죽고,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 몸이 종기가 나서 고름이 나서 가려움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라고 해서 어찌 이러한 상황이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고통이 대수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삶이 힘들면 마음이 아프고, 상황이 괴로우면 눈물이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열 명의 자식이 다 죽었는데 어찌 눈물이 안나왔겠습니까? 한 평생 땀 흘려 열심히 일하여 일구어 놓은 재산도 다 잃어버렸고, 온 몸이 고약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데 어찌 욥이라고 그의 마음이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소리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리며 머리에 뿌리고 땅에 털썩 주어 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1) 고통 속에서 침묵하던 욥이 입을 열어 처음 뱉은 말은 무엇입니까?

일주일 동안 이어진 긴 침묵…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침묵하던 욥이 입을 열어 처음 뱉은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3:1-3]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욥은 괴로운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리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좋았을탠데!”,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하고 좋아하던 그 밤이 망해 버렸더라면 좋았을탠데!”, “그 밤이 차라리 아무도 아이가 태어남으로 기뻐하던 소리를 낼 수 없는 밤이었더라면 좋았을탠데!”, “그 밤에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날이 밝아오지 않고, 다음 날 동도 트지 않았어야 좋았을탠데…!”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욥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누구나 생일은 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특별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생일을 맞이하면, 생일 케익에 촛불을 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줍니다. 생일선물을 줍니다. 그 한 사람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날을 기념하는 그 사람에게는 가장 의미 있고 뜻 깊은 날입니다. 그러니 욥이 자신의 생을을 저주하고 욕했다는 사실은, 그가 당한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2)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기 3장 10절에 그가 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있는지 더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아! 내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을 겪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이런 울부짖음 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욥기 7장 11절에 가서야 하나님에 대한 욥의 불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는 갑작스런 썰물처럼 밀려든 엄청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욥이 자기 홀로 탄식하며 당혹감과 절망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있을까요?

 

  1. 욥은 살아 있음을 탄식합니다.

1) 욥은 어머니의 태에서 죽었거나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면 지금 어떠했으리라 말합니까?

욥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탄식합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면 오히려 편히 누워 자고 쉬고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3:11-13]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11절, 12절을 보시면 무려 3번이나 “어지하여”라고 욥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람마’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는 ‘마땅히 그렇게 되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어머니 태중에서 마땅히 죽어서 나왔어야 했는데!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세상에 남아 있어 이토록 고통 받고, 커다란 아픔과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살아가느니 지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욥 입니다. 욥에게 오늘이라는 하루는 또 하나의 생활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생지옥이었던 것이죠.

 

2) 욥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무엇입니까? (20)

이러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욥의 마음 속에는 떠오르는 질문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 입니다. “[3: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들을 태어나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걸까?” 욥은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면 죽이셨지, 이토록 혹독한 고난 가운데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지에 대한 강문 의문을 나타냅니다. 즉 이 질문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입니다. 자신이 지나고 있는 고통이 극심하다 보니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왜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 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21-23절을 봅시다. “[3:21-23]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1절에 욥은 자신이 죽기를 얼마나 바랬는가 하면 도굴꾼들이 왕들의 무덤에 숨겨진 보화와 보물을 찾는 것보다 더욱 간절히 죽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오늘 욥의 이러한 절규와 절망 속에서도 한 가지 그의 마음 속에 이어지고 있는 태도가 있습니다. 숨겨진 보배를 도굴꾼들이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욥은 그의 죽음도 자신의 재량권 밖에 있는 것임을 은연 중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욥은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1] 사람이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욥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오.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아픔들을 겪고 있습니다. 전 재산을 다 잃었고, 온 몸에 극심한 피부병이 병들어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사랑하는 자녀들 열 명이 모두 한꺼번에 불의의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순간에도 생명의 삶고 죽음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지금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참혹한 일을 당했고, 깊은 신음과 큰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여전히 욥은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살하는 것이 왜 큰 죄일까요? 내 생명을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우리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와도 여전히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주인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3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사방으로 사람의 길을 막으시고, 그와 동시에 여전히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욥은 지금 절망 중에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가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생명의 연장시키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왜 저를 그냥 죽이지 않으십니까? 왜 저를 그냥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왜 이대로 고통 당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와 같은 울부짖음이 욥의 목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고난과 이유 모를 고통에 대해서 욥은 떨고 있었습니다.

 

3) 욥이 그토록 쉼을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왜 그토록 욥은 죽음을 원하고 있을까요? 욥은 많은 고통을 겪으며 심신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쉼이었습니다. 욥은 죽음을 통해서 쉼을 얻고 싶었습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26]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자신의 삶에는 평온함도 없고, 안정도 없고, 휴식도 없다고 말합니다. 욥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불안 곧 고난 뿐입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죽음을 통한 심신의 쉼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쉼을 누리고자 한 욥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욥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적용 2] 오늘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욥이 죽음을 바란 것은 그것만이 괴로운 현실을 피할 수 있는 도피처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현실은 불의가 가득하기에 차라리 그 어떤 불의나 불평도 없는 죽음의 세계를 택하기를 원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이러한 극단적인 감정과 생각 조차 하나님 앞에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욥기 4장부터 그의 세 친구들은 이러한 욥의 반응이 불경하다고 그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고통 중에 외치는 욥과 같이 꾸밈 없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욥과 같이 극심한 고통 중에 애타는 간절한 마음과 탄식하는 신음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털어 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찢어지고 상한 마음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눈물의 고난으로 인해 산산조각난 영혼의 상태이십니까? 그 마음 가지고 다른 곳에 가셔서 풀지 마시고,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다. 사람들에게 가서 울면 그저 불만을 길게 늘어 놓으며 하소연 하는 넋두리가 되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울면 그것도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놀라운 은혜의 열매를 가지고 옵니다. 성경을 보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셨죠? 욥과 같이 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선망할 정도로 아픈 그 순간에도 우리가 울며 씨를 뿌리며 나가야 할 곳은 주님의 품입니다. 마음이 아플수록, 영혼이 괴로울수록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우리 주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x2)

 

혹시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토기장이는 점토에 물을 부은 후 맨발로 흙을 밟습니다. 일명 흙을 이기기 과정입니다. 점토가 다 이겨진 후에는 흙을 회전판 위에 올려 놓습니다. 회전판이 돌아가면 토기장이의 손에 따라 점토가 조금씩 그릇 모양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손을 대는 대로 그릇 모양이 길쭉 해지기도 하고, 유리병처럼 가늘게 되기도 합니다. 모양이 다 만들어지면 그늘에서 그릇을 말립니다. 그 후에 점토를 뜨거운 불에 넣어 굽습니다. 구경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참 재미 있는 광경입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진흙은 아마 죽을 맛 일 것입니다. 누군가 “진흙에게 너 요즘 어떠니?”하고 묻는다면 진흙은 “나를 깨뜨려 주던지 어떻게 좀 해주소. 도대체 언제 즈음이면 이 모든 고난이 끝날지 모르겠소.”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진흙의 대답이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공통된 심정입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손에서 귀한 그릇으로 빚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진흙이 토기장이의 마음을 알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간 후에 시련을 당하면 상대적으로 그 비참함이 더 심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사글세 살던 사람이 더 조그마한 방으로 이사가는 것도 비참합니다만, 집주인이었던 사람이 사글세 신대 되면 상대적으로 그 비참함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이것은 욥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은 당시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요 실력자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연단이 시작 되면서 아이들은 다 죽고 본인은 알거지가 되었을 때 그 상대적 상실감이 너무 컸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욥이 그 무시무시한 하니님의 시험을 당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세 친구에게 심정을 밝힌 것입니다. 그 핵심은 지키는 지금 너무너무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우리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이것이 사실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 정금 같은 신앙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적용 3] 욥은 자신의 생명과 고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 우리가 겪는 고난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속 욥도 하나님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큰 잘못이나 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 나에게 이런 커다란 시련을 허락하시는 걸까?” 욥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눈물과 탄식으로 살아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시는지, 왜 살아서 이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욥은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러나 욥기 3장에서 욥이 발견한 하나님은 낯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생명을 포기한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욥은 여태까지 그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더 깊이 그리고 새롭게 알아가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현재 욥과 같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와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그리고 새롭게 알아갈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극심한 고난 중에도 욥과 같이 살아 계셔서 온 세상과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과거에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욥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 지금 욥처럼 삶에 평안도 없고, 쉼도 없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욥 정도의 고난은 아니어도 사는 것이 힘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괴롭고,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 고통스런 삶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욥이 고난 가운데 은연 중에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붙잡고 계셨습니다. 영어로 힘든 날, 고통스러운 날은 “Rainy Day”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Sunny Day”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Sunny Day”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온 세상이 사막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Sunny Day”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Rainy Day”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19:71 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고난 당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며 유익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 그 어느 곳 보다 광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체험한 것처럼 인생의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하며 우리 삶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안도 쉼도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고 지금도 우리 삶을 인도해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쉼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려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려 하십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뛰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