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8. 탄식과 믿음의 간극 (창세기 15장 1-21절)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람아, 너 고향 땅 아버지 집을 따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자녀도 주고, 너의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는 실로 엄청난 약속 입니다. 그러나 사실 일흔 다섯이란 나이는 인생에서 새롭게 모험을 떠날 시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정든 고향 땅에 머물며 인생의 황혼기를 여유롭고 평화롭게 보내는 시기 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일생을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가나안]이란 땅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언어와 문화도 낯선 이방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아브람,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고, 그가 이민 생활을 잘 정착하도록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사 자신에게 자녀를 주시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주시고, 그가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 복을 누릴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가나안 이민 생활은 갈수록 꼬여만 갔습니다. 먼저 우리가 지난 주 주일에 살펴 본 것처럼 가나안 땅에는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가나안 땅에 경제대공황이 나고, IMF 사태가 터진 셈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기근을 피해 그 땅을 떠나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피신 가야 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미인이었던 그의 아내 사라를 애굽의 왕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애굽을 빠져 나온 아브람과 사라는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람의 인생은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그가 아끼고 친자식처럼 사랑하던 조카 룻과의 관계가 깨지며 그를 멀리 떠나 보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브람과 룻이 한 자리에서 같이 비지니스 하다가 조카 룻과 의가 상하는 일이 자꾸만 반복해서 발생하면서 결국은 룻이 따른 장소로 비지니스를 옮긴 셈입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보면 친자식처럼 생각했던 룻과의 관계가 끊어진 셈입니다.

이후 가나안 지역은 정복 욕에 눈이 먼 여러 왕들의 전쟁터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 중 아브람의 조카 롯이 붙잡혀 그의 전재산을 잃어버리고 전쟁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본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참여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아브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결국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조카 롯은 살렸습니다만, 그 중에 너무 많은 적군을 죽여 이제는 아브람이 적국의 미움을 받게 된 상황입니다. 아브람의 인생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그러했을 법하게 아브람이 원했던 것도 가나안 땅에 이주하여 여생을 평안하게 사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나안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태풍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사방의 적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이라도 그에게 당한 적군들이 다시 연합하여 아브람의 장막에 기습해 쳐들어 올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이 느낀 감정은 탄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성경 학자들은 본문 속 아브람의 나이가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하나님께서 “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면 내게 복을 주겠다!”고 하나님께 약속 받은 지 약 5-10년 즈음 지난 그 언저리란 것이죠. 아브람은 그저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는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으로 이민 왔는데, 그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을 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아브람은 자식도 없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갈수록 늙어 갑니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나이에 접어든 것도 이미 오래 전 일입니다. 아마 제가 아브람이었다면 저였다면 ‘고향 땅을 떠났던 지난 날의 나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이었을까?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탄식에 접어 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적들이 쳐들어 오면 한 순간에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극도의 두려움까지 겹쳐 있으니 아브람은 말 그대로 잠 못 드는 긴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잠 못 드는 긴 밤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아파 병들거나, 사고 당해 큰 수술 후 입원해 있을 때, 혹은 비지니스가 어려워져서 고민이 깊어질 때, 내 맘처럼 되지 않는 자녀들 문제 때문에, 대인관계 속 어려움 속에서 풀리지 않는 신음이 깊어질 때 등 누구나 잠들지 못하는 긴 밤을 한 번 즈음은 경험하게 되지요. 사실 가장 힘든 것은 그럴 때 아무도 우리 곁에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입니다. 특히 모두가 깊이 잠든 늦은 밤에는 온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 느껴 지기 까지 하는 극도의 외로움과 고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이가 없다.’, ‘이 세상에는 내 맘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도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곁에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깊은 탄식과 후회, 그리고 불안함과 두려움에 빠져 잠 못 드는 깊은 밤을 마주하고 있는 아브람, 아무도 날 도와 줄 이 없다고 느껴지는 절망적인 그 순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오늘 밤 당장이라도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들로 인해 불안함과 두려움을 떠안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란다!” 방패는 적과 칼과 창의 공격으로부터 병사를 보호해주는 방어구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방패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원수들의 손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온 천하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친히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니 이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방패가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친히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야!”하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 상황입니까? “세상에 나 혼자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셨구나?” 라는 벅찬 감동과 ‘그래, 상황이 힘들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시지?’ 안도의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하나님을 향해 가진 감정을 표현해 보면, “하나님, 제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습니까?” 이런 반응입니다. “하나님, 지난 번에도 나 찾아오셔서 내가 가나안 땅에 오기만 하면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이 땅에만 오기만 하면 나에게 자녀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지금 제 자녀는 어디 있죠? 제가 이대로 죽으면 제 상속자라고는 여기 저희 집에서 자란 엘리에셀이란 이름의 우리 집 종 뿐입니다.” 아브람은 정직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숨김 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응답 없는 기도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하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왜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까?’ 하고 ‘무엇이 잘 못되었을까?’ 하고 깊이 말씀으로 돌아가 혹시 자신이 잘 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렇지 않다면 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고민하며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뭐, 원래 기도란 것이 응답 안 될 수도 있는 거지 뭐.”하고 쉽게 수긍하고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후자의 경우에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태도가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필요에 의해 기도는 하지만, 기도의 열매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나 소망도 없는 형식적인 기도만 남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활 속에서 성취 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상관없다는 듯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성취 되지 않는 부분들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그 고민 마져도 기도로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 하는 사람들은 결국 놀라운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분명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란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 지난 번에 저에게 해 주신 약속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걸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저에게 큰 상급 주실 것을 제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브람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반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으로부터 큰 상급 받아서 뭐 합니까? 가나안 땅으로 오면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제가 하나님 말씀만 믿고 가나안 땅에 이민 왔는데, 말씀하셨던 자녀가 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극히 큰 상급 주셔도 저는 나이 들어 이미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고, 결국 그 상급이라는 것도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식솔들이 다 물려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 속 인물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무조건 다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도 있었고 불신도 있었습니다. 사람인데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그런데 성경에 나온느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의심과 불신조차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 속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순간도 결국에는 기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심과 불신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들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우리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동물로 비유할 때 다른 동물이 아닌 양으로 비유합니다. 왜 양일까요? 양은요, 정말 미련한 동물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자기 혼자서 먹을 것을 찾아 다니지도 못합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이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 구별할 줄도 모릅니다. 목자가 푸른 풀밭에 이끌어서 먹이를 주지 않고, 물가로 인도해서 마실 것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가 양입니다. 양은 안 그래도 미련하기로 소문난 동물인데, 또 그 중에는 고집스럽고 말 안 듣는 양들도 있습니다. 목자 말 안 듣다가 결국에는 수렁에 빠져 죽기도 하고, 자기 혼자 뛰어가다가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는 양들도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 연약하다는 사실과 목자인 자신의 보호와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는 양들을 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사랑으로 양들을 돌봐줍니다.

그래서 양은 키우는 목자는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줘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양이고, 하나님은 양을 키우시는 목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양 같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연약한 아브람이 불만과 아쉬움을 이야기 했을 때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더 잘 믿을 수 있도록 그의 수준에 맞게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아, 내 집에서 기른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이 아니란다. 너와 내 아내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게 될 내 자녀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야.” 이렇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장막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아브람아, 너 하늘을 한 번 봐봐.” 깊은 밤 어둡고 컴컴한 하늘에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아, 너 저 별들이 몇개나 있는지 다 셀 수 있겠니? 너의 자손들도 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별들처럼 많아질거야.” 하나님은 친히 아브람이 의심을 거둘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그에게 약속하시며 그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사실 아브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고 당장 그의 상황이나 문제가 변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그와 그의 아내는 나이 들어 있고, 백발의 두 노인이고, 자녀가 없는 것도 기정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의지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이 장면을 보고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라고 평가 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미 자신이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이란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것이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었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입니다. 현재 내 삶 속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이 성취될 것이라 소망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의 상황 가운데 바랄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어느 영역에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비지니스의 문제입니까? 인간 관계의 문제입니까?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 입니까? 내가 봐도 이미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 “목사님, 저도 한 때는 이 문제 놓고 간절히 기도해 봤는데… 안 되는 걸 어찌합니까?” 하고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는 없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죠? 기도 응답이 없으면, “에이, 이번 판도 나가리구나?” 이런 식으로 가볍게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정직하게 반응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역사하지 않으십니까?” 아브람은 이런 정직한 반응으로 자녀를 곧바로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한 번 약속을 재차 확인 받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은 재차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자, 이번에도 아브람의 반응은 “아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시합니다. 8절 봅시다. “[15: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하나님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이 질문이 의심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인가 기대에 찬 모습에서 던진 질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만, 문맥상으로 볼 때 이 질문은 기대 보다는, 앞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하여 의구심을 던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아 보입니다.

아브람의 이 질문에 하나님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반응하십니다. [15:9-10]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읽고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하고 생각은 하지만 동시에 ‘뭐, 성경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원래 많으니 그냥 넘어가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본문을 읽고 넘어갈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과 언약을 맺고 계신 아주 중요한 장면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물들을 가지고 올 것을 명령하셨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암소, 암염소, 숫양을 (새를 제외하고) 다 반으로 쪼개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문이 아주 무시무시한 장면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땅 위에 소, 염소, 양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고, 동물들의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 땅 위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조금만 말씀을 더 봅시다. [15: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해가 집니다. 가로등 불빛도 손전등도 하나 없는 시대에 해가 지니 사방에 흑암이 가득 합니다. 아브람은 안 그래도 땅 위에 동물들 시신이 반으로 갈라져 있죠, 피가 흐르고 있죠, 어디선가 사자나 늑대 같은 짐승들이 피냄새를 맡고 달려 들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어둠 그 자체가 주는 두려움도 크게 한 몫하고 있습니다. “[15:17]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해가 지고 어둡고 컴컴한 밤에 어디선가 연기 나는 화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이 반으로 쪼개 놓은 동물 시체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오늘날 계약을 체결 할 때 계약서를 쓰지요? 계약서를 보면 ‘계약 위반 시 위약금은 얼마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런식의 조항이 있죠? 근동 고대 사회에서는 계약 체결 시 계약 당사자들 쌍방이 함께 쪼개진 짐승 사이를 걸어서 지나갔습니다. 무슨 말이죠? 어느 한 쪽이라도 이 계약을 위반 하면 죽은 짐승처럼 반드시 처참하게 죽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 창세기 15장 8절에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물어봤잖아요? “하나님, 제가 이 땅을 소유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시 근동 고대 사회의 계약 관습에 익숙했을 아브람에게 이와 같이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가는 방식으로 그와 언약을 맺으시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고 가나안 땅을 그의 소유로 주실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18절 보세요.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여기에 사용된 마지막 단어 “주노니”는 사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미 주어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가심으로써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에게 이 땅을 반드시 그의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모든 언약을 다 지키셨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아들로 주셨고, 그 이후 그 누구도 능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영적으로 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된 셈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땅을 그의 자녀들의 소유로 주심으로써 땅에 대한 언약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주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언약은 늘 쌍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셔야 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도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트리고 선악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 모든 인간은 결국 반으로 쪼개진 짐승처럼 처참히 죽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언약에 불성실 했고, 언약을 위반한 우리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쪼개진 동물 사이로 지나가셨던 주님은 이제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친히 쪼개진 동물이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은 것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언약을 위반하고 죄를 지은 우리들의 모든 죄값을 그가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지키셨고, 또 남은 언약들도 지키실 것입니다.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지키지 못할 언약을 맺은 양과 같은 연약하고 고집스럽고 악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대신 그 언약 위반 시 받아야 하는 죽음과 고통과 저주라는 죄값까지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받고 저 천국에 들어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사실 아브람이 자녀를 낳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힘으로 그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사, 그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주셨고, 그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구원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한 죽음 임을 받아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과 천국을 우리에게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