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8 먼저 여호와께 물으소서 (열왕기상 22장 1-18절)

속담 가운데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에 좋은 한약재료들은 입에서 혀를 닿을 때 그 쓴 맛이 강하여 인상을 쓰게 하지만, 사실 그 쓰디쓴 양약은 우리 몸 속 안에서 탁월한 효능을 일으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때로는 이 말씀이 탕약 한 사발을 마시는 것처럼 우리 입에 쓰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 약을 믿고 먹는 환자처럼, 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들이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은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반대로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다윗 이래 가장 선한 왕입니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왕이 오늘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두 왕이 이처럼 서로 다른데도 교제가 가능했던 이유는 두 사람이 사돈지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왕의 아들 여호람 왕자와 아합 왕의 딸 아달랴 공주가 서로 결혼한 사이 입니다.

아합은 전쟁을 통해 잃어버린 영토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에 여호사밧이 이 전쟁에 함께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이에 여호사밧 왕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평상시 여호사밧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일을 시작하기 앞서 여호와 하나님께 그 일에 대하여 물어보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소서.” 여기서 ‘먼저’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분주하게 전쟁을 위해 칼과 말을 준비하고 병사들을 소집하고 있는 아합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람 여호사밧은 주님의 응답을 ‘먼저’ 구했습니다. 비록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것이 정치적 명분으로도 옳은 것이고, 아람의 군사들이 약해져 있는 지금 이 타이밍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사밧이 오늘 이 한 장면에서만 하나님께 여쭈어 본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의 권유에 아합은 전국에 있는 선지자 사백 여명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여호와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하는 선지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말,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아첨을 전하는 아부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6절에 아합이 이들에게 길르앗 라못 전투를 할지 말지 물어보자, 400 여명의 선지자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올라 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무려 400 여명이 되는 선지자들이 합창하듯 이렇게 전쟁을 승인하니 왠만한 사람이면 무릎을 치며 “옳거니 이것은 확실하게 주님의 뜻이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달콤한 예언만큼 믿고 싶은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구동성으로 “가서 싸우십시오!”하고 말하는 이 자칭 선지자들의 말이 어딘가 신뢰할 수 없음을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예민하게 감지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 선지자들 말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아합은 ‘미가야’라 이름하는 선지자 한 사람이 남았으나, 그는 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길한 예언은 하지 아니하고 흉한 예언만 하기에 그를 미워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아합이 만나기 껄끄러워하던 선지자는 미가야 선지자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선지자를 향하여 ‘my enemy’ (나의 대적자여!)하고 부를만큼 그를 만나기 싫어했습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만나기 꺼려하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듣기 좋아하는 예언을 해주는 나머지 400명의 선지자들만 가까이 하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골라서 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겉으로는 교회 간판을 걸어놓고 십자가를 세워두었으나, 정작 그 안에서 복음이 빠져있고,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해주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한 그렇게 거짓 메시지를 즐겨 들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누군가 바늘을 가지고 그 끝으로 양심을 콕콕 찌르듯이 따끔거립니다. 비록 한 순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말씀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진리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아합은 미가야가 늘 흉한 일만 예언한다고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에 쓴 진리는 뱉고 단 맛이 강한 설탕 탄 거짓메시지를 더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달랐습니다. 그는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사밧과 아합의 극명한 대비가 나타납니다. 어떠한 일을 행하기 위한 인간적인 명분을 찾는 아합 반대로 일을 행하기 앞서 인간적인 명분과 실리보다 여호와의 뜻을 먼저 구하는 여호사밧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만 골라 듣는 아합… 비록 내 뜻과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여호사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합과 같이 인간적인 명분과 실리를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사밧처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또한 아합처럼 내가 듣기 원하는 말씀만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거북한 말씀까지도 순종하려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 없는 전통과 관습으로 살아가는 중세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당시 천주교는 베드로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타락 속에서 마틴 루터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말씀에서 벗어난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결국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하게 됩니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르게 됩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루터를 의회로 불어들이게 됩니다. 황제와 제후와 그 밖의 고급 관리들이 루터를 둘러 앉아 있습니다. 황제는 루터에게 그가 쓴 작품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협박했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종교 회의들의 권위를 수락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요.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소.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소.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소.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어떤 사본에는 “여기 내가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Here I Stand, I cannot do otherwise) 마틴 루터의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도화선에 불게 됩니다. 마침내 종교개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신앙에는 용기가 따르는 법입니다. 루터가 있기 약 2300년전 그처럼 신앙을 지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미가야’ 선지자 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른 선지자들이 아합이 실행하려는 전쟁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다고 선포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미가야는 왕의 전갈을 받게 됩니다. 왕이 보낸 사신은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들이 이미 다 길하게 예언하였으니, 당신도 “부디 길하게 예언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으로 주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미가야는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미가야는 다음과 같이말했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미가야의 단호함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그의 목숨을 걸고 고백한 ‘한 사발의 피’와 같았습니다. 아무리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사람이기에 우리 중 한 사람 같이, 칼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창 앞에서 공포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자기 목숨도 아낌없이 내어줄 용기가 있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비록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미가야’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사마리아 성에 도착하자, 왕들은 왕복을 입고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 있었으며, 광장에는 수백명의 선지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심지어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아합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할 것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자신의 말 한마디면 왕의 은총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의 말 한마디면 투옥과 매질 심지어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야는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주신 내용을 아합 왕에게 예언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17)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목자는 아합 왕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진다”는 표현은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인 아합 왕이 죽자 모든 군사들이 산에 흩어진 양처럼 뿔뿔이 흩어진 모습을 의미합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며 춤추며 노래하며 기뻐 뛰고 있는데, 미가야가 버켓으로 찬물을 들이부은 것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7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주인이 없으면 굶주림을 당하게 되고 맹수에 의하여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상을 섬기던 악한 왕 아합이 죽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오히려 ‘평안’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행한 그가 죽자 이 땅에 오히려 평안이 찾아옴을 전파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마가야의 예언을 듣고 있는 왕들과 400 여명의 선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미가야의 말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왕이 죽고 전쟁에서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예언한 미가야를 배신자요 혹은 반역자로 생각하고 분을 참고 있었을 것입니다. 미가야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하여 혹은 부와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기 위한 억압과 핍박의 대가를 그대로 받아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그러했듯이, 미가야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핍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압박과 유혹에도 휘둘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