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창세기 17장 5절)

일흔 다섯의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을 받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면 강과 산도 변화한다고 하죠? 과연 아브람의 가정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에게 자손이 주어졌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언 10년이 지났지만, 아브람은 여전히 무자한 쓸쓸한 노인이었습니다.

자녀를 갖는 것은 인간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어떤 부부들은 자녀를 갖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하지만, 끝내 그 태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새생명의 탄생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생명의 탄생은 신비입니다. 시편 127:3절을 보면 (시편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즉, 새 생명의 탄생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우리 교육부 아이들, 우리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이유는 이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귀한 상급, 곧 자녀의 축복을 아브람과 사래는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커다란 문제는 이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기다리던 아이가 아니라, 자녀를 별과 같이 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기다리던 아이임에도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10년… 봄, 여름, 가을, 겨울 무려 10번이 가야 합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죠. 우리가 만일 무언가 간절히 기도하고 “이건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지.”하고 기도하는데 10년이 지나도 기도가 이루어질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낙심될까요? 아브람도 그 지난 10년 동안 주변에 자녀 낳는 부부들을 얼마나 많이 봤을까요? “아니 하나님, 나한태는 별과 같이 무수한 자녀를 준다고 약속해놓고 전혀 아무런 소식도 없으시고 어떻게 저 가나안 사람들만 저렇게 자녀를 주십니까? 이거 너무 하신거 아닙니까?” 이런 마음이 들진 않았을까요?

성도라면, 누구나 이처럼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 응답 없는 기도를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낙심이 찾아옵니다. “이거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구나…기도해도 별 거 없구나…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나 보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에 대한 의심이 찾아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으니 연약한 마음에 의심의 먹구름이 찾아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조금의 변화 없이 그대로 흘러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는 전혀 다른 운명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바로 이 때 내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게 맞는 것 같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급합니다. “어? 왜 하나님이 안들어주시지? 지금이 제일 좋은데? 이 때 아니면 안되는데? 어어?” 그러며 불안해하며, 자신의 타이밍이 지나가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응답 없는 기도에 낙심하기까지도 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기도해 보신 분들은 이러한 경험들을 많이 해 보셨을 거에요.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보시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좋은 타이밍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겐 ‘시간’이란 단어가 하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신약성경에 쓰인 그리스어에는 ‘시간’이란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때, 그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 갈라디아서 4:4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특별히 예비하신 때 카이로스 바로 그 때 그 정해놓은 시간이 되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지요. 다윗도 17살의 젊은 나이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도대체 언제 왕이 될 것인가 기다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왕이 안되는 거에요. 오히려 도망자 신세, 블레셋 왕 앞에서 침 흘리며 미친 적 하는 수모만 당합니다. 그러나 무려 13년이란 시간이 흘러 그가 서른이란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정해놓으신 때 즉 ‘카이로스’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지요.

이처럼.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 인간의 역사 즉, 크로노스만을 놓고 생각하면 우리가 원하는 때에 기도제목이 이뤄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크로노스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 응답이 더딘 거 같고…느린 것 같고 때로는 아예 안 이루어지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타이밍’을 알고 계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허락해주시겠지 하는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때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를 아시는 하나님의 크로노스, 하나님의 시계를 신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르자 아브람의 마음에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야, 이거 나이는 더 들고..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왜 이리 자녀가 안 생기지? 뭐가 문제지…?” 이런 조급함과 불안감을 가졌던 아브람은 문제인식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아내 사래가 그에게 찾아와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십시오. 그녀가 당신에게 아들을 줄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자가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임인 자신의 아내 사래를 보며 아무래도 사래가 아니라 다른 여자일수도 있겠구나….하고 스스로 타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기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죠. 성경을 구석구석 찾아봐도 이 중대한 사항을 앞두고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물어보거나 기도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게 과연 맞을까요? 정말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일까요?” 전혀 이런 장면이 없습니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치 못하고 타협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더디고 느린 것 같아 보여도 인내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을 더디하심으로 우리의 참 믿음을 보고자 하시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미쳐진 결과를 보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타협한 아브람…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자 그의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오게 됩니다. 여종 하갈이 자기는 아들을 낳았는데, 여주인 사라는 아이를 못 갖는다고 무시합니다. 사라가 매일 밤 이 일 때문에 눈물 흘리고 아브라함에게 저 여종을 내쫓으라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불화가 찾아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택한 방법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을 더 일으킵니다. 우리 나라 말로 ‘긁어 부스럼’이라고 하죠? 가만히 두면 그래도 버틸만한데 괜히 건드려서 더 커지는 거에요. 마치 십대소녀가 얼굴에 난 여드름을 계속 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보기는 너무 싫고 어떻게든 없애고 싶은데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어떻게 되요? 더 커지는 거이지요. 아브람으로 인해 잉태한 여종 하갈이 그 여주인을 무시합니다. 그로 인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큰 고통을 받습니다. 아브람과 사래 두 부부 사이도 나빠집니다. 아내 사래가 ‘이게 다 당신 탓이야.’ 하며 아브람을 원망합니다. 우리들도 너무 많은 경우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보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따라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사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어느새 우리의 지혜와 판단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질문 한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지금 내가 선택하는 이 방법이 인간적인 방법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인지 분별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양심을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방법을 선택하려고 할 때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건 정직하지 않아.. 이건 잘 못된 길이야…”하고 마음의 신호가 온다면 그것은 우리 양심이 지금 내가 가려 하는 길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이라 알려주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 생각에는 이 길이 좋은 것 같은데, 주님께서도 허락하시는 길입니까?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말씀을 읽는 가운데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내가 고민하는 바에 왠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느낌을 주는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내게 이야기하고 계신것이지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나오죠? 여러분 이 말씀에 ‘등’은 오늘날의 후레시라이트가 아니에요. 우리 옛날에 흔히 말하는 호롱불이라고 해서 이렇게 사각형 틀 안에 있는 촛불인 것이지요. 내 발에 등이라 했을 때 그것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한 발자국을 앞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등만 있으면 어디든지 발을 헛디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인지 인간적인 선택인지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타협하자 하나님께서는 긴 시간 동안 침묵 하셨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본문 창세기 17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7:1)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람은 몇 살이죠? 아흔 아홉살입니다. 그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 그는 여든 여섯살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무려 지난 13년 동안 침묵하시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고 지난 13년간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한 채 그렇게 1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살이 되던 해에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람을 갈대아 우리에서 부르셨을 때 그가 일흔 다섯이었으니 무려 25년이 지난 것이죠. 그 동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에게 자녀를 줄께. 너의 자손들이 별들과 같이 무수할 것이야.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을 것이야’와 같은 약속들을 이미 여러 차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25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람이 자녀가 있어요, 없어요?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25년이나 지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들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해석했나? 어떻게 이렇게 안이뤄지지? 이 정도 오래 지났으면 정말 안되나보다…”하며 깊은 한 숨을 쉬며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아브람도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전혀 이루어질 기미가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 지쳐있진 않았을까요? 오늘 그런 아브람에게 다시 한 번 본문 1절을 보니 하나님은 스스로를 무슨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계세요? 나는 무슨 하나님이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엘 샤다이”가 됩니다. 찬양 제목으로도 쓰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 입니다. 25년간 약속을 전혀 이뤄주신 하나님은 왜 오늘 스스로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아브람이 아직 무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목적과 뜻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99세가 될 때까지 자녀를 주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1절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아브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첫 번째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 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이를 것처럼 살아가는 삶. Walk before me. 쉽게 설명하면 ‘코람데오’ 입니다. (학교에서 감독이 없다. 시험 볼 때 칠판에 이 네 글자를 쓰고 나간다.) (비즈니스하면비 회계장부 작성할 때 이중장부 만든다… 왜 그러지?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해서… ) ‘아무도 안 보는데 어때? 누가 알겠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삶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니야, 그래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그래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지…’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하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아 ‘이 세상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도, 너 만큼은 코람데오로 살아가라. 너 하나만큼은 내 앞에서 완전하여라.”하고 그에게 강권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두 번째 명령은 완전하라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be blameless” 사실 이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레위기 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드릴 때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이 ‘완전하다.’ “be blameless” 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삶에 영적 정결함. 영적 거룩함을 요구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라.” “너는 완전하라” 요구하신 주님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2절 말씀을 우리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17:2)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오늘 이 2절에는 원어성경에는 있으나 한글성경에 빠진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NIV에도 나오지 않고 혹시 ESV 나 KJV 성경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볼 수 있습니다. 바로 2절에 “And”라는 접속사 입니다. 이것은 사실 ‘그리하면….’의 조건절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절 말씀을 1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아브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 너는 완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새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99세가 될 때까지 자녀를 주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람의 신앙과 성품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더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Be blameless 할 수 있도록 자라나도록. 지난 주일 말씀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성숙케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자라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내 삶에 벌어지는 문제와 상황 앞에서는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까?”, “과연 이 어려움 속에서 나는 구원 받을 수 있을까?’ 교회 와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고백 하지만 일상 속으로 돌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뤄지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불신”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be blameless” 흠이 없게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문제들은 언제 해결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날 때 비로소 해결됩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인간적인 방법으로라도 자식 얻는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지도 무려 13년이나 더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만약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나타나셔서,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일에 대하여 “아무개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야.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렴. 너의 마음 속 죄에서 돌이켜 완전히 행하렴.” 하고 이야기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브람은도요 지난 한 때는 하도 아들을 안 주시니까 뿔이 나서 하나님께 다소 뾰루퉁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이야기 한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아들을 안 주십니까? 그럼 내 종 엘리에셀이나 내 상속자가 되겠네요?!”하고 막 하나님께 대들었어요.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마음 속 자리 잡은 ‘불신’을 제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아들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영혼을 다루셨습니다. 시간이 가고, 긴 세월을 지내면서 아브람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내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내가 주님 앞에 완전하게 행하기를 원하고 계시구나?” 이번에는 예전처럼 경솔히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말 대신에 자신의 온몸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의 처음 두 단어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미국 속담 중에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그 사람의 진심을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무려 99세나 된 노인이 그 불편한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 몸을 굽혀 땅에 꿇어 앉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숙이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는 뜻입니다. 비록 그가 소리 내어 말은 하지 않았으나, “네, 하나님. 네 하나님 네 하나님”하고 아브람이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의 반응. “네 하나님, 더 이상 하나님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불신하지 않고, Be blameless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몸을 굽혀 고백하자,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람이 그토록 원하던 삶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문제와 상황을 다루기 전에 먼저 우리 믿음과 영혼의 태도를 다루십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17:4)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오늘 이 약속은 결코 새로운 약속은 아닙니다. 십여 년 전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여주시며 “저 별들을 세워보아라 네 자손이 그처럼 많아 셀 수 없을 것이다”허고 약속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 살이 되자, 스스로 또한 자기 아내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난 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갈 줄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주신 약속을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오늘 아브람에게 더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그의 언약을 구체화 햐셨을까요? 우리 5절 말씀도 읽도록 하겠습니다. (17:5)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여러분 아브람이 인류 역사상 첫 개명자라는 사실 알고 계셨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개명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서두에 이름은 그 사람의 특징과 존재를 정의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이름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변경된 것. 그것은 단순히 이름 글자 하나가 더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이 변화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비록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나, 그의 이름이 변화했을 때 그의 전 운명이, 그의 전 인생이 변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란 이 이름에는 ‘많은 무리의 아비’(“a father of many nations.”)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99세의 노인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전혀 이뤄질 것 같이 않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확실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아브람의 이름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 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기에 불가능한 상황을 뒤집으심으로써 자신의 전능하심과 살아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기도할 때면 자주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하면서도, 정작 일상 속에 돌아가서 우리 삶 속의 문제들과 고민들을 대할 때면 ‘하나님이 이건 못 해 주시겠지…’하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불신의 마음들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의 의심을 깨뜨리고 “Be blameless”,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서 있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브람도 얼마나 하나님을 못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 소개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의심의 먹구름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 앞에서 행하며 불신의 먹구름을 제거하기 위한 영혼의 몸부림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흔 아홉 살에 여전히 무자했던 아브라함처럼 여전히 무엇 하나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따라 이루어진 것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99도에 끓지 않고 100도에 끓습니다. 100M 경기의 금메달은 99M를 간 사람이 아니라 100M를 완주한 사람에게 주워집니다. 99%만 믿음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실 것을 100% 확실하게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면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귀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