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장 1-16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면,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지 어느 새 10년이 지났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긴 시간 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예순 다섯의 나이에서 이제 일흔 다섯의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의학 연구 자료에 의하면, 여성의 몸은 20대 후반 까지가 임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30세가 되면 그 가능성이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30대 중반이 되면 그 감소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됩니다. 45세가 넘어가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임신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라의 나이는 일흔 다섯 입니다. 그녀도 자신이 아이를 낳기 불가능한 나이라는 것을 스스로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사라는 간절히 자녀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고, 반대로 자녀를 갖지 못하는 것은 불명예와 수치의 표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라가 일평생 간직하고 살아갔을 마음 고생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녀도 일평생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낳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녀의 바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일흔 다섯이라는 노년에 접어들자 사라의 마음은 더욱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감쌌습니다.

우리는 사라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됩니다. 그녀가 하나님께 자녀를 달라고 먼저 요청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1년, 3년, 5년도 아니고 10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기는 커녕 아기 울음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사라의 마음이 낙심이 찾아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삶 가운데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나에게 이런 큰 고통이 찾아 왔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라도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겁니다. “왜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을까? 내가 하나님께 크게 무엇을 잘 못한 것이 있나?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태의 문을 닫으셨을까?” 이러한 생각은 억울함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주변의 다른 여인들은 하나도 아니고 둘 셋 혹은 그 이상 자녀들을 순풍순풍 잘 낳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하나도 안 주시니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도덕적으로 무언가 큰 결함이 있거나, 영적으로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데, 이런 상황에 다다르니 더더욱 억울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돌아 보지 않으시나?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시나?” 생각에 생각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근심과 염려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사라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탓이다.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잉태치 못하도록 나를 막고 계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늘 본문 2절에 사라가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여보,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소외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자녀를 가질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오늘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라의 목소리 톤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실망과 울분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을 겁니다.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무려 1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려 왔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에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임신하지 못하도록 막고 계신 것이라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 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지쳐 불신의 상태에 접어든 적은 없습니까? 아니면 혹시 요즘 불신의 상태에 머물러 계시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라를 이런 불신의 상태에 이르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조급함’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10년이나 기다려 온 사람에게 ‘조급했다’라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말한 ‘조급함’이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조급함을 가리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사라에게 있어서 그녀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되기를 기다릴 수 있는 한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10년 뒤에 자녀 줄께!” 라고 선을 긋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사라가 자기 스스로 “10년이 되었는데도 안 주시면 진짜 안 주시는 거다.”하고 하나님 말씀이 성취 될 한계선을 정해 놓고, 그 때까지 이뤄지지 않자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죠. 우리도 사라처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타이밍을 미리 다 정해 놓고,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며 실망합니다.

10년이 지나도 자녀가 생기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6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6:1-2]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당시 아브라함의 시대인 고대 사회에서는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내의 여종을 자신의 둘째 부인으로 취하여 그녀를 통하여 아들을 낳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라는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이 자녀를 갖기는 하겠으나, 자신은 약속에서 배제 되어 있기에 그녀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사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직접 자녀를 갖는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당시 사회에서는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 아내의 여종을 둘째 부인 삼아 자녀를 갖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기에 아브라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찬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계획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내놓은 그녀의 모략은 오히려 사라의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여종 하갈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여종 하갈은 아브라함의 자녀를 임신함으로 인해 불임을 겪고 있는 사라보다 자신이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고, 아브라함 집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사라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것이죠. 또한 하갈은 자식을 낳음으로 자신이 여주인 사라보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총애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주인인 사라가 비천한 애굽 종이었던 하갈에 의해 멸시 당한다는 것은 매우 큰 수치였습니다. 사라가 조급한 마음에 결정한 잘못된 선택이 그녀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온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 바로 ‘기다림’입니다. 제가 여기서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감나무 밑에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요, 내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여도, 그 보다 더 완벽하신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4-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24-26]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전문 산악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산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읽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조난당한 현장에서 죽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 마을 가까이에 내려 와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마을 근처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죠. 어두컴컴한 산속을 헤매다가 더 이상 살아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추위 또는 굶주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이 하는 조언은 조난을 당한 경우 버티다가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앞으로 딱 30분만 더 버티자”는 마음을 갖고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산악에서는 구조를 기다리며 버틴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이것을 신앙생활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린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기다림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무려 25년을 기다린 아브라함, 십대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 이뤄질 것을 기다린 요셉, 기름부으신 대로 왕이 될 것을 기다리며 도망자로 살아갔던 다윗, 메시아를 기다리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이처럼 성경은 기다림이란 주제로 가득합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자들은 비록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시편 40편 1절 입니다.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우리는 아무 근거 없는 헛된 기다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될 것에 대한 기다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사 반드시 그가 하신 약속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정해 놓은 타이밍이 지났다고 조급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라는 하갈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사라의 조급한 결정이 결국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주게 된 것이죠. 여주인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여종 하갈은 결국 사라 몰래 도망쳤습니다. 사실 임산부인 하갈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는 순간 그녀는 먹고 살 길이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누구도 그녀를 돌봐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 사라의 학대가 날로 날로 심해지자 견딜 수 없어 결국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하갈은 애굽 사람이며 여종입니다. 당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물건 취급 당하던 시대 입니다. 여종 하나가 광야에서 죽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애굽 여종 하갈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말씀하십니다. “하갈아,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라.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11절 봅시다.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앞서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태의 문을 닫으셨고, 자신에게 이 모든 고통을 더하고 계신 주체자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하갈에게 그녀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애굽 사람 여종이었던 하갈이 고통 당하는 모든 모습을 보고 계셨고, 그가 고통 속에서 내뱉은 부르짖음도 다 듣고 계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의 고통을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사라의 불신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우리 삶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하갈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하나 봅시다. 13절말씀을함께 읽겠습니다.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주님은 나를 보살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광야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그녀는 이제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다 느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하갈은 일개 미천한 여종에 불과한 자신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신 것과 말씀해 주시고, 그녀에게 큰 약속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격하였습니다. 13절의 고백은 하갈의 감격 속에서 나온 고백 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그녀를 학대한 여주인 사라가 있는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16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조급함에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된 사라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실망하여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로 도망친 하갈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보살펴 주고 계십니다. 내가 계획했던 때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다 성취 되지 않아도 끝까지 믿음으로 약속을 붙잡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기다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미래의 일로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바라보는 것만을 기다림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아직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고, 빨리 지나가야만 하는 시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현재라는 이 시간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르익어 가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집에서 식물을 키워 보신 적 있으십니까? 씨앗을 화분에 심었습니다. 태양 볕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두고, 물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씨앗이 몇 시간 내에 발아하여 줄기가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 씨앗이 발아하여 줄기는 내는지 육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씨앗이 발아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흙을 다 파헤쳐 버리면 식물이 죽게 됩니다. 씨앗이 가진 생명력이 반드시 싹틀 것이란 믿음을 갖고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던 타이밍에 기도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대나무는 심어 놓고 물과 거름을 줘도 좀처럼 자라나질 않습니다. 무려 4년 동안 물과 거름을 줘도 전혀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5년째에 접어들면 그 때부터는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게 됩니다. 5주일 동안 나무 높이가 무려 27m 나 자라납니다. 4년 동안 27cm 도 안 자라다가 5년째 되는 해, 무려 27m 씩 쭉쭉 자라자는 것이죠.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이 대나무는 5년 동안 자란 것입니까? 아니면 5주 동안 자란 것입니까? 당연히 5년 동안 자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5주만 물과 거름 주면 대나무는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다림이 힘든 이유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 우리가 초조해 지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지루함과 좌절감도 맛보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임계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면 물리 현상이 갈라져서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계의 값”을 임계치라고 합니다. 좀 어려운 설명 같습니다만, 이해하기 쉽게 말씀 드리면 주전자에 물을 담아 열을 가하면, 95도까지는 끓지 않다가 물이 100도에 이르게 되면 끓기 시작합니다. 물의 경우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온도 100도가 물의 끓는점 곧 임계치인 셈이죠. 앞서 대나무의 임계치는 5년인 셈이고요.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약속이 성취될 임계치를 비밀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언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될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때가 가장 좋은 때이며,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 합니다.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약속이 성취 되는 임계치를 비밀로 하셨을까요? 왜 우리로 하여금 측량치 못하게 하셨을까요? “너 앞으로 100일간만 특별새벽예배 해라! 그러면 내가 너 기도 응답해 줄께!” 이렇게 정해 놓으시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편하겠어요? 안 그래요? 또 얼마나 열심히 100일간 기도하겠습니까? 그쵸? 그러나 만일 약속이 성취 되는 임계치를 사람이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100일간 얼마나 열심히 기도 했는 줄 알아? 이거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받은 거야!” 이처럼 자신의 힘이나 공로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성취될 것인지, 그 영적 임계치를 모르고 살아갈 때 인간은 비로소 겸손하게 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살 수 있구나?” 이와 같이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역사 하시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더딜지라도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말을 기다림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의인은 그의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오늘도 기대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 곧 그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