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2.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 시리즈 (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요한복음 17장 1-9절)

 

포인트: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인도합니다.

지난 1501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조각가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인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시청의 요청에 따라 성경 인물인 다윗의 조각상을 제작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상을 만드는데 무려 3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조각상은 크기가 무려 17 피트 (대략 5m 20 cm) 이나 됩니다. 이 조각상은 올해로 522년이나 되었습니다. 피렌체에 있는 이 다비드 조각상 하나를 보기 위해 찾아 오는 방문객이 1년에 200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비드 조각상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조각상의 크기를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26살 밖에 안 되었던 젊은 청년이었던 미켈란젤로가 하얀 대리석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디테일을 공들여 깎았는지 감탄하는 것이죠. 사실 사람들은 다비드 조각품을 보고 있지만, 조각품이 아니라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를 향해 감타하고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비드 조각품을 보고서 미켈란젤로를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재적인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의 손에서 다비드 조각상이란 놀라운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들을 가리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처럼 성경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나 조각상과 같은 예술 작품들 앞에 화가나 조각가의 이름이 붙여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든 이: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의 역량과 능력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인도합니다.

만일 지금 어떤 사안을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분별하고 계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물어보기 바랍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만일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 먹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인도합니다.

 

  1.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각자의 life plan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세워 둔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내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 계획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남자가 여행을 하다가 깊은 숲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로 갈까?” 생각하던 남자는 문득 지난 주 주일예배 때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아, 그래! 내가 원하는 대로 가지 말고, 한 번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해 보자!” 그리고는 잠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중앙에 세워 놓았습니다. “하나님 지팡이가 오른쪽으로 쓰러지면 제가 오른쪽으로 가고,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면 제가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보기에 넓고 편해 보이는 왼쪽 길로 가겠다고 결정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지팡이가 남자의 뜻과는 다르게 오른쪽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줍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무언가 실수가 있는 듯 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만 더 해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지팡이를 가운데 세워 두었는데, 이번에도 지팡이가 오른쪽으로 쓰러졌습니다. 이 남자는 또 다시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잡아 세웠습니다. 언제까지 했을까요? 지팡이가 왼쪽으로 넘어질 때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왼쪽으로 지팡이가 쓰러지자 “그렇지! 주님의 뜻은 왼쪽이 맞지?!”하고 기뻐하며 왼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넓어 보였던 왼쪽 길은 금새 좁고 험난한 길로 바뀌었습니다. 더 가다 보니 더 이상 갈 수 없는 늪이 나왔습니다. 결국 이 남자는 실망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남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분명 인도하심을 구했잖아요? 하나님 지팡이가 분명 왼쪽으로 쓰러졌잖아요? 이건 하나님 책임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들도 때로는 이 남자처럼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다 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마음을 유혹하는 세상 것들에 눈이 멀어,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내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물찾기 하는 것처럼 어려운 곳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 뿐입니다. 우리가 탐심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뜻을 구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벽하신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린 조지 뮬러는 평생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6가지 단계를 정리해 놓았습니다. 한 번 우리도 조지 뮬러의 6가지 단계를 따라 우리들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점검해 봅시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해 나의 의사가 개입하지 않도록 마음을 비웁니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소망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합니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한 뒤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합니다. 이때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합니다.

조지 뮬러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6가지 단계 중 첫 번째가 자신의 의사를 개입하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즉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내 생각과 내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삶,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과 나누신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새끼 손가락 끝에 가느다랗고 조그마한 나무 조각 하나만 박혀도 아파서 그대로는 일상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든 손가락에 박힌 나무 조각을 빼내야 합니다. 하물며 큰 못이 손목과 발목을 뚫고 우리 몸에 박힌다는 것은 얼마나 아픈 통증일까요? 또한 손목과 발목이 못에 박힌 채, 과다 출혈 증상을 느끼며 괴롭게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고통은 상상하기 조차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해서 십자가의 고통이 즐겁고 기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의 고통은 고통이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John 17:4, ESV] I glorified you on earth, having accomplished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십자가의 길은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주어집니다. 성난 군중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조롱 당한 후 천천히 죽음에 이르는 저주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알고도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택하심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교의 길, 죽음의 길을 택할 정도로 극적인 상황이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택하려고 할 때 사람들의 반대나 비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희생과 손실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하여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옳은 길이요, 하나님의 길임을 알고도 그 길을 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옳은 길을 택하자니, 희생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고, 고통과 아픔이 너무 큰 것이 예상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때 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순종할지 말지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께 충실히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구약시대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방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기 직전 활동했습니다. 나라가 적국의 침략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땅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땅은 적국에게 넘어가면 끝이지만, 땅을 팔아 받은 금화는 언제든지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그의 사촌 하나멜이 찾아왔습니다. “예레미야 너 나한태서 밭 안 살래?” 하나멜 역시 조금있으면 남방 유다가 곧 바벨론의 손에 의해 없어질 것을 알고, 얼른 땅을 팔아 현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죠. 멍청이가 아니고서는 당장 멸망 직전에 처한 왕국에서 인정하는 땅문서를 거금을 드려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순순히 사촌 하나멜에게서 밭을 사들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상황만 봤을 때는 땅을 안 사는 게 맞아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밭을 돈 주고 사라고 하세요. 예레미야도 선지자지만,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보니까, 계산기를 쳐 보니까 이거 손해 보는 장사거든요. 예레미야 입장에서도 의구심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누가 나라가 이방 민족에게 멸망하기 직전에 거금을 드려 땅을 삽니까? 이럴 때는 현금이 최고죠. 이제 나라가 멸망하면 땅문서가 휴지조각이 될탠데요!” 예레미야 32장 25절 말씀 봅시다. “25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선지자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6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예레미야야, 지금 너에게 이 일을 명한 자는 나 전능한 하나님이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있느냐? 나를 믿으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말씀하셨고, 예레미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서 한 순간 가졌던 의구심을 모두 극복했습니다. “아차, 지금 나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 내 주님 그럼 제가 이 땅을 제 사촌 하나멜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훗날 모든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예레미야의 결정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결정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에 자꾸 의구심이 들어 그 길을 차마 택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지 마시고,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1. 우리가 직면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2. We glorify God when we are faithful to obey Him despite opposition we may face.)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뜻이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직면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 앞에 붙잡혀 왔습니다. 왕은 크게 화를 내며 지금이라도 금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오르는 풀무불에 그들을 던져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호하게 왕 앞에서 말했습니다. “임금님, 우리가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우리를 불 속에 던지셔도,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기를 반대하자, 왕은 주저함 없이 그들을 극렬히 타오로는 풀무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사, 그들의 옷이나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죽음까지 이겨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걸아가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장 아끼는 옥합을 깨트려 최상의 것을 주님께 바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움켜쥐고 내려 놓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독자 이삭을 내려 놓겠습니까? “주님 주실 때는 언제고 또 도로 데리고 가십니까?” 사실 자식이 10명이 있다고 해도, 그 중에 하나 바치는 것도 “하나님, 안 됩니다!”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하고 부모는 말할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짜 이삭이 필요해서 그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는 길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는 내 생각과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데, 기도하고 말씀으로 분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는 것이야 말로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며, 동시에 우리 삶에 가장 복된 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사람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한 뜻이 있으실거야.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 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주님 믿음으로 한 번 그 길을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성품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반대와 희생이 있어도 주님의 뜻임을 확신하기에 그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합니다.

지난 1월 영국에 있는 전문 경매업체 서더비즈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작가가 그린 남자의 초상화를 경매에 올렸습니다. 그림 제목은 “깃펜과 종이를 가진 젊은 남자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은 매우 평범합니다. 1500년대 살았을 법한 남자가 그 당시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한 손에는 종이를 한 손에는 깃펜을 들고 있는 그림입니다. 낙찰 예상 가격은 500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경매 시작 5분 만에 그 두배가 넘는 천만 달러 이상에 팔렸습니다. 알고 보니 경매에 나오기 전 경매업체 서더비즈의 실험실에서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복원 되는 중, 조사를 해보니 이 작품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브론지노]라는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죠. 그림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느 화가에 의해 그려진 작품인가?”에 따라 그 가치가 엄청난 차이를 보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당장 우리들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들의 인생은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가장 은혜롭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