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1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방박사들 (마태복음 2:1-12)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별을 관찰하는 ‘점성술사’ 또는 ‘천문학자’입니다. 어느 날 동방박사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연구하다가 왕의 탄생을 예견하는 특별한 별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 커다란 별에 이끌려 멀리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이 사람들을 ‘동방박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멀리 동쪽 방향에 위치한 페르시아 땅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별을 보고 세상의 흐름을 읽는 점성술이 발달하였으며, 이들 역시 별을 연구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온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요?

페르시아와 팔레스타인 사이에 펼쳐진 길은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약 1600 km이고, mile로 환산하면 약 1000 mile 정도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 정도 길을 가려면 고대의 이동 수단이었던 낙타를 타고도 40일이 넘게 걸립니다. 이들이 지나온 길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 길이었으며, 뜨거운 해가 쉴 새 없이 내리쬐는 광야 길이었습니다. 물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다음 마을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늘 먹을 것을 아껴서 먹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언제 도적떼가 출몰할지 몰라 늘 경계해야 했으며, 사나운 짐승 떼가 공격해 올 것을 늘 대비해야 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밤에는 추위로 인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 속에서 벌벌 떨어야 했으며, 한 낮에는 반대로 109도가 넘는 폭염과도 같은 날씨 속에서 사막 길을 헤치고 와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동방박사들이 이스라엘에 온 것이 마치 옆집 놀러 가 듯 쉽게 왔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들이 지나온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큰 별의 인도를 따라 새로 탄생한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40일 넘는 먼 여정 길을 왔습니다. 그 험난한 길을 뚫고 죽음의 길을 통과하여 동방박사들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세습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즉 아버지가 왕이면 그 아들이 또 왕이 됩니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은 새로운 왕 역시 당연히 현재 왕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황제와의 친분을 통해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성격의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고대 왕들은 주변 인물들에 의해 독살 당하기도 하고 암살 당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헤롯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에돔 족속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이 되었으니, 헤롯은 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누군가 그의 왕권을 노리진 않을까 불안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왕권을 노리거나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헤롯 왕이 어찌나 무자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그의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아내인 마리암느를 죽였고, 자신의 어머니 엘렉산드라를 죽였으며, 자기의 장남 안티파터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들도 자기의 왕권을 위협이 된다고 여기고 그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쯤 되니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어거스투스는 이러한 헤롯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헤롯의 아들 되는 것보다 더 안전하겠다.” 헤롯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헤롯의 아들보다 더 안전하겠다고 조롱투로 말한 것이지요. 이처럼 헤롯은 잔인한 폭군이요, 왕권에 대하여 병적으로 집착하는 미치광이 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나 먼 페르시아에서 별을 보고 온 동방박사들이 그를 찾아와 새로 태어난 왕을 알현하려고 왔다고 인사 했을 때 얼마나 성이 크게 소동 했을까요?

마태복음 2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2:1, 개정)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 2:2, 개정)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3, 개정)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동방박사들은 왕궁에 도착하여 그들이 먼 페르시아에서 온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 분에게 경배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 왕에게 새로 태어난 아들은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 왕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자기의 왕위를 지키려 아내와 어머니와 아들들까지 아끼지 않고 잔인하게 죽인 헤롯. “이제 더 이상 내 왕위를 빼앗을 자가 없겠지!”하고 안심하고 있던 그에게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헤롯 못지 않게 주변 사람도 깜짝 놀랐습니다. 안 그래도 그들의 왕이 폭군인 걸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의 왕권을 빼앗으려는 자가 나타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죽여버리는 헤롯 왕… 동방박사들이 와서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고 있으니 왕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번에는 왕의 불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3절 말씀에 보니, 헤롯 왕 뿐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소동하였습니다.

고대 문헌들을 찾아보면 이미 당시 동방박사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내에 살고 있는 많은 학자들과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성술사들 사이에서는 ‘유대 지역에서 세상을 다스릴 왕이 나올 것이다!”하고 예측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는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안 그래도 헤롯 왕은 이런 괴담과 소문들 때문에 불안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헤롯 왕 앞에 동방박사들이 나타나 “새로 탄생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은 것이죠. 온 성에 불길한 긴장감과 불안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2:4, 개정)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헤롯 왕은 혼혈인입니다. 반은 에돔 사람이고 반은 유대인입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헤롯도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당대의 성경전문가인 대제사장들과, 전국성경고시에서 장원 급제한 서기관들을 급하게 한 자리로 불러 모았습니다. 헤롯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 곧 동방박사들이 말하는 왕이 어디서 태어나게 될 것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고개가 갸우뚱거릴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헤롯이 메시야가 탄생할 장소를 찾기 위해 성경연구팀을 꾸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와 부합한 인물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묻습니다. 이처럼 다급한 헤롯 왕의 질문에 대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대답이 5-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 2:5, 개정)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 2:6, 개정)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했습니다. 미가 5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미 5:2, 개정)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서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약 700여 년 전의 기록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피지배 민족들로부터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등록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셉은 당시 만삭이었던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을 떠나 자신의 본적인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 있는 동안에 마리아의 양수가 터져 아기 예수님께서 미가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만약 로마 황제가 천하에 호적 등록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베들레헴에서 호적 등록하던 날이 아니라 나사렛에 돌아가서 마리아의 예수님을 낳았더라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만삭인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던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참 힘든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 하필 마리아가 만삭인 이 때 로마 황제가 호적 등록 명을 내려서 우리가 이처럼 추운 날씨에 힘들게 베들레헴에 내려가야 하지?” 또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입장에서도 보면 만삭이고 언제라도 아이가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먼 길을 가야 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가장 예민한 시기인데, 아기 낳으려고 집도 방도 다 정리해 놓았는데 어째서 내 아기가 이런 누추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났어야 하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아기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아버지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장거리 길을 가고 싶었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느 어머니가 금과 옥 같은 자기 아들을 마구간에서 낳고 싶고, 말과 소의 침이 묻어 있는 구유에 눕혀 놓고 싶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던 것이죠. 하늘을 나는 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인생 역시 하나님의 선한 섭리 안에 있지 않겠습니까?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추운 날씨에 먼 베들레헴 여정을 가야했던 요셉처럼, 사랑하는 첫 아이를 낯선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던 마리아처럼 지금 우리 삶에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지?”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벽하신 계획이 우리 삶을 붙들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지금 당장에는 내가 당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이해가 안되고 불만스러운 환경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제가 왜 하필이면 지금 여기서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더 좋은 곳, 더 좋은 환경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까?” 혹시 오늘 이 자리 가운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힘들고 어려우면 가장 먼저 환경을 탓하고 내 주변 사람을 탓하게 됩니다. “왜 나는 가난한 부모를 만나 이렇게 고생 했어야 했나?” “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왜 이 웬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왜 하나님은 내가 있고 싶지 않은 이곳에 나를 두고 계신가?” “하나님은 이것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처한 상황들이 눈에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만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황이 지금 당장은 내 머리로 이해 되지 않아도…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억울함이 지금 당장은 내 가슴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이 한 가지 확실한 진리를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디 가는 것 같아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시기에 우리의 느림이 세상의 빠름보다 빠릅니다. 우리의 인생이 조금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조급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시기에 기적은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장소에서 잉태됩니다. 삶이 뒤로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괴로워하거나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시기에 오늘의 1보 후퇴는 내일의 2보 전진입니다. 넘어져도 포기하지 맙시다. 때로는 삶이 추락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깊이 내려가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법입니다. 삶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도 불안에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붙잡고 계시기에 현재의 ‘역경이’ 뒤집혀 신앙의 ‘경력’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내 상황과 처지가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고 가슴으로 용납하기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믿고 인내하다 보면, 아침 안개가 걷히고 나면 선명하게 보이듯이, 어느 날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가 하게 보이게 되는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아, 하나님은 내가 보지 못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구나? 지나고 보니 그 때 그것이 다 필요했던 시간이었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컸구나?” 하고 고백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을 토대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헤롯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미가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왕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백성의 목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의 보고서를 받은 헤롯 왕은 더 큰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모술수에 능한 헤롯 왕은 간교한 꾀를 냅니다. 7-8절 말씀을 봅시다. “(마 2:7, 개정)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 2:8, 개정)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7절에 헤롯이 ‘가만히’ 동방박사를 불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들 따로 불러서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말했습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시오.”하고 말하며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검은 속내는 동방박사들로 하여금 먼저 아기를 찾게 하고 그 이후에 장차 왕이 될 그 아기를 반드시 죽이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 왕으로 태어난 자가 왕궁에 없음을 알게 된 동방박사들은 어리둥절 했습니다. 그들은 막상 왕궁을 떠나 다시 새롭게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찾기 위한 길에 나섰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먼 페르시아에서 더위와 추위를 견뎌내고 광야와 사막 길을 힘겹게 이스라엘까지 왔는데, 이제는 왕은 보지 못하고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9-10절 말씀을 봅시다. “(마 2:9, 개정)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마 2:10, 개정)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던 동방박사들 앞에 그들을 이곳까지 인도해주었던 그 큰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별은 문득 앞서 가서 그들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 인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별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었습니다. 먼 길을 힘들게 와서 태어난 왕을 보지도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뻔했는데, 다시 나타난 별이 왕이 태어날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10절 말씀을 보니까요 동방박사들이 이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습니다. 별을 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기쁨과 감격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오면 별이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르잖아요? 동방박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별이 가리켜 준 장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별이 가리키고 있는 그 집 앞에 머물렀습니다. 아마 이들은 집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금까지만 해도 왕과 대신들 그리고 귀족들이 살고 있는 왕궁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별이 가리키고 있는 장소에 와보니 왕궁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한 마구간이었습니다. 별을 따라왔는데 마구간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갔는데 우리 삶이 초라한 마구간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고 섬기고 살아왔는데, 큰 병에 걸려 건강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다니던 직장 일이 어려워질 때도 있고, 개인 비즈니스가 힘든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별을 보고 온 동방박사들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왔는데 마구간에 다다르신 분들이 분명 계실 겁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왜 마구간이야?”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지금 우리가 처한 바로 이 상황이야 말로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신 장소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가장 선명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비록 초라한 마굿간이었지만, 별의 증거로 인해 동방박사들은 이곳에 태어난 아기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11-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2:11, 개정)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 2:12, 개정)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이 마구간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습니다. 11절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들이 보기는 아기와 모친 마리아를 봅니다. 그런데 경배는 누구에게만 합니까? 아기에게 해요? 아니면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합니까? 아기 예수님께만 합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천주교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에게만 경배합니다. 천주교는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경배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아기 예수가 아닌 마리아를 경배한 구절은 없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 예수를 낳은 것은 대단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기도하지 않고 절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를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11절 본문에서 동방박사들이 아기께 경배했다는 표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로마 시대의 유명한 웅변가 세네카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누구도 왕에게 선물 없이는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왕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보배합 곧 보물상자를 열어 세 가지 예물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기 예수께 [황금]을 드렸습니다. 당시 황금은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었습니다. 금속 중 가장 고귀한 황금은 인간 중 가장 고귀한 신분인 왕에게 바쳐지는 선물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왕궁에서 헤롯이 왕 노릇 하고 있었으나, 금은 헤롯 왕이 아닌 아기 예수께 드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많은 왕들이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물로 드린 황금은 아기 예수가 왕 되심을 나타냅니다.

둘째로, 그들은 아기 예수께 [유향]을 드렸습니다. 유향은 제사장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사용된 달콤한 향이 바로 유향입니다. ‘제사장’이란 히브리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다리 놓는 사람’입니다. 즉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향은 아기 예수가 우리의 제사장 되심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그들은 아기 예수께 [몰약]을 드렸습니다. 몰약은 죽음을 앞둔 자에게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몰약이 시체를 염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태어나신 예수께서 몰약을 받으신 이유는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위해 사셨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몰약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내며, 몰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드린 세가지 예물은 그분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황금은 왕으로 오신 예수, 유향은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몰약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님께 드리느냐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 올 때 무엇 하러 온다고 합니까? 예배 받으러 옵니까 아니면 드리러 옵니까? 예배 드리러 옵니다. 왜 이런 말을 쓸까요? 참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진정한 사랑이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바쳐 하는 것이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역시 입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드려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예배자라 불리는 다윗은 값을 치르지 않고 예배 드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비록 왕이었으나 백성의 소유로 예배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 드릴 때 반드시 값을 치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란,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 나올 때, 뭔가 자꾸 받으려고만 생각합니다. “하나님 복주세요. 하나님 능력 주세요.” 그러나 예배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과 내 시간 내 물질 내 생명 내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주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별을 보고 험난한 여정길을 건너와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동방박사의 이이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이 아기 예수께 우리는 무엇을 드려 예배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주님께 드리느냐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드려 우리의 왕 되시고 대제사장 되시고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