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0 누가 능히 통달하랴 (전도서 7장 15-29절)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또한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 언젠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을 읽어보면 이 원칙이 깨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로운 자가 의로운 삶을 살다가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죽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욥과 같이 불의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 찾아온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처럼 이유 없이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악하게 행하는 악인은 죽지 않고 오래 건강하게 삽니다. 자식들도 다 잘 되고, 사업도 번창하다가 죽을 때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죽습니다. 솔로몬이 지금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헛되게 만드는 수많은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단순한 원리로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세상에는 부조리함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우리들도 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세상이 바르게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을 망할 것이라는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선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론에서는 그런데 현실의 삶은 달랐다는 점을 솔로몬은 솔직하게 직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고 있습니다. 의인들보다 악인들이 더 잘 살고 평안하게 사는 이 세상의 모순, 의인들이 억울한 일 당하고 눈물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이 불의를 솔로몬은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눈을 감는다면, 우리의 신앙도 자칫 잘못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불의한 세상, 불합리한 처사, 비상식적인 일들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그래도 의를 행하며 진리를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영원이란 관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조리가 가득한 이 세상만 바라보고서는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16절 봅시다. “(전 7:16, 개정)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이 말은,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인이 없으므로 사람이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 안에 죄와 허물이 있음을 잊지 말고 스스로 의인인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을 정말 귀합니다. 그것만큼 의미 있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의로움이란 다른 사람과 상대적인 것일 뿐이며 매우 불완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경우, 즉 자신은 무언가 특별한 의인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경우, 오히려 자신의 지나친 의로움 때문에 스스로 패망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절대적인 기준의 의를 가질 수 없다고 해도 또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예 반대 쪽으로 치우쳐서 우매한 자, 즉 어리석은 자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지나치게’라는 말은 ‘의도적으로’라는 말로 해석하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일에 방치하거나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죄를 범하는 일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한 전에 죽으려는” 것이라는 말씀은 의도적으로 악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8절을 봅시다. “(전 7:18, 개정)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16-17절에서 언급한 지나친 의인이 되는 것과 지나친 악인이 되는 것 두 가지를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이 100% 의인 인냥 교만하게 굴었던 바리새인처럼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죄악을 짓는 악인의 삶도 피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양 극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의 위대함을 19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나오는 열 명의 권력자들은 성읍의 군사적 안보를 담당하는 관리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군사와 무기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열 명의 권력자 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더 큰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사무엘 한 사람 때문에 블레셋이 감히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사무엘 한 사람은 이스라엘 모든 장군들을 합친 것 보다도 더욱 강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며 살아간 사무엘을 친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오는 지혜로 살아가는 자는 이처럼 큰 힘과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20절에 솔로몬은 이 세상에 선만 행하고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이와 같이 엄청난 복이 주어지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 선만 행하는 완벽한 의인은 없다는 것이죠.

21절에 솔로몬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소리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소리와 평가에 맞추어 살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21절을 봅시다. “(전 7:21, 개정)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면 만족스럽고 기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 매우 불쾌하고 깊은 실망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 할 이유가 업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평가하는 그 사람들도 변덕스러운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근본적으로 악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선입견, 변덕스런 평가, 주변 사람들의 악의적인 말들, 부정적인 시선들에 얽매여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특별히 무심코 내뱉은 말로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듯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태도와 반응에 우리가 일일이 얽매이거나 지배되어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어리석은 지배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쳐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2절에 솔로몬이 말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너도 사실은 남몰래 이웃에 대해서 욕하고, 미워하고, 저주한 사실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와 의로움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지혜자가 되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된 본성 때문에 지혜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창조적 지혜와 비교하면 대답할 수 없는 것들 뿐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전 7:23, 개정)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를 다 동원하여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결론은 아직도 그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라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23절에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지혜로 따지면 전무후무한 사람도, 인간이 가진 지혜의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전 7:24, 개정)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4절을 다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일을 알기란 너무나 어렵고, 이해하는 것 역시 곤란합니다. 누가 과연 이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 한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서 연구했고, 악한 것, 어리석은 것, 미친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 사람들의 심리, 행동의 모든 내적 동기 등 이성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고 깨닫고자 애를 썼습니다.

26절에서 솔로몬은 특별한 부류의 여인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언급합니다. 마음이 함정과 그물 같고, 손이 사슬 같은 여자는 죽음보다 더 무섭고 지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그런 여자에게서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녀의 함정에 걸려 사로잡힐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인은 육체적인 쾌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적 쾌락이 전부인냥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위험스러운 것인지 솔로몬은 보았습니다. 음녀는 사람을 사망의 자리, 파멸의 자리로 떨어뜨립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그녀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앞에서 언급한 이치와 연구에 대해서 자신이 이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28절에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깨달음을 얻은 자가 천 명 중에 한 사람이었고, 여자 중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이치를 깨달은 그 천명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솔로몬 자신입니다. 즉 솔로몬은 세상에 자신이 발견한 이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인간의 지혜는 분명 가치가 있지만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혜를 얻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의 의로움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곳에 부조리와 부패와 불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29절에 세상이 부조리한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 때문이라고 말하며 말씀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지혜와 의로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다 알아가 보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 들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음 매순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극단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최우선이 되어 어리석음과 음녀를 벗어나 참된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잇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