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5 호세아 시리즈 (3) 죄를 거두다 (호세아 10장 5-15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깨지면 결국 관계가 깨집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한 가지 잘못된 행동으로 신뢰가 깨지는 경우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많은 경우 상대방의 잘못이나 신뢰가 깨어지는 일들이 점차 쌓이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하는 회사원이 몸이 아프거나 차가 막혀서 한 두 번 지각하는 것은 봐줄 수 있습니다만, 매번 반복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신뢰가 깨질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과실이 하나 둘 쌓이게 되면 결국 그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처음부터 이혼하려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배우자의 불륜 같은 큰 잘못으로 인해 이혼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그 보다는 대부분 부부 사이의 관계를 소홀히 하다가 점차 이혼에 다다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한 발자국식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들의 신앙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우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비참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가운데는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획적으로 파괴하려고 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깝게 잘 지내려고 이 자리에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상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며,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계획적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것만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 피우는 배우자도 나쁜 배우자이지만, 배우자를 무시하고 그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 배우자도 나쁜 배우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하는 성도도 나쁜 성도이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않는 성도도 그 만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관계가 깨질 때, 잘못하거나 실수한 상대방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에게 무안을 주고 나를 떠나려 하느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은 잘못이 없고,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떠나려는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내몰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하고 기도하며 부르짖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삶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래? 그럼 내가 너희의 죄를 알려 줄께!”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위기입니다.
한 번 말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호세아 10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매는 많이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복을 가지고 열방 가운데 제사장 민족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경건함을 갖고, 하나님을 열방 가운데 전하는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1절을 보면, 그들이 복의 열매가 점점 더 많아지자, 우상에게 제사 드리기 위한 제단들을 더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번성할수록, 우상들을 섬기기 위한 돌기둥들을 더 많이 만들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벧엘에다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두고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복주는 신으로 섬겼습니다. ‘벧엘’이란 이름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그곳을 ‘벧아웬’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아웬’은 ‘재난의 집’이란 뜻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에게 절하고 제사 드리는 그 곳에서 일어날 것은 재앙 뿐이라는 의미로 이처럼 예배 장소인 벧엘을 벧아웬이라고 이름을 다시 지어주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처럼 의지하고 열정을 다해 섬긴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이 빼앗아 가게 하셨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호 10:5, 개정)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사마리아 주민이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벤아웬의 송아지, 즉 벧엘에 만들어 둔 금송아지 우상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슬퍼한다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앗수르 혹은 앗시리아 라는 이름의 나라를 사용하십니다. 결국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신으로 섬기던 금송아지 조차도 정복자 앗수르에게 제물로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5절 말씀에 금송아지를 기뻐하던 백성들이 슬퍼하고 그것을 기뻐하던 금송아지 종교의 제사장들도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금송아지가 그들을 원수 앗수르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금송아지 섬기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6절을 이어서 봅시다. “(호 10:6, 개정)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섬기던 금송아지가 원수 앗수르 왕 야렙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보며 수치스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그들이 섬기던 금송아지 신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계책으로 만들어 섬긴 금송아지를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7-8절 봅시다. “(호 10:7, 개정)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호 10:8, 개정)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될 것이며, 7절을 보면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터지듯이 허무하게 멸망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8절을 보면 벤아웬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산당은 파괴됩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아 가시와 찔레가 그것을 섬기는 데 사용되었던 제단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차라리 죽기를 희망합니다. 산과 작은 산더러 자신들 위에 무너져 죽기를 바란다고 소리쳤습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우상에 대한 잘못된 예배로 인해 영적으로 눈이 멀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였고, 이제는 죽기를 바랬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예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비참한 결말을 가지고 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그가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다른 대상에게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버린 북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9-10절을 봅시다. “(호 10:9, 개정)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호 10:10, 개정)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9절에 기브아 시대라는 것은 사사기 19-21장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극히 부끄럽고 슬픈 사건을 가리킵니다. 한 레위인과 그의 첩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그 때 기브아의 무리들이 집을 둘러싸고 집주인에게 레위인을 내보내 그들과 동성애를 하여 그들의 성욕을 채우도록 소리질렀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이 그의 첩을 밖으로 내보냈고, 그녀는 기브아 무리에게 능욕을 당하고 문지방에서 죽은 채 버려졌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두 조각으로 자른 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보내 기브아 사람들에게 복수하도록 소리쳤습니다. 나머지 열한 지파는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모였지만,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만큼은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가 거의 사라질 정도로 큰 피해와 수치를 입게 되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북이스라엘의 영적 수준이 기브아 백성들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계속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때가 되면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죄를 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죄악의 삶을 사랑한 죄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고 자신의 군대를 의지한 죄입니다. 이전에 기브온 족속이 범죄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성읍을 둘러싸 그들을 심판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방에서 온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죄를 좇아 살아가던 그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이방 군대에 의해 무너질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이는 BC 722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인간적인 힘과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짓된 안전감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는 금이 간 부러진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 같아서, 그들은 반드시 넘어지고 크게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호 10:11, 개정)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곡식 밟기를 좋아하는 길들인 암소와 같다고 부르셨습니다. 소는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밭을 갈기도 하고, 곡식을 등에 업고 옮기기도 하고, 곡식을 빻아 가루를 내기 위한 커다란 연자 맷돌을 돌리는 일도 합니다. 소가 하는 일 중 곡식 밟기가 가장 쉽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기 위해서 땅에 새로 벤 고식 줄기를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소가 밟도록 합니다. 이 일 할 때면 소가 자기 마음대로 곡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을까요? 축복과 형통, 풍요만 좋아하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무와 책임은 게을리 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일하기 싫어하고 가장 쉬운 곡식 밟기 하기만 좋아하는 암소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암소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을 배울 수 있도록 그들의 목에 멍에를 메우고 또 그들 위에 사람을 태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반항적인 북이스라엘을 순종적인 소로 기들이기 위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이방 민족 곧 앗수르를 이용하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불순종을 고집하며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던 이스라엘은 이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닌 그들을 칼로 찌르고 잔인하게 억누르는 이방인의 압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한 징계요 심판입니다.
11절에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 덩어리를 깨뜨리리라”는 말씀은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 둘 다 이방 나라에 종이 되어 곤고한 신세로 살아가며 처절한 고통과 수고를 감내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괴로운 수고의 대가는 그들이 가져가지 못하고 원수들이 빼앗아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이제 더 이상 곡식 밟기를 하며 평화롭게 마음 껏 곡식을 먹던 소처럼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앗수르로 전쟁 포로로 끌려 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와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불순종에 따른 징계와 심판으로 이방인들의 압제를 받으며 곤고한 날을 보내는 가운데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명령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호 10:12, 개정)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만 헌신하고 거짓 우상과 신들에게서 떠나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지금이야 말로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찾으면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셔서 그들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정의를 심고 사랑을 거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했습니까? 13절을 보니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의 군사 숫자가 많다는 사실을 의지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14-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호 10:14, 개정)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호 10:15, 개정)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너희의 군대가 전쟁 소리를 들을 것이며 너희의 모든 요새가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살만 왕이 벧아벨을 공격하던 때와 같으며, 그 때에 어머니와 자녀들이 함께 죽을 것이다. 네 사악함이 크기에 벧엘이여,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새벽 동이 트면 이스라엘 왕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정하게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심은 것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즉 악을 심고 죄를 거두었습니다. 14절에 ‘살만’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을 가리킵니다. 그가 갈릴리 바다 동남쪽에 위치한 벧아벨이란 성읍을 파괴하여 버린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성읍에 사는 어머니와 자식들은 다 살육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그들의 강한 군대는 거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도 앗수르에게 멸망한 벧아벨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은 죄악이 결국 그들의 도시에 재앙과 살육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 벧엘은 하나님을 떠나, 성적인 죄악을 짓고, 거짓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호세아는 이 죄악 많은 도시가 하나님의 극심한 심판을 받을 것을 오늘 본문에서 재차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영적인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정의를 심고 사랑을 거두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받으며 소가 풀밭에서 곡식을 원하는 만큼 먹는 장면처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심고 죄를 거두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아 멍에를 매고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큰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조금이나마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은연 중 없는 존재처럼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다거나, 세상의 일들에 빠져 주님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대단히 경계하고 주의해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떠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세상에 빠져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거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어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버리는 경우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하려고 하는 모든 삶의 모습들에 주의하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