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 [말씀 위에 삶을 건설하라] 시리즈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느헤미야 8장 1-6절)

오늘 본문은 유대인에게 있어 새해에 일어난 일입니다. 새해 첫날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새롭게 시작된 새해는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성전이 완공되었으며, 또한 무너져 내린 성벽도 다 복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망의 새해 첫날이 밝아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축제라도 벌여야 마땅한 희망찬 이 날…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갈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이들이 새해 첫날 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느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1절 말씀을 보니, 그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와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시절에는 아직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오늘날처럼 성경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경이라 해봐야 파피루스나 두루마리 같은 종이에 서기관이 성경을 직접 필사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 몇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그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땅에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웠다 한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사고 차를 사면 다 될 것 같지만, 막상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여러가지 살림 도구들과 맘에 드는 가구들을 집에 드려 놓아도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더 넓은 집을 사려하고 더 좋은 차를 사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허전함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허전함의 출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영혼의 굶주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영혼의 배고픔입니다. [팡세]라는 유명한 작품을 쓴 파스칼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존재한다. 이 공백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공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성전을 짓고 무너진 성벽을 잘 쌓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란 정체성 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만 보더라도, 기계만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를 사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최고급이어도 그 안을 채우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결국 그 기계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짓고, 성벽을 중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가를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 코너스톤 장로교회도 겉으로 보면 창립 12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새롭게 일꾼들도 세우고 뭔가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살펴보면 아직도 우리가 이루어 가야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 건물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 유럽의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들이 죽어가고 술집으로 팔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데 힘썼으나, 정작 그 안에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등한시했습니다. 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수많은 이들이 다녀간 교회라 하더라도 말씀이 없는 교회는 생명력이 없기에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일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면 그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 말씀 때문에 살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혈액이 순환하지 않고 멈춰버리면 죽게 됩니다.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영적 혈액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일 때 교회가 살아있게 됩니다.
성벽 재건을 마무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집회의 더 특이한 점은 리더들이 계획한 모임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성회는 지도자들이 구상하여 이뤄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학사 에스라에게 요청하여 이루어진 집회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벽 쌓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를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코너스톤 장로교회 안에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때 주님께서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채워 주시고, 말씀에 대한 굶주림이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좋은 말씀과 기름진 말씀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느 8: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느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자, 드디어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부탁 받은 대로 새해 첫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2절, 3절 말씀을 보면 두 번 반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하나 보입니다. 여러분 보이세요?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이란 표현입니다. 지금 말씀을 사모하여 모인 회중 중에 누가 있습니까? 남자, 여자는 모든 성별이 다 함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은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 아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몸은 안 듣는 거 같아도, 귀는 다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한나의 아들 선지자 사무엘도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 시대 대제사장인 엘리도 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도 듣지 못했으나 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오직 어린 아이인 사무엘만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영적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성인들에게만 찾아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에스라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 현장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이해할 만한 어린 자녀들까지 함께 모여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영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에스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난 어린아이들이 다음 세대의 또 다른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코너스톤 장로 교회가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영적 리더들을 말씀으로 훈련하고 양육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으로 훈련 받은 영적 자녀들을 많이 둔 교회가 가장 영적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바로 그 교회의 내일이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으로 변화할 때 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시대를 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일학교에 있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다음세대의 주역인 주일학교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들이 바로 코너스톤 장로 교회의 미래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에스라 목사님이 이들에게 말씀을 전한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까요, 수문 앞 광장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말씀을 전했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영어 성경을 보면 ‘Daybreak to Noon’ 그러니까 “컴컴한 하늘에 해가 뜨기 시작할 때부터 정오까지” 입니다. 대략 5시간에서 길게는 6시간 입니다. 지금 이들은 설교 시간만 여섯 시간 되는 예배를 이들이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새벽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점심시간 때까지 쉬지 않고 설교가 이어진다면… 오늘 11시 주일예배가 오후 다섯시까지 계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결코 쉬운 말씀 집회가 아닙니다.
아무리 제일 잘나가는 탁월한 명강사가 와서 설교해도요 6시간 한다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에스라 목사님 혼자서 이 집회를 인도한 것은 아닙니다. 4절 말씀을 보니까요 학사 에스라가 이 집회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나무 강단에 서 있고 그의 우편에 6명 좌편에 7명, 총 13명이 그와 함께 서 있습니다. 즉 에스라 목사님 혼자서 6시간 되는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이 강단 위에 올라와 있는 나머지 13명과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장시간 동안 집회를 하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영적 굶주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부흥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입니다. 1907년 1월, 대한민국 평양에 위치한 장대현교회에서의 집회 역시 그리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천 여 명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데요. 어찌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간절했는지 말 그대로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밥도 굶어가며 성경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이들은 성경공부가 끝나면 바로 이어 저녁집회를 열고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하루 이틀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러한 집회가 1907년 1월 2일부터 1월 15일까지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의 가장 큰 전환점인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 모인 곳에서 부흥은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코너스톤 장로 교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깊은 사모함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새해 첫날 말씀을 5-6시간 연속적으로 듣고 배울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간절하였습니다.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어요? 학사 에스라가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읽을 때 이들이 어떻게 듣습니까? 3절을 보니까..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다음에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는데 그냥 편안한 자세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여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개가 뼈다귀를 물고 있는 걸 보신적 있으십니까? 개는 뼈다귀를 보는 순간 그 개의 온 신경이 뼈다귀에 가 있습니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개는 뼈를 물고 늘어지고 또 핥고 빨고 있는 힘을 다해 뼈다귀를 상대합니다. 세상에 뼈다귀 만난 개보다 행복한 개는 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말씀을 이처럼 사모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길까요? 매일 말씀을 읽고 또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또 읽고 또 읽고… 분명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 또 살아가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해 주는 기회를 누릴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사흘 굶은 자에게 주어진 빵 한 조각처럼 지금 두 귀로 들려오는 하나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만주에 사는 한국 교포 2세가 서울에 있는 극동 아시아방송에 조그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나이 어린 소년 방송의 청취자였으며, 그가 즐겨 듣는 방송은 신약성경을 천천히 읽어만 주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가 그 방송 시간에 귀 기울여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말씀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유일한 성경은 제가 베껴 쓴 이 두꺼운 성경 공책 뿐 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물이 풍족한 나라에 사는 사람은 물 귀한 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물 부족 국가에 사는 사람은 물줄기가 곧 생명줄기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성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성경을 구할 수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은 성경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성경을 금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금괴를 주고서라도 사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곧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이다” 말씀을 늘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사모하시고 이 말씀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느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이 적혀 있는 책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그 앞에 앉아 있던 모든 백성들이 일어섰습니다. 오늘날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자기가 일하는 방안에 들어오면, 아무리 급하게 하던 일이라도 그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들의 국가의 원수요 통치자인 대통령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 자리에서 일어선다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학사 에스겔이 책을 펼치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들은 이 율법책이야말로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책,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유일한 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으며 또한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한 젊은이가 하루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땅에 떨어진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일기장은 그가 그토록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일기장입니다. 그 젊은이는 그 일기장을 가지고 자기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일기장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까요?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그랬겠죠. “혹시 좋아하는 다른 남자가 있는 건 아닐까?”, “어떤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그러다 여학생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사실에 대하여 무언가 조그마한 힌트라도 발견하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마음이 쿵쿵거리며 행복해 합니다. 저는 아마 그 젊은이가 그날 밤 밤새 읽었다고 한들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하여 더 알아가는 시간 그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이 젊은이와 같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성경을 펼치고, 주의 말씀을 읽는 것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했으나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저 유명한 시편 1편에서 다음과 고백하기를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무엇 합니까? “즐거워하여”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서 다윗이 쓴 “즐거워하다”는 말은 ‘값비싼 보석이나 보물을 발견했을 때’, 또는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기뻐할 때 쓰는 표현이 바로 ‘즐거워하여’ 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마치 보물을 발견하듯이, 마치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 이뤄진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 글을 쓴 다윗이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편 119편에 기록된 그의 고백을 보면 “(시 119: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 119: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읽을 때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내 마음에 소원이 이뤄진 것처럼 즐거워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기쁨과 만족을 주는 최고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리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 갈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요한복음 17장 3절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남기셨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느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성경을 읽은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들이 “아멘 아멘”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맞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에스라 목사님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스라와 온 백성의 율법 낭독은 단순히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목적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프로그램과 행사와 이벤트들은 늘어나는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 목회자, 말씀을 배우려 하지 않는 성도. 말씀이 사라지는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식당 가서 밥 먹고 오면 배라도 부른데, 교회는 갔다 와도 여전히 영혼이 배고픕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영적으로 굶주리게 됩니다. 영적 베들레헴인 교회에 생명의 떡이 없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아모스서 8장11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 교회에는 영적 기근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말씀을 더 사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코너스톤 장로교회 온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 더욱 더 사모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