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 [야고보서-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시리즈 (5) 세상을 대할 때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4장 1-10절)


 

서론. 전쟁과 싸움이 난무하는 이 세상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소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이들이 서로의 장난감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한 아이는 장난감을 뺏으려고 하고, 다른 아이는 뺏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놓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할퀴고, 꼬집고, 때리고 하다가 한쪽이 울음을 터트리면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달려옵니다.

유치해 보이는 장면일지 모르지만, 사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투고 싸우는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지난 10월 8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포함하여 여러 도시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전국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무시무시한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여 구소련의 영광과 전 세계에 우뚝 선 패권과 힘을 되찾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간의 욕심이 비인간적인 무차별적인 살육과 잔인한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국가와 같이 큰 사이즈가 가진 탐욕은 침략과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개인의 규모에서는 상대방과 싸움과 다툼으로 나타납니다. 왜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싸울까요? 왜 국가들이 전쟁을 일으킬까요? 야보고는 그 원인이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욕심 즉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싸우기도 다투기도 하는 것이죠. 심지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급기야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하고, 내가 없는 것을 가진 그 사람에 대해서 죽일듯이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합니다.

  1. 인생이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

1)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 싸움이 꼭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저마다 갖고 싶어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물건이나 물질을 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욕심들이 결국 사람 관계에서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세상에 다툼이 없는 곳이 있나요? 천사 같은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도 다툼은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는 대학원이나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명문 대학교에서도 싸움은 일어납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일하는 의사들이 모인 곳에도 분쟁은 일어나고, 선한 사업을 위해 세워진 NGO와 같은 자선단체 안에서도 다툼은 여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코너스톤장로교회 안에는 싸움과 다툼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다툼과 싸움에서 면제부를 받은 천국과 같은 공동체인가요? 아니요.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들도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 얼마든지 서로 다투고 싸울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도 다 동일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고백해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결국 교회에서도 분쟁이 일어나고 다툼과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1-2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약 4:1, 새번역)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약 4:2, 새번역)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육체의 욕심’이란 단어로 번역되었고,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에는 ‘정욕’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헤도네]입니다. 헬라어 [헤도네]는 ‘달콤한 것’, ‘오감에서 얻는 즐거움’ 또는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합니다. 물론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 등 오감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고, 꽃 향기를 맡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촉감이 좋은 사물을 만지며 얻는 기쁨을 누린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욕(헤도네)이란 육체적인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 왜곡된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육체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할 때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욕심은 결국 다툼과 분쟁과 분열, 시기와 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심을 내고, 심지어 살인하고 시기해도 우리가 원하는 그것을 얻지 못합니다. 다투고 싸워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인 쾌락(헤도네)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2) 욕심을 부리고 급기야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다툼만 일삼는 죄상을 저지르며 산다.

지난 7월 5일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한 주차장에서 50대 여자 공무원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 공무원이었던 4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죽었습니다. 사인인즉 이 남성은 죽은 여성 공무원에게 지소적으로 만남을 요구했으나, 여성은 이를 수차례 거절했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남성이 칼을 들고 찾아가 출근하기 위해 주차장에 내려온 여성 공무원을 칼로 찔러 죽인 것입니다. 경찰이 조사하며 왜 여성을 죽였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남성은 “숨진 피해자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아 홧김에 흉기를 휘둘렀다”고 진술했습니다. 욕심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 것이죠.

또한 최근에 서울 관악구에 있는 고시원의 주인인 70대 여성이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시원 여주인을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지난 14년간 이 고시원에서 거주하던 30대 남성이었습니다. 방을 빼기로 한 날, 피해자가 현금이 든 것처럼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 돈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뉴스가 더 충격적인 것은 숨진 고시원 여 주인과 30대 남성이 평소에 친하게 잘 지내던 주인과 고시원생 사이라는 것입니다. 남성이 직장도 못 구하고 무직 상태로 있으니 사정을 딱하게 여긴 여주인이 방값도 주변 시세보다도 더 적게 받았습니다. 이처럼 지난 14년간 신세를 졌고,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어 준 친절한 고시원 주인을 이 남성은 돈 때문에 한 순간 미쳐 살해를 저질렀습니다. 이 날 남성이 죽인 고시원 여주인의 가방에서 빼앗은 현금은 고작 6만원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결국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고 급기야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다툼만 일삼는 죄상을 저지르며 살게 될 뿐입니다.

 

3) 그럼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만약 우리가 육체적 쾌락을 얻는 것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는 잘못된 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봅시다. “(약 4:3, 새번역)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을 수 있는 것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헤도네’에 기초를 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구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된 동기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1. 세상 정욕의 추구는 영적 간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세상 정욕에 빠져 있는 자들에 대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다.

만일 우리가 육체적 쾌락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 삶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간음하는 여인들’이라고 부르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4:4, 개정)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하는 여인이란 쉽게 말하면 결혼한 아내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 이 모습을 가리켜 ‘영적 간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신랑으로 표현되고, 성도들은 주님의 신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이 주는 육체적인 쾌락(헤도네)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를 깨트리고 세상과 영적 간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4절 말씀 보면 하나님과 세상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육체적 쾌락 즉 정욕을 대표하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며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 강하게 경계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2:15, 우리말) 여러분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요일 2:16, 우리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탐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살이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2:17, 우리말) 세상도 사라지고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육체의 정욕에 빠져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속에 머물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과 벗 되지 말고, 세상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거룩한 길에서 떠나 돌아서서 세상을 향해 가는 자는 결국 멸망하는 소돔성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면 남편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크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반응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영적 간음을 저지를 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5절 말씀을 봅시다. “(약 4:5, 우리말)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고 한 성경 말씀을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시기’는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간 불륜남에게 갖는 악의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기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해야 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배우자가 타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품게 되는 불타는 질투심입니다. 이 질투는 악의적 시기심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이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요 그의 아내인 성도들이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를 이와 같이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 이 좋으신 하나님을 두고 세상과 바람을 피울 수 있느냐?’하고 책망하는 듯 보입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 행위를 하면 그 남편의 명예가 크게 실추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부인 주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친구 삼아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살아간다면 존귀하게 여겨져야 마땅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반드시 망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지 깨닫고 세상과 벗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1. 성도는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신다. 대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과 벗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요? 사도 야고보는 성도가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4:6, 개정)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비웃으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서 싸움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인생을 멸하십니다. 그럼 반대로 ‘겸손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 안에 있는 악한 욕망을 억제하고, 형제들과 화목한 삶을 살아가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겸손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높여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로 나아와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신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세상과 벗하여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4:8, 개정)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언제나 성도와 가까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해 버리곤 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가까이하고, 정욕과 탐욕을 위해 세상과 가까이하여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만일 지난 날 세상과 벗하여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라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까이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주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다시 품어 주시고 도와 주십니다.

 

3)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 서서 ‘두 마음을 품은’ 죄인들은 죄악된 행실에서 떠나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해야 한다.

8절 후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 서서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지 말고, 오직 지난날 죄악 된 행실에서 떠나 죄에서 깨끗이 손을 씻고 하나님만을 가까이할 것을 권면합니다. 손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은 죄악으로 물든 더러운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씻을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곧 보혈로만 우리 죄가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 서서 이쪽저쪽 머뭇거리는 마음은 성결한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자들은 두 마음을 품은 자로서, 그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향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이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봅시다. “(약 4:9, 개정)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여태까지 육체의 쾌락을 좇아 살아가며 세상에서 즐기며 살아간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죄의 쾌락을 탐닉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며 애통하고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며 근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악에서 돌아서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