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9 [야고보서-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시리즈 (4) 대화에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3장 1-18절)

 

서론. 마스터 키

지난주 목요일 일리노이 에반스톤 지역에서 우편 배달을 하던 USPS 집배원 2명이 같은 날 강도를 당해 동네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역 경찰에 의하면 강도들은 집배원으로부터 아파트, 콘도 단지의 모든 우편물 함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를 훔쳐갔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강도가 처음부터 마스터 키를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에 에반스톤 지역 주민들 중 아파트나 콘도에 거주하는 경우 우편물을 분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16년도에는 켈리포니에 사는 한 강도가 우체국 마스터키를 훔쳐 LA 한인타운에서 주택가를 휘젓고 다니며 우편물을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우체국 직원들의 마스터 키를 훔쳐가는 사건은 의외로 여러 주에서 자주 발생했습니다. 강도들은 이 마스터 키 하나만 훔치면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우편함을 다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USPS가 마스터 키 보안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마스터 키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키를 원수에게 빼앗기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도, 아무리 열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도 이 마스터 키를 원수에게 빼앗기면 다 헛것이 되어 버립니다. 도대체 사도 야고보가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원수는 계속해서 빼앗으려고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마스터 키가 무엇일까요? 바로 ‘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혀를 다스리지 않으면, 즉 입을 제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시기하는 말하고, 미워하고, 헐뜯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1:26, 새번역)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경건’이란 말을 풀이하면 ‘하나님에 대한 봉사’, ‘하나님에 대한 예배’,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헛것이 됩니다. 언제요? 혀를 다스리지 아니할 때입니다. 헛것이라는 것은 ‘쓸모 없다’, ‘가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열심히 예배하면 무엇합니까? 예배 끝나면 사람들 만나서 뒤에서 다른 사람 욕하고 험담하는 데… 그런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보실 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면 무엇합니까? 봉사 후 말로 사람들 상처 주고, 헐뜯고 비방하는데… 그런 사람의 봉사는 하나님 보실 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혀를 다스리는 것이 믿음생활에 있어서 마스터 키와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혀에 대한 주도권을 원수에게 빼앗겨 죄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예배, 봉사, 신앙생활 다 헛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혀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혀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경솔한 말, 진실하지 못한 말, 불순한 말, 해를 끼치는 말, 뒤에서 험담하는 말은 그가 아직 경건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입니다. 아무리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교회일 봉사에 적극적일 지라도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껍데기만 변했지, 아직 속은 변하지 아니하고 옛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신앙생활의 마스터 키로서의 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총 5가지 그림언어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로 혀는 굴레와 같습니다. 조그마한 굴레가 큰 동물을 제어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말을 타면 재갈물린 말의 굴레 하나만 잡고도 말을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수가 굴레를 잡고 말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처럼, 우리도 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혀는 배를 조종하는 키(helm, wheel)와 같습니다. 바다 위를 떠 다니는 큰 배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큰 배는 무게 만 약 56톤에 길이가 460m나 됩니다. 그런데 이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는 겨우 사람 몸만 합니다. 키를 왼쪽으로 돌리면 그 거대한 배가 왼쪽으로 가고, 키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배가 또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작은 키가 커다란 배 전체를 움직이는 것과 같이 사람의 세치 혀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혀는 ‘불’과 같습니다. 가을 등산객이 무심코 버린 작은 담배꽁초 하나 때문에 산 전체가 다 타 버리는 무시무시한 산불로 번집니다. 지난 2018년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북쪽에서 발화된 일명 멘도시도 컴플랙스 화재는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산불로 기록되었습니다. 불은 29만 에이커의 산림을 태웠습니다. 서울시의 2배, 샌프란시스코 도시의 9배, 로스앤젤레스(LA) 전체 면적에 육박하는 크기입니다. 산불이 얼마나 컸는지 지구 밖에 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도 산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 때문에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불에 타 죽어버리는 재앙으로 번지게 되는 것이죠.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위력을 갖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넷째로 혀는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짐승과도 같습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 동물들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유명한 동물원 사육사들을 보면 사자를 강아지 부리듯 하고 호랑이를 고양이 부리듯 훈련합니다. 사육사 앞에서 사자도 호랑이도 깨갱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충동적으로 나가는 말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사자 호랑이처럼 사람들을 헐뜯고 다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과 혀는 반드시 길들이고 제어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혀는 독과 같습니다. 뱀의 독은 얼마나 강한지 저 큰 코끼리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뱀의 독과 같이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의외로 오랜 세월 교회 출석하고 예수님 믿는다는 분들 중에도 말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혀를 다스리지 않는 자는 뱀의 독과 같고, 사람을 해치는 맹수와 같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주고, 공동체를 무너트리고 분열시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런 사람의 예배와 봉사는 하나님 보실 때 아무런 의미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만 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우리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기기에 합당한 말들을 했으면 의롭다고 판정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당한 말들을 했으면 죄가 있다고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3-37절 말씀을 우리말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마 12:33, 우리말)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마 12:34, 우리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하겠느냐?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법이다. (마 12:35, 우리말)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았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았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 12:36, 우리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사람은 자기가 함부로 내뱉은 모든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 (마 12:37, 우리말) 네가 한 말로 의롭다는 판정을 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로 죄가 있다는 판정을 받기도 할 것이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동으로 짓는 죄, 예를 들면 살인, 간음, 도둑질은 큰 죄라고 생각하지만, 입으로 짓는 죄는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언어생활을 하는지 유심히 보시고,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기도 하고 벌을 주시기도 합니다. 36절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대에 서 우리들이 뱉은 모든 악한 말들에 대해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말이란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좋은 마음인지, 나쁜 마음인지, 참으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쓸모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물이 단 물이든지 쓴 물이든지 한 종류의 물맛만 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며 살든지, 아니면 반대로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물이 하루는 짠물을 내고, 다음 날은 단물을 내고 이처럼 물맛에 일관성이 없으면 그 우물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 형제를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하기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꾸준하게 단맛만 내는 우물이 쓸모 있듯이,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만 골라서 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정받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언어생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람들에 대해서 악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 3:9, 개정)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개정)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저주’라는 단어는 이웃에 대해서 악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 험담하고 악담하라고 혀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말을 하라고 혀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있다면, 사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식 욕하는 것 참는 부모가 있나 보십시오. 우연이라도 누군가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에 대해서 모욕하고 비방하고 험담하고 있는 것 듣게 되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형제에 대해서 험담하고 미워한다면 그는 사실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자기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일 4:20, 우리말)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 4:21, 우리말)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이 같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고 수백 번 말해도,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모든 고백이 거짓말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는 확실하게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비방하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가 여전히 말 실수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 혀는 불의를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의로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6:13, 개정)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처럼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연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언어생활의 특징은 첫째로, 사람들에 대해서 악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언어생활의 두 번째 특징 사람들과 평화의 언어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험담하는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비방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이 때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한 일을 힘써 행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는 계속해서 평화의 언어를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7, 우리말)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힘써 행하십시오. (롬 12:18, 우리말) 여러분이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정의는 우리의 복수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원수 갚는 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영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힘써 선한 일을 행하십시오.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평화의 언어를 나누십시오.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말들을 하십시오. 혹시 가정에서 배우자가 원수처럼 보입니까? 남편이 밉고 아내가 밉습니까? 내 배우자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고, 칭찬해 주는 말들을 하십시오. 교회에서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셨습니까?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평화의 말들을 나누십시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야고보서 3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3:18, 새번역)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면밀히 관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족, 교회 식구들, 직장 동료들과 어떻게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지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언어야 말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마스터 키입니다. 혀를 죄악을 짓는데 빼앗기면 경건은 헛것이 됩니다.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혀를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예배도 봉사도 다 쓸모없어집니다. 이제 우리 두 가지를 명심하십시다. 사람들에 대해서 험담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그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으로 이끌 뿐입니다. 사람들과 평화의 언어를 나누기를 힘쓰십시오.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고, 칭찬하고,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말들로 우리의 입술을 채우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의 입술과 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마스터 키를 죄악에 빼앗기지 마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의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