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야고보서-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시리즈 (3)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14-26절)

서론. 평생 한국인 입양아를 돌본 장한 미국인 어머니

지난 1996년 서울에 위치한 새문안교회에서 [장한 미국인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진 오드리 보드만 여사를 한국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이분은 4명의 친자식을 두고도, 한국인 아이들 5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 내셨습니다. 그 5명의 한국인 입양아 중 한 명은 전신장애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박소영 양입니다. 미국이름은 ‘수잔’으로 지어주었습니다. 지난 1971년 홀트아동복지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던 오드리 여사는 미국 뉴저지로 입양되었던 장애 한국 어린이가 파양돼 오갈 데 없다는 소식을 듣고 수잔을 입양했습니다. 그 때부터 수잔을 보살피고 양육했습니다. 인터뷰하던 당시 오드리 여사의 나이가 예순 다섯 살이었습니다. 25년 전 입양되어 온 수잔은 25살의 아가씨가 되었지만 전신장애 뇌성마비로 아직도 오드리 여사가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했습니다. 오드리 여사가 입양한 또 다른 한국 아이는 소아마비 환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국 입양아 Bethany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어 무려 세 차례나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자가 오드리 여사에게 묻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하게 되셨나요? 남들은 다 건강한 아이들을 입양하려고 하는데, 여사님은 어떠한 이유로 건강하지 않고 중한 병이 있는 아이들을 입양하게 되셨나요?” 오드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입양했을 뿐입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혼자서는 앉지도, 걸을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는 전신장애 뇌성마비가 있는 한국에서 입양해온 아이 수잔은 아직도 다섯마디 밖에 할 줄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 있음으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오드리 보드만 여사는 그녀의 믿음을 이처럼 아름다운 삶으로 나타냈습니다. 오늘 야고보가 하고 싶은 핵심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절과 26절에 야고보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에 따르면 가짜 믿음이 있고 진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믿음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진짜 믿음은 어려운 성도들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나눔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둘째, 진짜 믿음은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이 두 가지 내용을 함께 차례대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진짜 믿음은 사랑의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진짜 믿음은 사랑의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사랑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섬기는 사람만이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를 가진 셈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어느 집사님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큰 교통사고로 인해 몸과 삶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퇴원 후에도 사고 후유증으로 직장에 돌아가 일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는데, 사고 후에는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렵고 힘들어졌습니다. 돈이 부족하여 장 보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막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분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고, 돈입니다. 교회 식구들이 이 집사님의 가정 상황을 훤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집사님, 힘드시죠? 몸이 아플수록 배불리 먹고 지내야 해요. 따뜻하게 지내셔야 해요. 잘 들어가시고요. 하나님께서 먹을 것 주시고, 따뜻하게 지내게 해 주실 거라 믿어요. 다음 주에 교회에서 또 뵐께요.” 다음 주일에 교회에서 만나도 또 이렇게 말로만 인사치레만 합니다. “아이고, 집사님 힘드시죠? 몸은 좀 어떠세요? 이번 주도 건강하셔야 해요! 힘들어도 힘 내셔야 해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이렇게 말만 합니다. 교회 내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프고, 힘든 형제 자매들을 눈으로 보고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듣기 좋은 말로만 위로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방치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런 말 뿐인 사람의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잠언 3장 27-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언 3:27) [새번역성경]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잠언 3:28) [새번역성경]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도와줄 힘이 있으면서도 도와줄 기회가 찾아왔을 때 말로만 모면하려는 것은 무익합니다. 교회 내에 가난한 자가 있어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음식과 의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값싼 동정의 말로만 관심 있는 척하는 모습을 야고보는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교회 식구들을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하는 성도로서의 책임은 외면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말 뿐인 믿음은 무익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 말씀을 쉬운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약 2:14, 쉬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만일 누군가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약 2:15, 쉬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약 2:16, 쉬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약 2:17, 쉬운)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실제적인 나눔과 섬김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고 진단합니다. 이웃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음에도 주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음과 선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궁핍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웃이나 성도들을 돕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 속에는 이웃을 위한 나눔과 섬김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선행으로 열매 맺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나타나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자신들은 분명히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한 가지 체크해 보라고 제시합니다. “만일 정말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믿음이 일으키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야고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불충분 하다고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역사하셔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나는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팩트는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약 2:19, 쉬운)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으니 잘하는 일입니다. 귀신들도 그것을 믿으며 두려워서 떱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팩트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팩트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팩트에 대한 믿음의 반응인 스토리가 우리 삶 속에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팩트들이 넘쳐납니다. 그 팩트들을 우리 삶의 스토리로 담아내지 못하면 팩트들은 증발해 버리고 맙니다. “나는 믿음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증명해봐요!” “난 하나님이 온 세상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구원자 되심을 믿어요! 거봐요 나는 믿잖아요?” “그래요. 당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주시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워자라면, 예수님 믿고나서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예수님 모르는 당신 친구들하고, 예수님 믿는 당신의 삶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사탄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진짜 그리스도라면 사탄과는 달라야죠!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이웃 사랑이라는 행함이 빠진 가짜 믿음만으로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가짜 믿음을 진짜라고 믿으며 스스로 속이는 자들을 향해서 답답하다는 듯이 또한 불쌍하다는 듯이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약 2:20, 개정)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여기서 ‘허탄한 사람아’란 말은 ‘어리석은 사람아’란 뜻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매우 신랄한 말투로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 아무 소용없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비어 있다’, ‘공허하다’란 뜻도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다시 바꾸어서 해석하면 “껍데기뿐인 신앙생활 하는 어리석은 사람아! 너가 하고 있는 허울뿐인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있다고 말만하고, 정작 삶에서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가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선행으로 나타나는 진실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오드리 여사는 아직도 날마다 수잔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살아갑니다. 전신장재 뇌성마비를 걸린 수잔이 간질병까지 걸려 15분마다 정신을 잃을 때면 딸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오드리 여사는 자신이 살던 집을 수잔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녀의 큰 딸 킴벌리와 할머니를 보고 자란 손녀들이 이제 오드리 여사를 이어서 수잔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아무런 보상도 줄 수 없고, 갚을 수 없는 연약한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헌신하도록 만들었을까요?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사랑의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1. 진짜 믿음은 나의 전부를 헌신하게 만듭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진짜 믿음일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어느 정도 헌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길 수 있습니다.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진짜 믿음은 하나님께 전부를 헌신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려줍니다. 첫 번째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는 해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지체 없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하나 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칼로 죽이는 일을 지체 없이 할 수 있었을까요? 야고보는 아브라함에게는 진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면 아들 이삭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까지 믿었던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이죠? 히브리서 11장 17-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히 11:17, 개정)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 11:18, 개정)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9, 개정)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전부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전부를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부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예로 등장하는 두번째 사람은 여리고 성에 사는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그녀는 여리고 성을 살피기 위해 몰래 들어온 두 명의 이스라엘 정탐꾼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습니다. 경비병들이 와서 정탐꾼을 수색하였습니다. 잘못하다가 여리고의 병사들이 라합이 숨겨준 정탐꾼들을 찾아내기라도 하면 그녀도 죽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라합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이시며, 그분이 돌보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 말씀을 봅시다. “(히 11:31, 개정)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했고, 라합은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일들을 실행했습니까? 객기였습니까? 도박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의 전부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연애할 때 교제하고 있는 상대방이 내 결혼상대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남녀의 관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전부를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전부를 헌신하지 못합니까? 상대방과 결혼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제하는 연애상대가 내 결혼상대라는 확신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내 전부를 헌신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내 전부를 다 맡기지 못합니다. 일부는 드릴 수 있어도 전부는 못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확실해지는 순간, 우리의 헌신은 또 다른 차원으로 성장합니다. 내가 가진 전부를 주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고, 내 전부를 드려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삶 전부를 쏟아 주님께 헌신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에 대한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삶입니다.

1990년대 중반 MBC 기자 출신으로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낸 조정민이란 분이 계십니다. 보도국 부국장, iMBC 대표이사 등 언론사에 무려 25년간 몸을 담았습니다. 그는 꼬박꼬박 새벽기도에 나가는 아내가 혹시 광신도가 아닐까 의심이 들어 아내 감시하러 교회 나갔다가 47세에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고 불과 몇 년 안 되어 50을 넘긴 나이에 돌연 평생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미국 보스턴 고든코넬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살아서 시무하실 때 온누리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2년도 60이 넘은 나이에 [베이직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조 목사님이 한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렇게 자기 인생을 요약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려고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을 바꾸려고 ‘매’를 들었고, 쉰에야 바꿔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 일주일 잠입취재 하다가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취재하러 온 기자가 묻습니다. “목사님, MBC 사회부 기자에서 앵커로, 또 방송국 대표이사의 자리까지 무려 25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돌연 늦깎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다 내려놓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정치인의 꿈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쉽게 포기가 되던가요?” 조정민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어려웠죠. 몇 심 년을 한 가지 꿈을 향해 살아왔으니까 아깝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것이 답이다!’, ‘이것이 길이다!’라고 생각했을 때 바꾸는 게 어렵지 않아요. 내가 가진 걸 내려놓긴 어렵지만 더 좋은 걸 붙드는 순간, 부지불식 간에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려 버리게 되요.” 조정민 목사님의 간증처럼,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을 믿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께 내 전부를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은 본질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더 좋은 걸 붙들면 내려놓을 수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울리스’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소울리스, 말 그대로 영혼이 없다는 뜻입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하기 싫은 일을 매일 똑같이 되풀이하니까, 매너리즘에 빠져서 꿈도 소망도 없이 버튼을 키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 부품처럼 영혼 없이 일하는 모습을 가리켜 소울리스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한 신문기사에서 “갈수록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영혼 없이 인생을 쳇바퀴 돌아가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소울리스로 살아가지 말고, 소울풀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마음을 담아 영혼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것 만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허무함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울리스로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교회 다니는 참된 목적을 상실한 채, 신앙의 메너리즘에 빠져서 영혼 없는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껍데기 믿음만 가지고서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 믿음, 참 믿음을 가집시다. 어려운 이웃들과 내가 가진 시간과 물질을 계속해서 나누며 살아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내 전부를 헌신할 수 있는 삶이 될 때 비로소 우리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되며, 우리 영혼은 하나님으로 소울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가득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