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4 불의한 이익 앞에서 (삼하 4장 1-12절)

        

본문은 사울 왕조가 막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을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은 군대장관 아브넬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이 혼란의 틈을 타, 바아나와 레갑 두 형제가 이스보셋 왕을 암살핬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후손들을 버리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이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사울은 왕으로 지냈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더디 진행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음으로써 사울 왕조를 버리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해서 모든 경우 그 말씀이 곧바로 실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당장 성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성취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수일이 걸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수 백 년에 걸쳐 성취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계획, 주님께서 주신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당장 내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거나, 주님의 선하심을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점진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그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한편 이스보셋을 암살했던 두 명의 장수, 레갑과 바아나는 다윗 왕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려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밤새도록 다윗이 머물고 있는 헤브론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스보셋을 죽인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원수를 갚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삼하 4:8, 개정)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분명 이 두 사람이 이스보셋을 죽인 이유는 다윗에게 큰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마치 자신들의 암살이 하나님의 뜻이며,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왕을 죽인 반역죄나 살인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구가 되어 의를 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왕이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 몰래 들어가 왕의 목을 배어 암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죄가 없고, 오히려 전쟁을 그친 영웅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한 거룩한 용사라고 스스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현대인들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 전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요구하셨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속담에서 볼 수 있듯이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어떠한 것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이 세상의 가르침은 매우 비성경적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군주인 이스보셋을 비열하게 암살하고도, 마치 자신들이 거룩한 신앙인이요, 여호와의 귀한 도구가 되었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레갑과 바아나의 모습 속에는 결과만 좋으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이 시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수단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결과를 들이미는 레갑과 바아나 형제의 비열함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사울을 죽였다고 소식을 전하며 상 받을 것을 기대한 아말렉 청년을 처형한 일을 회상합니다. 마찬가지로 레갑과 바아나는 침상에 누워 잠을 자고 있던 의인을 죽인 악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살인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마땅히 여겨 즉시 이 악인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킨 것을 그 어느 누가 인정합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눈앞에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있더라도 과정과 수단이 불법이거나 불의한 것이라면,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미련한 것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 왜 그렇게 손해보고 살아?” 그러나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미련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것이 더 낫습니다. 결과만큼 과정과 방법도 중요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 자신이 왕만 되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과정을 주님의 뜻대로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