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 [야고보서-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시리즈 (2) 관계에서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1-13절)

 

제가 세 가지 단어를 드릴테니 눈을 감고 속으로 한 번 이 단어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평화, 소망, 정의…”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 소망, 정의 이런 단어들은 머리 속으로 이미지가 두루뭉술하게 떠오르기는 하는데, 구체적으로 “이거다”하고 떠오르지는 않죠? [추상명사]라 그렇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제가 다른 세 가지 단어를 드릴테니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속으로 한 번 이 단어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코끼리, 바나나, 고양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야기하면 이미지도 색깔도, 형태도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이것은 [물질명사]라 그렇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믿음’은 앞서 말씀드린 평화, 소망, 정의처럼 [추상명사]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 하면, 두리뭉실 하지만 그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어떤 모습인가 하고 생각하면 그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 추상명사인 믿음이 우리 일생생활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 야고보는 만일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모습이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가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 외적인 요소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오늘은 그 중에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외적인 요소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2:1, 개정)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가 사람을 외적 조건에 따라 차별 대우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외적 조건이란 용모(생김새), 신분, 직업, 성별, 경제 능력, 사회적 지위 등 세상 속에서 사람을 구분 짓는 여러가지 기준들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외적 요소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고 진심으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야고보는 한 가지 이야기로 차별하는 모습을 예로 보여줍니다. 어느 날 새로운 두 사람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은 좋은 옷에 금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 당시 금반지는 값비싼 사치품이라 일반 서민들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금가락지를 손에 끼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온 사람은 권세 있는 관리이거나 유력한 부자임을 말해줍니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만 해도 중세 시대 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벌 옷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입는 옷과 교회 갈 때 입는 옷 딱 두 가지입니다. “Everyday wear” 하고 “Sunday best” 라고 불리는 옷입니다. 옷이 너무 귀하다 보니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 갈 때 입는 옷은 닳지 않도록 평상시에 입지 못했던 것이죠. 천년 전에도 이러한 사정이었는데,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의 시대인 본문 말씀 속 시대에도 옷은 매우 귀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옷이 얼마나 귀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 로마 병사들이 사형수인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다 가지고 갔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교회에 예배하러 들어오면서 손에 금가락지와 화려한 옷을 입고 온 이 사람은 상당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부자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그런 면에 압도당하기를 바라는 허식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더럽고 남루한 옷을 사람은 어떻습니까? 갈아입을 옷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이 꾀죄죄합니다. 옷차림과 모양새가 몹시 지저분하고 궁상스럽습니다.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없이 경제적으로, 사회 신분적으로 천한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제시하는 문제는 이 두 사람이 교회를 찾아왔을 때 성도들이 보여 준 반응이었습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을 입고 온 사람에게 주목하고 그를 좋게 눈 여겨보고 좋은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를 모셔와서 상석에 앉으라고 배려를 해줍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보면 집과 회당에는 VIP용 자리, 상석이 있었고 그 자리는 귀하게 여겨지는 손님들이 앉았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초대 교회 안에서도 다소 동일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부자들에게는 이런 류의 높은 자리를 권하였으나, 이와 반대로 가난한 자에게는 자리를 내주기는커녕 그들을 서슴지 않고 홀대하였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고 교회 온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은 좋은 자리에 앉게 하더니, 남루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온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태도로 대하고 있습니다. “거기 서 있든지, 여기 발판에 앉던지 하세요!” 야고보는 이 예화에서 가난한 자를 자기보다 낮은 곳에 앉게 하는 성도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 그가 가난한 자를 자기 보다 낮은 자로 깔보고 업신여기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퉁명스런 목소리로 “당신은 저기에 서 있든지 여기 내 발 밑에 앉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사람을 외적 요소로 차별하는 태도는 예수님 믿고 따르는 성도에게 나타날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약 2: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옷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로 와서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저기에 서 있든지 내 발 밑에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는 성도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가 가진 직관과 지식, 경험에 따라 사람들을 카테고라이즈(분류화)합니다. 이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구나?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학식이 많은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배움이 짧은 사람이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 속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가 상대방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구분하고 파악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또 필요합니다. 성경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

첫째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절대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 1:26, 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개정)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존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존엄성은 인간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든지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세 있는 높은 자나 사회적 약자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끔찍한 교통 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어 깨어나지 않고 수년간 병원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환자라고 해도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라는 존엄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생명경시 풍조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6년 5월, 중국 산둥성에 위치한 한 쇼핑몰 4층 테라스 모퉁이에 50대 한 중년 여성이 목숨을 끊으려고 위태롭게 앉아 있었습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곧바로 경찰과 소방대가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에게 접근해 구조할 길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물 아래에는 이 여성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와 노점상들이 뒤섞여 있어 에어쿠션을 설치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건물 아래에 모인 구경꾼 사이에서 웃음 소리와 함께 “빨리 뛰어내려!”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뛰어내리라는 소리가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다행히도 자살하려는 여성에게 몰래 접근한 중국 소방대원의 기지로 그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 여성을 자극해 극단의 상황으로 이끌 수 있었던 구경꾼들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는 중국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국 거제시에서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땅 주인이 최근에 땅을 판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납치해 목 졸라 살해하여 바다에다 투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살해자는 피해자의 집에 침입하여 그를 마구 때리고 노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였습니다. 그후 시체를 렌트카 트렁크에 실어 해안가까지 옮겼고, 시체가 물에 떠오르지 않도록 7.5kg 블록에 매달아 바다에 던져 유기하고, 땅주인의 통장과 도장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사적인 유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명 경시 풍조야 말로 이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살인 사건에 분노를 느끼고, 불의한 사건에 공분을 내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사람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타인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진위를 보여준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외적인 요소, 생김새, 사회적 신분과 지위, 경제적 상황 등을 기준 삼아 사람을 차별하는 편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이는 대단히 잘못된 태도이며, 야고보는 성도들의 그러한 태도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부합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2)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

우리가 믿고 섬기는 구주 예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약 2:1, 개정)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절 말씀을 원어에 더 가깝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태도와 함께 갖지 말아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가치관과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제자라면, 마땅히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신분, 직업, 빈부, 성별 등 외적 조건을 따라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은 돈이 많은 부자나 왕족이나 귀족 또는 고위층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자들, 소외된 계층들, 이방인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들 등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천대받는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적인 요소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셨는지, 심지어 당시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했습니다. “(마 22:16, 개정)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라고 여기며 그들을 혐오하고 싫어했습니다. 사람을 외적인 요소로 판단하고 차별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어 주셨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침 이 자리에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귀신 들려 병마에 시달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습니다. 한 번 이 여인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18년 동안이나 허리를 필 수 없는 자세로 살았으니, 그 몰골이 어떠했을까요? 오랜 세월 귀신들려 살아온 그녀의 외모까지 추하게 변해 버렸을 것이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더럽고 냄새나는 넝마와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모두 그를 멀리하면 멀리했지, 아무도 그녀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귀신 들린 여인을 보시고, 그녀를 불러 자기에게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touch 하지 않으려 하는 인생인데, 예수님께서 그분의 깨끗한 손으로 touch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고 사랑으로 섬기신 사회적 약자와 죄인이 어디 이 한 사람 뿐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 딸이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 각종 문둥병자들, 이방인 로마 백부장, 열 두 해 혈루증 앓은 부정한 여인, 세금 사기꾼 삭개오, 결혼생활을 4번이나 실패한 사마리아 여인 등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외적인 요소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찾아가 사랑 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님께 오는 자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을 모든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사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 평가하고 대우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야고보의 논지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가치관과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제자라면, 마땅히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신분, 직업, 빈부, 성별 등 외적 조건을 따라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춰 인간으로 오셔서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셨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를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외적인 요소를 놓고 차별대우 한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자들 등 약자들을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외면한다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과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25:40, 개정)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5, 개정)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가 볼 때 교회 내에 지극히 자는 누구입니까? 그 분들에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을 가지고 차별하지 말고,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미국 TV Show 중에 Undercover Boss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주말 프라임 타임에 CBS 체널에서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자가 매주 1200만명이나 되는, 동시간대 방송 1위인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세계 굴지의 대기업의 CEO, 사장들이 암행어사처럼 자신의 회사에 일반 종업원, 말단 직원으로 분장하고 약 일주일간 현장에 투입되어 직원들과 겪는 희로애락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입니다. 말단 일용직 사원으로 취업한 CEO와 사장들은 편의점 케쉬어, 부엌 설거지, 화장실청소, 햄버거 패티 굽기 등 밑바닥 일부터 직접 체험합니다. Direct TV의 CEO 마이크 화이트, 시카고 컵스의 구단주 Tom Ricketts(톰 리케츠), MGM 호텔의 CEO Scott Sibella (스콧 시벨라) 등 전 세계적으로 내노라 하는 글로벌 CEO 거물들이 출연합니다.

하루는 여기에 세계적인 편의점 ‘세븐 일레븐’의 CEO인 Joe DePinto (조 드핀토)가 출연했습니다. 참고로 세븐 일레븐은 전 세계적으로 약 3만 6천개의 매장을 가진 글로벌 기업입니다. 연간 수익이 약 $82 B 달러나 됩니다. 이 거대기업의 CEO 조 드핀토가 편의점에 새로운 직원으로 취업을 하게 된 거죠. 한 세븐 일레븐 직원은 새로 들어온 직원이 자신이 일하는 회사 CEO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그 앞에서 회사 욕을 하며 농땡이를 피웁니다. 편의점 물품 정리도 안 하고, 화장실 청소도 안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세븐 일레븐의 왕이라도 된 듯 행동하며, 회사의 방침을 어겨가며 자기 마음대로 편의점을 운영합니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CEO인지도 모르고, 조그마한 실수만 저질러도 그에게 핀잔을 주고, 욕을 합니다.

이후 조 드핀토가 다른 세븐 일레븐 지점에 갑니다. 거기서 Night shift로 근무하는 [와카스]라는 이름의 20대 청년을 만나 일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낮에는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와카스는 처음 만난 드핀토에게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줍니다. 밤새도록 함께 일을 하고, 따뜻하게 대해줍니다. 아침이 되자, 와카스의 아버지가 밤새도록 일한 아들이 먹을 음식을 편의점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와카스는 아무런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한 드핀토와 아버지가 가져다주신 아침 식사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 하룻밤 사이에 그가 보여준 친절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CEO 조 드핀토는 이 젊은이의 멘토가 되어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와카스를 세븐 일레븐의 consultant로 고용했습니다. 힘 없는 말단 직원으로 들어온 자신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준 청년 와카스가 보여준 진심 어린 섬김과 친절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장 8-9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약 2:8, 개정)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 2:9, 개정)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우리가 사람을 차별대우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되며, 하나님은 이에 따른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고의 법은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붙여 주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