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시리즈 (6) 이웃과 그리스도를 나누라 (요한복음 1장 40-49절)

 

서론. 레나 마리아 이야기

지난 1968년 스웨덴 중남부에 위치한 ‘하보’라는 이름의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레나 마리아]라는 소녀가 태어났습니다. 레나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의 절반도 채 되지 않게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병원 담당 의사와 주변 사람들은 레나의 부모가 중증 장애가 있는 딸을 보호소에 맡겨서 키울 것을 권유했습니다. 앞으로 20년간 아이를 집에서 돌봐야 하는데, 부모가 직접 그 긴 세월을 돌본다는 것은 엄청난 헌신입니다. 그러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레나 마리아의 두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딸이라 확신하고 가정에서 양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두 팔이 없어도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에게 큰 부담이었고,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레나 마리아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레나의 어린 시절, 하루는 집에 얼굴이 시무룩 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혹시 밖에서 친구들에게 놀림 받고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딸에게 다가갔습니다. “레나야,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엄마, 난 왜 친구가 없는 거죠?” 엄마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레나야. 친구가 없다니?” “아니, 엄마 친구가 없는 게 아니고요. 친한 친구가 없다구요. 모든 걸 애기할 수 있는 친구 말이에요.” 이 때 엄마는 딸 레나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히고는 꼭 안아 주었습니다. “레나야, 너가 친구가 없지 않아. 레나에게는 늘 레나를 지켜주는 친구가 있는 걸” “누구요?” “바로 예수님이셔, 늘 레나와 함께 계시고, 늘 레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지” “예수님은 내 눈에는 안 보여도 늘 예수님이 날 도와주신다는 거죠? 알았어요, 엄마 그럼 나는 외롭지 않아요.” “외롭지 않구 말구.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은 항상 함께 계신단다” “엄마, 그럼 이제 레나가 친구들을 도와줄께요. 레나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까” 이처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신앙교육을 통해 레나는 일찍부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성인이 되었어도 30cm도 채 되지 않은 레나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의 사랑으로 그녀는 수영, 바느질, 십자수, 요리, 피아노 연주, 운전, 찬양대 지휘자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3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했던 레나는 세계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50m 배영 종목을 포함해서 무려 4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88년 서울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때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활동했고, 스톡홀름 음악대학에서 현대음악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가스펠 가수로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88년 스웨덴 국영방송에서 ‘목표를 향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레나 마리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전 세계로 방영된 이후 그녀의 삶은 또 하나의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그후 레나 마리아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스펠 공연을 하며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매년 그녀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2001년 한국방송 KBS의 [열린 음악회]라는 프로그램 특집 무대에서 그녀는 ‘Amazing Grace’를 한글 가사로 불러 현장에 있는 관객들과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가 쓴 수필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책과 콘서트로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며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레나 마리아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 놓은 만남이 바로 어린 시절 부모님이 소개해준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 동행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레나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녀의 인생은 변화되었습니다. 철이 철을 만나면 더욱 날카로워지지만, 철이 물을 만나면 녹이 습니다. 만남에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만남을 갖는 것, 그 만남과 동행하는 것이 복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만남,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안드레와 베드로 이야기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을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 곁에는 그의 사역을 돕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도 세례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 받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을 보면 이 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와 또 다른 세례 요한의 제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예수님을 따라오던 두 사람이 말합니다. “선생님, 지내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사는 곳에 두 사람을 초대하셨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찾아갔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지냈습니다. 성경은 안드레가 예수님의 집에 찾아간 시간이 열 시 즈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은 오늘날로 말하면 새벽 6시에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따라서 열 시는 오후 네 시 즈음 됩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 비끼는 시간에 두 사람은 예수님의 집에 들어간 것이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안드레는 예수님과 저녁을 먹으며 저녁 시간이 되도록 주님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그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안드레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니 실로 이 분이 바로 온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구원자 곧 ‘메시아’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 집에서 나온 안드레는 곧장 그의 형제 시몬이 있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1절에 보면 “그가 먼저…”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이 다름 아니라 그의 형제를 찾아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안드레가 형 시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런데 이 표현이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이 조금 다릅니다. “We have found the Messiah!”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께서 보내리라고 약속하셨던 구원자, 수백 년 동안 모두가 고대하던 메시아를 드디어 만난 것이죠.

기원전 490년 아테네군 1만명과 페르시아군 10만명이 아테네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42km 떨어진 평원에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누가 보아도 병력이 10배나 더 많은 페르시아 군대가 이길 이 전쟁인데, 격전 끝에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 기쁜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페이디피데스]라는 이름의 병사가 아테네까지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테네에 도착해 그는 “기뻐하라! 우리가 정복했다!” 이 한 마디를 전하고 그대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승전 소식을 간절하게 전하고 싶었으면, 죽도록 뛰어와서 승전보를 알리고 숨을 거두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의 감격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흥분에 찬 목소리로 형 베드로에게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안드레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We have found the Messiah!”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큰 소원은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직접 보는 것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지금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를 만났다고 확신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안드레가 느꼈을 가슴 벅찬 감정을 우리가 상상해 봅시다. 안드레는 그의 형 베드로의 집을 찾아갈 때 어떤 걸음걸이로 갔을까요? “어서 우리 형에게 이 소식을 전해줘야지!”하는 생각에 아마 평소보다 더 빠르고 경쾌한 걸음으로 그의 형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형 베드로를 만난 안드레는 기쁜 마음에 소리치듯 입을 열었을 것입니다. “We have found the Messiah!” “형, 형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아마 믿지 못할지도 몰라. 형 내 말을 꼭 믿어줘.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

이제 이 말을 들은 안드레의 형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한 번 이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밝은 대낮에 갈릴리 바다 나가서 열심히 고기잡이 일하고 돌아온, 베드로, 아마도 내일 잡을 고기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고 있거나, 내일 배 위에서 쓸 연장들을 손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동생 안드레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가쁜 숨을 몰아내며 하는 말이 “형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였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자기 동생 안드레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동생은 평상시에도 종교적 열심이 남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광야에서 생활하던 세례 요한을 돕기 위해 요단강 부근에서 지내며 세례 요한의 제자로 살아갈 만큼 열심이 있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안드레가 자신을 속이거나 거짓말 할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안드레 말대로 그가 메시아를 발견한 것일까?’ 베드로는 의심 반 기대 반 섞인 마음입니다. 형 베드로의 마음 상태를 눈치 챈 안드레는 곧장 그의 형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베드로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요 1:42, 개정)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께서는 본래 시몬이었던 안드레 형의 이름을 ‘반석’ 혹은 ‘돌’이란 의미를 가진 [게바]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교회의 기둥과 초석이 될 것임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바]란 이름은 반석 또는 돌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식의 이름이고, [베드로]란 이름은 같은 뜻을 가진 히브리어식의 이름입니다. 이 당시 갈릴리에서는 아람어가 주로 사용되었기에 아람어로 된 ‘게바’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이름을 열방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의 아내 사래는 열방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 사람들은 그 전과 후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게바 곧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그의 삶이 변화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만남에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들의 삶이 변화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만난 메시아를 그의 형 베드로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이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안드레와 같이 누군가의 소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안드레와 같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받는 이 시대의 또 다른 베드로가 나와야 합니다.

 

  1. 빌립과 나다나엘 이야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인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빌립을 만나시는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1:43, 개정)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3절은 “이튿날”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날 다음 날 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준 날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 날입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셨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4절에 보면 이 빌립이란 사람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운데 놓고, 가버나움은 북서쪽에, 벳새다는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벳새다는 조그마한 어촌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빌립 역시 안드레와 같이 본래 세례 요한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립은 갈릴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적으로 응답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빌립 또한 안드레와 같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이 분이 메시아이심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앞서 안드레가 예수님이 그토록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가장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도 이와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한 후 곧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성경이 빌립과 나다나엘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아 우리가 이 둘이 가족인지 가까운 친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형제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가까운 사이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성경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정확하게 계산했던 제자가 바로 빌립입니다. 셈이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 [빌립]이 헬라어식 이름이란 면에서 보면 그는 헬라 문화에서 익숙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을 때,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빌립은 유대 문화도 익숙하고 헬라 문화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능통한 1.5세와 같은 사람이 빌립 입니다.

수에도 밝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빌립, 평상시 매우 이성적인 사람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무척이나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친구가 거짓말이나 빈말할 사람이 아니고,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갈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여보게 나다나엘, 자네 내 말을 좀 들어보게. 내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분을 만났어.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야!” 45절에서 빌립이 말한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란 표현 보이십니까? 신명기 18장 15절 말씀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죽은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해 일으키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신 18:15, 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 분”이라는 표현을 보면 구약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장차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아’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다나엘에게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6절 입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는 빌립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떨떠름 했을 것입니다. 이 당시에 나사렛이란 동네는 이스라엘의 촌구석입니다. 오늘날 느낌으로 말하면 서울의 달동네, 판자촌인 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동네는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한 밤중 강도나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의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동네입니다. 그러니 이 가난한 촌 동네 나사렛에서 모든 이가 고대하던 구원자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하니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고개가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립, 자네 예수가 나사렛 출인이라고 말했는가? 그 시골 달동네에서 무슨 좋은 사람이 나오겠는가?” 이렇게 나다나엘이 말할 정도였으니, 나사렛은 정말 낙후한 지역임은 분명합니다.

자, 이에 대한 빌립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46절 말씀 한 번 다시 보십시오. “(요 1:46, 개정)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와 보라” 영어로 “Come and see”입니다. 이 표현 어디서 본 듯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38-39절 말씀을 봅시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 요한이 예수님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39절에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와 보라” “Come and see”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나머지 제자가 바로 안드레의 고향 친구이자 신앙에 열심이었던 ‘빌립’으로 추측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가 메시아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에 친구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생각이 180도 변하리라 확신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 이 때 저 멀리서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47절 입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우리가 나다나엘의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다나엘은 마음이 겸손하고, 진실하고, 말씀에 충실한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다나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속임수나 간계를 쓰지 않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평상시에도 메시아의 오심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 자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다나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도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당시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고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뜻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 때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깊은 속을 알아본 예수님께 나다나엘이 말했습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으로 부름으로 그 분이 진정 메시아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이후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둘씩 짝꿍이 있습니다. 빌립의 짝궁이 바돌로매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나다나엘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빌립의 단짝 친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몇몇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게바]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나다나엘의 이름도 [바돌로매]도 바뀐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죠. 이 추측이 맞다면, 오늘 이 사건 이후로 나다나엘은 평생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변화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는 곧장 그의 형 베드로를 찾아가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곧장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게바라는 새 이름을 얻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안드레처럼 빌립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 되심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찾아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처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처럼, 우리들도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우리 가족, 형제, 자매, 친구, 이웃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만남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복을 받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우리의 베드로를 찾아갑시다. 우리의 나다나엘을 찾아갑시다. 그리고 안드레와 빌립처럼 그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