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시리즈 (5) 이웃을 용서하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서론. 복면 강도를 용서한 박상철씨 이야기

지난 1989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조그만 보석상을 운영하던 박상철씨 가게 안으로 3명의 복면 강도가 침임 했습니다. 강도들은 주인 박상철씨를 향해 가스총을 쐈습니다. 그후 철제금고 속에 든 금 목걸이, 반지 세트, 귀금속, 보석 등 시가 2 억원 상당의 금품을 털어 날았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주인 박씨는 가게를 나와 범인들을 뒤쫓아 가 그들이 타고 있는 승용차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범인들은 박씨를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질주했고, 결국 박씨는 자동차에 매달린 채 약 50m 되는 거리를 끌려가다 급제동한 차에서 튕겨져 나갔습니다. 이 때 차에서 떨어진 박씨는 길가의 보도 블럭에 머리를 부딪혀 뇌를 크게 다쳤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유증으로 인해 수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저야 했으며, 반신불수와 언어장애라는 큰 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범인들은 또 다른 금은방을 털다가 경찰에게 검거 되었습니다. 잡고 보니 삼인조 도둑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철씨는 온 몸이 분노로 떨렸습니다. 범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마련했던 금은방은 송두리째 털렸고, 가장인 자신의 병 치례로 집안 형편은 완전히 기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경찰서에 출두한 박씨는 범인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범인들은 살인미수죄까지 추가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이 범인들의 신원을 알려주는데, 알고 보니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열 여섯 살의 나이에 가출하여 범죄의 늪에 빠진 청년들이었습니다. 박상철씨는 이후 자신의 마음에 상상해보지 못한 놀라운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청년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자신의 사업을 망하게 하고, 자신을 식물인간이 되도록 만든 흉악범들인데…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니 이 범인들을 생각하니 이 청년들도 불쌍한 영혼들이라는 긍휼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긴 고민 끝에 미움과 분노를 뒤로한 채, 범인 중 하 명을 찾아가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그 후 법원에 범인의 죄에 대해서 감형에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무기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박상철 씨는 계속해서 교도소를 찾아가 면회를 했습니다. 온갖 죄를 저질렀던 범인은 박성철씨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에 감동하여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주제는 ‘용서’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지평]

  1. 끊임없이 용서하라 (사랑은 용서하고 계속 용서합니다.)

1) 몇 번 용서하면 될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성경을 보면 이따금씩 우리가 궁금해하던 것을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신 물어 봐주는 장면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평상시 궁금해하던 용서에 대한 주제를 예수님께 대신 여쭙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여기 베드로의 질문을 유심히 관찰해 봅시다. 베드로는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형제 관계에 있는 자를 용서하는 일에 대한 주제를 예수님께 여쭙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형제]라는 단어는 1차적으로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혈연 관계의 형제 자매를 의미합니다. 2차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교회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질문을 우리 시대와 배경에 맞게 단어를 바꾸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한 교회에서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입니까?” 베드로는 외인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형제를 용서하는 주제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베드로는 많은 선심을 베푸는 듯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을 것입니다.”예수님 만일 함께 신앙 생활하는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하면 몇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될까요? ‘참을 인’자 7곱 새기면 충분하죠?” 베드로의 이 말을 잠시 묵상해 봅시다. 상대방의 실수와 잘못을 1-2번 용서해 주는 것도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려 7번이나 용서해 주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정도만 용서해도 성숙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대인배처럼 보입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 번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숫자 7일은 완전수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를 고른 것이죠. 상대편의 실수에 1-2번 용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주겠다는 베드로 정도의 마음 크기면 예수님께 칭찬받을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정도의 용서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용서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2)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끝없는 사랑을 베풀라.)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야, 일곱 번이라고 했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단다. 일곱 번이 아니라, 네 형제가 잘못하면 7X70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어라.” 지금 여기서 예수님께서 딱 부러지게 7X70 총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형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용서하라”입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끊임없이 용서하라” 용서하는 횟수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흔히들 적게는 1-2번, 많게는 2-3번 용서하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의 의무를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삽니다. 한국 속담 중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말이 있죠? “상대방의 잘못에 세 번은 참아주고 용서해 주라”는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웬만큼 큰 잘못 아니면 세상 사람들도 2-3번은 용서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용서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일곱 번도 적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끝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용서 받은 나

여기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죠? 왜 내가 항상 나만 미안해하며 살아야 하고, 분명 잘못은 상대방이 했고,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 없는데 왜 나만 항상 용서해줘야 합니까? 왜 나만 손해 보고 살아야 합니까?” 정말 왜 우리가 그렇게 까지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속 시원하게 나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상대방에게 복수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러한 물음을 가질 만한 우리들을 위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만 달란트 빚진 종]입니다.

 

1) 갚지 못할 빚을 탕감 받은 종

23-2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마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자, 이 말씀이 지금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들려주실 이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곳이 곧 천국이요, 이야기 속 임금처럼 행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어느 한 왕국을 다스리는 임금이 자신에게 큰 돈을 빌려간 종 한 사람을 왕궁으로 소환했습니다. 그 돈이 얼마나 큰지 24절에 ‘만 달란트’라고 했습니다. 만 달란트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하루도 쉬지 않고 16만년 일하고 모을 수 있는 품삯입니다. 어마어마 하게 큰 돈이겠죠?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학자들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략 오늘날 달러로 환산하면 약 $3.5 billion 달라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빚진 종에게 말합니다. “종아, 때가 되었으니, 자네가 내게 빚진 $3.5 billon을 다 갚아라!” 왕의 돈을 떼먹고 갚지 않으면 사형입니다. 종에게는 이 큰 돈을 다 갚을 재물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자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여봐라, 이 사람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고 그의 모든 소유물을 팔아 그 돈으로 내게 빚진 것을 갚게 하라!” 이 때 종이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임금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다 갚겠습니다!” 이 말을 하는 종도 알고 있습니다. 만 달란트, $3.5 billion 라는 큰 돈을 자신이 갚을 수 없다는 것을요.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일 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왕도 그의 종이 이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임금이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27절을 다시 봅시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왕은 자신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종,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종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었던 것으로 해 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학자금 부채 탕감해준다고 해서 학자금 때문에 고생하는 미국 대학생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죠? 전액을 탕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많이 탕감 받는 사람이 볼 수 있는 혜택이 2만 달러입니다. 그래도 이거 탕감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쁘겠어요? 한 번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 경제가 무척 어려워진 가장이 있습니다. 평생 부부가 쉼 없이 일해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계 부채가 쌓여버렸습니다. 변동 금리는 계속해서 올라가죠? 자라나는 아이들 먹일 음식 살 돈, 입힐 옷 살 돈도 부족합니다. 이때 만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파산 직전에 이른 우리 가정의 어마어마한 부채를 모두 다 갚아준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이 스토리가 여러분의 스토리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저라면 집에서 창문 열고 소리 지를 겁니다. 집에서 깡총깡총 뛰며 춤을 추고, 두 손을 들고 하루 종일 하나님 찬양할 것입니다. 모든 빚이 탕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만큼 큰 기쁨의 소식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 속 종이 이처럼 놀라운 자비를 임금에게서 받은 것이죠.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이 종이 그 자리에서 임금에게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두 눈에는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머리를 땅에 수차례 조아리며, “성은이 망극합니다”하고 임금님께 감사하다고 절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임금님 면전을 떠날 때에도 허리를 90가 아닌 100도 이상 연신 숙여가며 “감사하다”고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다” 인사하지 않겠습니까? 그 감격과 감사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해 영적 파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살아도 죄의 고통과 저주 속에서 살아가고, 죽어서는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아야 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갚지 못할 죄의 빚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에게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하나님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2) 갚을 수 있는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종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끔찍한 반전은 28절부터 시작됩니다. 28-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왕을 알현하고 궁을 떠난 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자기 동료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동료는 종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것이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00~ $20,000 불 정도 됩니다. 분명 큰 돈이긴 하지만, $3.5 billion에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큰 돈입니까? 작은 돈입니까? 작은 돈이죠. 종은 왕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자비는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빚진 동료에게 폭력을 동원하며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기 시작합니다. “이놈! 나에게 빌린 돈을 어서 갚아라!” 종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동료가 엎드려 사정합니다. “이보게, 조금만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 조금 전 종이 임금에게 했던 요구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종은 동료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가 꿔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왕의 신하들이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동료를 매우 딱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가서 자신들이 목격한대로 일어난 일을 자세히 보고 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왕이 종을 다시 불러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빌기에 내가 네 모든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왕은 매우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에 넣고,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임금에게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동료가 진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완악한 종은, 형제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주지 않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1. 네 이웃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은가?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이야기의 주제가 35절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35절 말씀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이야기와 같이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용서하지 못한 가족은 없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친구는 없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교회 성도들은 없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용서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지난 1991년 10월의 어느 주말, 서울 여의도 광장에는 가을 날씨를 즐기기 위하여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 21살의 청년 김용제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훔친 차를 질주하여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광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이 사고로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어린아이 2명이 그 자리에서 차에 치어 숨지게 되었습니다. 숨진 아이 중 한 명이 당시 6살 된 [윤신재]라는 어린이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당시 60세였던 서윤범 할머니 밑에서 자라던 아이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손자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한 서윤범 할머니는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손자의 장례를 치르며 끝을 모르는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할머니 마음에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할머니는 범인 김용제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사회에 불만이 있든지, 차를 몰고 와 아무 연고도 잘못도 없는 어린 손자를 치어 죽인 죄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매일 눈물과 원망과 분노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사고가 있던 날 광장으로 손자를 데리고 간 며느리까지도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며느리 또한 지식을 잃은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며느리가 불쌍하다고 생각이 드니 원망도 차츰 사라졌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원망을 걷어내자, 이번에는 가해자 김용제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서윤범 할머니는 범인 김용제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 검사실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김씨는 할머니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알고 보니 그는 어린 시절 맹아학교에 다녔을 만큼 시력이 나빴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린 시절 자살했습니다. 형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말 그대로 무일푼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을 홀로 버려 두고 가출했습니다. 김용제는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시각장애인이란 이유로 성인이 되어서도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도 사회도 그 누구도 김씨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사건 직후 취재한 기자에게 김용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때문에, 엄마라도 있었으면 제가 정말 이렇게까진 않됐는데…” 특히 어린 시절 그를 돌봐준 엄마가 없었다는 사실이 서 할머니에게는 마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김용제의 딱한 사연을 알게 된 서할머니는 법원에 김씨의 선처를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편인 할아버지가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세상을 뜨게 되고, 자식을 잃은 며느리도 암으로 고생하다 끝내 숨지는 불행이 겹치자, 할머니의 마음은 다시 돌아섰습니다. 손자를 치어 죽이고, 한 가족의 삶을 비극으로 부셔버린 범인 김용제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분노와 용서 사이를 몇 차례나 오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할머니는 가슴 미어지는 아픔을 딛고 김씨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살인자 김씨가 불쌍한 사람이며, 그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할머니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서윤범 할머니는 부모가 없는 김씨를 자기의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하나님꼐 무릎 꿇고 사형 선교를 받은 용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구치소에 가서 김용제가 춥지 않도록 솜옷을 넣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6살 난 손자를 죽인 사형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새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옥바라지까지 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용제가 눈이 나빠서 재판을 받으러 나갈 때 발을 잘 못 디디는 것을 보고는 교도관에게 안경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도관님 “용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경을 전해주세요.” 교도관은 손자를 죽인 범인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벌은 내가 주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는 것이지요.” 할머니는 용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법원은 사건이 있은 후 7년 뒤인 1997년 12월 법원은 살인자 김용제의 사형을 집했습니다. 김씨는 죽기 전에 서윤범 할머니와 마지막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용제야, 잘못한 게 뉘우쳐지니?” 김윤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 후회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 했습니다. “제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깨우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살인자 김용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감옥에서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를 취재했던 기자도 그가 새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사형집행으로 죽은 것이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세상과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여 삶을 포기하고 사람을 죽였던 흉악범으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까? 서윤범 할머니가 보여준 용서와 사랑이었습니다.

손자를 차로 치어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서윤범 할머니는 이 불가능한 사랑을 이루어 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할머니 마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김용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서윤범 할머니와 같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용제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 관계의 갈등이 없는 공동체에서 지내고 싶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공동체의 단위가 가족입니다. 이 세상 갈등이 없는 가족이 있습니까? 아무리 겉에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안에 들어가 보면 갈등이 있습니다. 물론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가느냐에 따라 행복한 가정이 되기고 하고, 불행한 가정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갈등이 없는 가족은 없다는 것이죠. 내가 의도하든 안 하든 우리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임종을 앞두고 그간 살면서 쌓아왔던 감정과 앙금을 푸는 가족들도 있습니다만, 죽으면서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 버리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다투고 미움과 분노로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형제 간에 부모의 유산 때문에 피 터지게 싸우고 결국 형제 간의 의를 끊고 돌아서서 평생 원한을 품고 남보다 못한 사이로 살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갈등이 없는 가족이 없듯이, 갈등이 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모든 가정은 그 안에서 갈등을 겪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살아가듯이, 모든 교회는 그 안에서 갈등을 겪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받지도 않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용서하기로 결단해야 하는 여러분의 김용제는 누구입니까?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여러분, 백 데나리온 빚진 여러분의 용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형제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끝없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고, 또 용서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여러분의 용제를 용서하십시오.용서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들을 용서함으로써 여러분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