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시리즈 (4) 이웃을 존중하라 (로마서 12장 9-21절)

서론. 요리를 사랑한 [줄리아 차일드]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써 전 세계 다양한 민족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요즘 같이 Youtube가 있어 조리법을 상세히 배울 수 있는 시대에는 새로운 요리들에 대한 문턱이 많이 낮아져서, 타국의 대표적인 요리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는 요리를 책과 글로 배워야 했기에 새로운 요리를 도전한다는 것은 실패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익숙한 요리를 즐겨먹어도 새로운 요리는 잘 시도하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프랑스 요리를 대중적으로 알린 분이 바로 [줄리아 차일드]라는 요리사입니다. “전설의 프렌치 쉐프”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는 사실 처음부터 요리를 잘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뉴욕의 평범한 사무직 여성이었습니다. 미식가인 남편의 입맛을 위해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요리를 처음 배웠습니다. 그것도 30대의 마지막인 39살에 말입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한 요리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요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죠. 요리를 배운 지 8년 뒤인 47살에 첫 요리 책을 출간하고, 50세가 되어서 TV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든 렘지]라는 스타 쉐프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핫한 요리사 하면 바로 [줄리아 차일드]였습니다. 그녀는 TV 프로그램 [프랑스 쉐프]를 통해 미국 주부들에게 전통 프랑스 요리와 새로운 미국식 요리 기술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하였고, 그녀의 꼼꼼한 조리 과정 설명과 즉흥적인 유머로 미국 전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9년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이 영화 [줄리&줄리아]에서 이 전설과도 같은 프랑스 쉐프 [줄리아 차일드]의 역을 맡게 됨으로써 그녀의 삶이 재조명되었습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한 요리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요리에 많은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녀는 요리를 어렵게 생각하고 실패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리하는 법을 배우세요. 새로운 레시피들을 도전해 보세요. 여러분의 실수로부터 배우고, 용기를 가지고 무엇보다도 즐거운 시간을 가지세요!” 워싱턴 DC에 가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란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1년 평균 다녀가는 관광객만 약 9-10million(9백만에서 천만 명) 정도 됩니다. 이곳은 인간의 기원부터 미래 모습까지 담고 있는 인류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바로 이 박물관에서 줄리아 차일드의 음식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기념하고자 그녀의 요리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평범했던 한 여성이 늦은 나이에 배운 요리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미국의 음식 문화를 놀랍게 바꾸었음을 기념하며 그녀의 삶이 가져다 준 음식 문화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것입니다.

한 평생 요리를 뜨겁게 사랑한 한 여성의 삶이 귀감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미국 요식업계의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찐하게 사랑하면 그 때 세상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 평생 무엇을 찐하게 사랑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남은 인생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해보고, 내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도 해보고, “앞으로 이런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세워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성도들을 사랑하라

1) 형제 자매를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라.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관계는 바로 성도들 간의 관계입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0, 개정)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한 부모 밑에서 낳고 자란 사람들을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한 아버지를 둔 하늘 가족입니다. 성도들은 서로가 형제요 자매인 셈입니다. 나에게 형, 오빠, 누나, 언니, 남동생, 여동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함께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가장 큰 도시가 바로 [필라델피아]입니다. 본래 [필라델피아]란 이름은 그리스어입니다. 사랑이란 뜻을 가진 단어 ‘필로스’와 형제를 뜻하는 단어 ‘아델포스’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가 바로 [필라델피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그리스어 성경으로 보면 “필라델피아 하여라”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한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나의 형제, 나의 자매, 나의 혈육, 나의 가족처럼 여기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성심 성의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교회에 명령하신 [필라델피아], 형제 사랑의 삶입니다.

특별히 10절 말씀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이해서 설명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상대편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편을 높여주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또는 신체의 미모 등을 따져가며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란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의 가장 큰 덕은 무엇입니까?”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하는 덕목이 무엇인지 물어본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은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상대방의 재산, 사회적 지위, 직업, 나이, 외모 그 어떠한 이유로도 그를 무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10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겸손한 필라델피아]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상대방을 더 나은 존재로 여기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 바로 이 겸손한 필라델피아가 성도가 또 다른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 주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생각과 마음으로만 사랑해서는 안 되겠죠?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도 있어야 합니다. 13절 말씀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롬 12:13, 개정)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여기 “쓸 것”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결여된 것”,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해 굶주린 사람들, 병고에 시달리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모가 돌봐 주지 못해 홀로 놓인 아이들과 같이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인 우리가 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원하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공급하며”라는 말은 “함께 겪다” 또는 “참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필요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움켜쥐고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내어놓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이웃들과 나누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종은 내가 울려야 종이 되고, 사랑은 내가 표현해야 사랑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눈에 보이도록 표현할 때 참 사랑이 됩니다. 성도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삶, 고통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이웃들을 사랑하라

         우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이웃들을 사랑하는 자세에 대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1)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라

이웃들을 사랑하는 첫번째 자세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기뻐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슬퍼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슬픔에 동참합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든지 없든지 그를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하는 삶입니다. 재앙 당한 사람을 보고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든지 없든지 그를 위로해 주고 함께 아픔을 나누는 삶입니다. 사실 기쁨이 큰 나머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의 성공 이야기를 들으면 배도 아프고, 질투와 시기심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타인에게 발생한 불행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고소해 하며 내심 기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참 이웃 사랑은 이웃의 성공을 싫어하거나 시기하지 않는 것이며, 타인의 불행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이 머무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픔이 머무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삶이야 말로 지금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랑의 참된 모습입니다.

 

2)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이웃들을 사랑하는 두 번째 자세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13절 후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롬 12:13)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나그네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도시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따금씩 나그네들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면, 본래 타 주에 살고 계신 분들이신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아들, 딸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방문하신 분들입니다. 혹은 직장 또는 학교 공부 때문에 1-2년간 미국에 머물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나그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손님들과 같은 나그네들에게 친절히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그네들은 잘 대해주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떠나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 주어도 나에게 다시 사랑이 메아리처럼 돌아올 것이란 보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내가 사랑을 부어도 상대방이 내 사랑을 받고 떠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계산을 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지역에 오늘 있다가 내일 떠나가는 나그네 일지라도, 잠시 내 삶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도, 성도들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들을 잘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그가 사는 지역을 지나가는 세 명의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베풀며 잘 대해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 역시 굶주리고 잠 잘 여관을 찾지 못해 광장에서 있는 두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모셔 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잠 자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두 사람도 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 말씀을 봅시다.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하나님은 손님 접대를 극진히 한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에게 그들이 나그네들에게 베푼 복 이상의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나그네들을 잘 대해줄 때 하나님께서 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베풀어 주는 사랑을 되갚아 주지 못할 사람이라도, 우리 곁에서 잠시 함께 지내다가 곧 떠날 사람이라도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필요를 채워줄 것이 있다면 나눠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3) 비천한 사람들과도 기꺼이 교제하라

이웃들을 사랑하는 세 번째 자세는 비천한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롬 12:16, 개정)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과거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민들은 비천한 신분의 노예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를 예로 들면, 양반들은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들을 천하게 여기며 그들을 무시하고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불가촉천민, 즉 다른 사람들의 몸에 결코 손을 대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가장 낮은 천민으로 여겨지는 ‘달리트’라는 계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보면 제일 낮은 계급이 농노, 육체 노동을 하는 [수드라]입니다. 그런데 ‘달리트’는 수드라 보다도 낮습니다. 얼마나 천대받는 계급인지 아예 카스트 제도에서도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인도에서 달리트 계급은 불경하고 천하게 여겨져서 그들의 몸이 다른 계급을 가진 사람들의 몸에 닿아서는 안 되었고, 심지어 말을 거는 것도 금지 되어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달리트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 보듯 혐오하는 것이죠.
이처럼 초대 교회 시대에는 자유인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노예 신분을 가진 성도들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의 사람들 높은 계급과 지위를 가진 자들과 평민과 노예 신분의 성도들 간의 교제가 단절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단절은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함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이 말했던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 기억나시죠?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은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회의 하층민인 노예들을 염두하고 그들과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 일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간 자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비천하게 여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고아와 과부들, 세리와 죄인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친구라 불리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으시고, 또한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조금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더욱 가까이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계급, 사회적 신분, 형편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차별하지 아니하고 가까이 지내며 교제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1.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는 지금까지 성도를 대하는 자세, 이웃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바로 ‘원수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정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니 한 번 그렇게 살아 보기로 도전해 봅시다.

 

1)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라.)

원수를 사랑하는 첫번째 자세는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입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4, 개정)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우리는 아마도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은근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 바울이 이 본문을 기록했을 때 교인들을 박해하는 자는 문자 그대로 성도들을 잡아서 구타하고, 감금하고, 사형시킨 박해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매, 자녀들, 교회 형제 자매들을 잡아 죽인 박해자들입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습니다. 이런 원수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는 것이요? 여러분이라면 가능하시겠어요? 얼마나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으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핍박자들에 대해서 기도로 대응해야 합니다. 박해가 클수록 사랑도 더욱 커져야 합니다. 한 번 더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자기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인 스데반 집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그에게 그 딱딱한 돌을 던져 죽게 만들었던 박해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분명 실천하기 쉽지 않은 높은 수준의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는 맙시다. 아주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시늉이라도 한 번 해봅시다.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도전해 봅시다.

 

2)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 악을 선으로 갚아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사랑하는 두 번째 자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17-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2:17, 개정)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 개정)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사람의 본성입니다. 내 눈을 다치게 한 원수의 두 눈을 멀게 하는 것, 내 이를 부러뜨린 원수의 윗니 아랫니 모두 부러뜨리는 것, 그것이 곧 악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어떤 경우에도 복수나 보복하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도리어 원수들에게조차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선한 일, 흠 잡힐 것이 없는 도덕적인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원수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를 지향함으로써 성도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참된 것임을 알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시도를 모두 금지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친히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9-2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롬 12:19, 개정)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정)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정)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악을 심판하시는 유일한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악인과 원수들을 심판하려고 하는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억울함을 갚아 주시고, 악인들과 원수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과 보응 그리고 재앙을 공의롭게 내려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께 맡기고, 동시에 계속해서 원수들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내 원수 되는 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거든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가 마실 것이 없어 목말라 하거든 내가 가진 마실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에게 지지 아니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지난 주에 기도의 7가지 원을 배웠죠?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는 길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이번 한 주는 사랑의 지경을 함께 확장해 봅시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와 가족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고, 우리가 속한 지역과 사회에 있는 이웃들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기로 결단해 봅시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사랑하는 방법들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든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풍성하게 향기롭게 피어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