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7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시리즈 (2) 사랑은 어떻게 생겼나요?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서론. 유명인들의 유언

[유명인들의 유언 모음집]이란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삶을 마치며 남긴 마지막 말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말답게 감동스러운 말을 남겼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미국 여성 작가로 인종 차별과 평생 싸우며 인간애를 주창하던 헤리엇 비처 스토 부인은 자신을 돌봐주던 간호사들에게 “사랑힙니다”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가난한 자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는 죽기 전에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으로 재치 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형수인 엘리자베스 보나프르트도 재미있는 유언으로 자주 인용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죽을 때 누군가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하고 말하자, 그녀는 “세금도 피할 수 없지”하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동양사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그렇게 가는구나”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 기독교 부흥의 주역이자, 미국이 낳은 최고의 신학자라고 평가받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나의 친구 예수님은 어디 계시지요?” 하고 그의 마지막 호흡까지도 예수님을 찾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도 언젠가는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마지막 말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으십니까?

사실 이런 질문을 할 때면 개인적으로 실소를 머금케 되는 이유는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지막 한 마디고 뭐고, 평상시에 하는 말이나 잘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일상을 살아가며 남기는 흔적들이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 놓는 가장 확실한 유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죽은 시점에서 세상에 우리 이름이 남는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고 남아 있을 가치를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영혼들을 사랑한 발자국과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인생. 그것이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말씀의 지평] – 사랑이 곧 존재의 의미이다.

  1. 사랑 없이는 무용, 무익, 무의미한 은사들

사랑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왜 살아갑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빵이 없는 빵집은 존재의 의미가 없고, 꽃이 없는 꽃가게는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듯이, 사랑이 없는 인생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누가 더 영적으로 뛰어난 존재인가 경쟁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경쟁하듯 하고, 성도들을 경쟁자로 보았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 받는가?’, ‘누가 하나님께 더 많은 인정을 받는가?’ 이것을 서로 싸우듯이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일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장 탁월하고 뛰어난 그리스도인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처럼 방언을 하지 못하는 다른 성도들을 깔보고 무시했습니다. 마치 세상에 왕족과 귀족이 있고 평민과 노예가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방언을 하는 자들과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심지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천사의 말과 같아 그 말이 매우 놀랍고 아름다운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말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소음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천사의 말’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방언의 은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보고 듣기에 놀라운 수준의 방언을 할 줄 안다 할지라도, 그의 삶 속에서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리’와 ‘꽹과리’는 크고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말합니다. 서양악기로 치면 심벌즈와 유사합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선율악기들은 듣기에 편안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됩니다. 그러나 꽹과리나 심벌즈 소리만 듣고 있으면 듣는 사람은 소음처럼 들릴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한 방언의 은사도 결국 사랑이 없으면 ‘소음’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죠. 이처럼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방언의 은사 뿐만이 아닙니다. 예언도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방대해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할 뿐입니다.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비밀을 다 깨닫는 신통함을 갖추고, 도서관에 쌓여 있는 저 수백만권의 책이 담고 있는 지식을 다 알고 있는 천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손에 쥐고 있어 저 크고 높은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한 사람일 될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존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섬김과 봉사와 구제도 포함됩니다.

3절을 봅시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3절은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구제로 내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생이고, 섬김이니까? 우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최고 단계의 희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무익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 구제, 헌신, 섬김 등 유익하게 여겨지는 행위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겉치레가 되어버릴 뿐입니다. 사랑 없이 껍데기만 남아버린 봉사, 구제, 헌신, 섬김은 무익, 무용, 무의미 합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 모습이 궁금합니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진 다양한 특색이 있기 때문이죠. 눈에 보이는 코끼리도 한 마디로 묘사하기가 쉽지 않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은 얼마나 더 많은 묘사가 필요하겠습니까? 장님 3사람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는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첫번째 장님은 코끼리한태 다가갔다가 넓고 튼튼한 몸 쪽에 부딪쳐 쓰러졌습니다. 그는 “코끼리는 마치 벽 같다.”고 말했습니다. 두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뾰족한 상아, 앞니를 만진 후 외쳤습니다. “매우 둥글고 부드럽고 날카롭구나?! 코끼리는 창과 닮았다.” 세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며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모두 다 틀렸어! 코끼리는 뱀을 닮았어.”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려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님이라 해도 오랜 시간 동안 코끼리의 이곳저곳 만져보게 된다면 코끼리의 모양과 형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지라도, 사랑이 가진 다양한 특징들을 알아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렴풋이 나마 사랑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 4-7절은 사랑이 가진 특징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놓았습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사랑의 중요한 특징은 모두 15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내용이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이 납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인내’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고 흠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 시작하면 점이 보이고, 흉이 보이고,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서 함께 시간도 보내고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가운데 나랑 맞지 않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오래 참고 인내하여 끝까지 품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오래참고’라는 말은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을 견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손해를 당하였을 때 그 일에 대해서 보복할 힘이 있다할지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사랑의 특징이 “온유하며”이죠? ‘온유’라는 말은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며 죄를 짓는 자에 대해서 단순히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참아준다는 명분 하에 상대방을 무시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친절히 대하고 선의를 베푸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사랑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되고 높아지는 것을 질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랑]이란 단어는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을 무시하며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들이 싫어할 만한 말이나 행동임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하는 것은 무례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상대편의 유익을 배려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예의 있게 행함으로써 함부로 내 분노를 쏟거나,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악한 감정을 품는 것입니다. 복수하고 보복하려는 저속하고 비열한 마음을 말합니다. 상대방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저주하는 것이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합니다.

7절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말씀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숨겨준다는 뜻으로 상대방이 자신에게 끼친 해나 허물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고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실망을 준 사람이지만 그대로 또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고 믿어 주고, 그에게서 좋은 부분을 볼 것을 소망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청중의 지평] – 누구나 사랑으로 살아간다.

한국의 어느 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오는 과제를 내어주었습니다. 교수님이 주신 질문은 “내일 죽어야 한다면?”이란 황당한 질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특유의 영특함과 순발력으로 재미있고 기발한 대답들을 했습니다. “내일 죽어야 한다면, 설악산에 올라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마음 속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 갖고 오겠습니다.” “내일 죽어야 한다면, 죽어서 총각 귀신이 되지 않게 오늘 여자 친구와 결혼하겠습니다.”    한 여학생이 제출한 글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사랑해요’라고 말을 하겠습니다.” “사랑해요” 참 아름다운 말이지만, 동시에 참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한국 말에 사랑한다는 말과 살아간다는 말은 어감이 비슷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고, 커피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고, 스포츠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살아가는 셈이죠. 우리는 사랑하는 일 때문에 끝없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지만, 만일 ‘살아가는 일’에서 ‘사랑하는 일’을 뺀다면 과연 무엇이 남겠습니까? 누구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이란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 사랑하며 살아가려다 보니 눈물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 없이 살아가는 무덤덤하고 무의미한 먼지 같은 인생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적용의 지평] – 아프게 짝사랑하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게 짝사랑하라” 짝사랑은 무엇이죠?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짝사랑 해본 적 있으시죠? 상대방 마음이 내 마음을 몰라주어 가슴이 아픕니다. 상대방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좋아 내 마음 다친다 하더라도 그에게 다가가고, 그에게 편지도 써보고, 그에게 선물도 쥐어 줍니다. 그 사람이 나로 인해 미소 짓고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내 행복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많은 사랑은 ‘짝사랑’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다 몰라줍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아프고 괴로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짝사랑이야 말로 성숙의 첩경입니다.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좌절감도 느끼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며 나아가는 그 짝사랑이 인간의 영혼을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프게 짝사랑하십시오.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줘도 포기하지 마시고 오래 참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견뎌내십시오. 오히려 온유하게 친절하게 그 사람을 품어 주십시오. 아프게 짝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실수했어도 개미허리 같이 좁은 마음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하수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사랑으로 품어 주십시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프게 짝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해 사랑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프게 짝사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아프게 짝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그 사랑을 나눠주며 살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4장 10-11절 말씀을 우리말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야 하는 삶의 흔적은 바로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사람들을 더욱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