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2 여선교회 헌신예배 마리아의 헌신 (마가복음 14장 3-9절)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코로나]는 전염병 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의 코와 입에서 나온 비말이 감염되지 않은 사람의 호흡과 접촉을 통해서 사람 간 전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 알다시피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격리하는 데는 전염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나병도 코로나와 그 전염 방식이 같습니다. 나병에 감염된 환자의 코와 입에서 나온 비말이 감염되지 않은 사람의 호흡과 접촉을 통해서 사람 간 전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들도 격리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과 유대 역사 속에서도 나병환자들은 공동체와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십시다. 3절 말씀을 보니, 지금 예수님께서 어떤 이의 집에 머물고 계십니까? 바로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기적적으로 치료를 받은 사람이며 또한 제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고통과 질병은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에 찾아오시고 인생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병환자 시몬도 자신의 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 때 한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이 여인이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인 마리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손에는 향유 옥합이 들려 있었습니다. 옥합은 값비싼 향수나 오일을 담아 놓는 ‘병’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옥합 안에는 “순전한 나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드]는 인도에서 수입한 향기로운 기름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옥합 안에 담긴 것이 “순전한 나드”라고 표현한 것은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물에 희석하지 않은 100% pure한 상태의 [나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들고 있던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습니다. 당시 시세로 볼 때 이 pure nard 가 들어간 병 하나를 팔면 무려 300 데나리온 이상 받을 수 있었습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 일해서 버는 품삯입니다. 300 데나리온은 1년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더 비싼 값을 하는 것이 지금 마리아가 손에 들고 있는 순전한 나드의 가치입니다. 2022년 7월 현재 기준 미국인의 평균 연봉은 약 $83,000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평균 연봉을 따지면 대략 $52,000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오늘 손에 들고 있는 이 순전한 나드 옥합의 가치를 오늘날 가격으로 환산해 보면 최소 $50,000불에서 많게는 $80,000불 이상도 더 값이 나갈 정도로 값비싼 물품입니다. 이 값비싼 순전한 나드 옥합을 가지고 마리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병 뚜껑을 열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존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흔한 관습이었습니다. 손님에게 아름다운 향을 부음으로써 그의 영혼이 fresh하도록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죠.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마리아 당신 제정신입니까? 지금 당신이 얼마나 큰 돈을 허비했는지 아십니까? 이 향유를 팔면 최소 300 데나리온 이상 받고 팔 수 있었습니다! 최소 $50,000불에서 많게는 $80,000불도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먹을 음식을 사서 나눠주지. 당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은 화를 내며 마리아에게 무안을 주며 책망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마리아를 책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이렇게 화를 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위를 놓고 분개했던 까닭은 그가 진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고 있는 자였으나, 거기 넣은 것을 수시로 훔쳐 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용해야 할 공금을 횡령한 것이죠. 때문에 만일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팔아 예수님께 드렸더라면 그의 수중으로 돈이 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수중에 돈을 벌어 들이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에 매우 아까워 그녀에게 “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향유를 안 팔았냐고?” 핀잔을 주며 그녀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부은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보여준 헌신, 곧 그녀가 값비싼 향유를 부어 주님을 섬긴 것을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헌신이 아름답고,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헌신이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것임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째서 마리아는 일년 연봉에 해당할 만큼 값비싼 그 향유를 하나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부어 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동일한 사건이 요한복음에 가면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죽은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아온 날은 그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죽은 오라버니의 시체를 미라처럼 천으로 꽁꽁 싸매 무덤에 안치 한지 4일이나 된 날이었습니다. 한치의 의심 없이 그녀가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슬픔에 빠진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무덤을 가로 막고 있는 돌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분명히 죽음으로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참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아는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요한복음 12장에 오늘 본문의 순전한 나드 옥합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 깨닫게 될 때, 주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느껴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속으로는 ‘아이고 아까워’하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요. 죽은 줄만 알았던 자기 오빠를 살려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시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신데 그 분께 드리는 그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헌신은 달라지게 됩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힘을 다하여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내 전부를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다.” 우리 코너스톤장로교회 여선교회 모든 회원분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런 귀한 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얼마 전, 한국 EBS 채널에서 촬영한 [다큐 시선]이란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이 다큐는 자녀들이 병들고 아픈 부모를 부양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김수영이란 가명으로 37살의 한 여자 분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65세가 된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머리가 터져 그만 한쪽 뇌 제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아버지의 지능이 7살 어린아이처럼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어서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거에요. 알고 보니 요양원 사람들이 아버지가 먹을 약도 잘 안 챙겨주고, 아버지가 넘어지도록 고의적으로 아버지를 다루고 있었어요. 그 사실을 깨달은 딸이 아버지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37살의 딸과, 35살의 아들이 매일 번 갈아가며 아버지를 모십니다. 30대 중후반이면 직장 가서 일하고, 자기 자식들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데만 해도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딸은 아버지 간병하느라 자기 삶이 없어졌습니다. 엄청난 헌신이죠. 그런데도 아버지 간병하는 일을 자처했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 보면서 가장 감동했던 장면은 7살의 지능 밖에 안되는 아버지가 병원에 가서 재활 치료를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관절이 굳어서 휠체어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한 발작 한 발작 걷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김수영씨의 얼굴에 환한 미소와 웃음이 띄기 시작했습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어떤 면으로 봐도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서 자신과 함께 지내며 날마다 조금씩 건강해지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기쁜 거에요. 다큐를 취재한 방송 PD가 묻습니다. “안 힘드세요?” “힘든 건 사실이에요. 많은 걸 희생해야 되니까요. 근데 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아빠가 옆에서 저하고 웃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사실 주변 사람들은 밤낮으로 힘들게 간병하며 생활하는 김수영씨를 나무라며 왜 아버지를 요양원에 안 보내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러나 수영씨는 아버지를 간병한 그 힘든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딸이 아버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상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역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청하고 안 주면 떼쓰고 화도 됩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 자녀가 성숙하게 되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여태까지 부모님에게 받고 살아오기만 했구나. 이제 내가 내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성숙하고 철든 자식들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부터가 달라지는 거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들의 공통점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십시오. 다들 하나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며 살아간 흔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비록 이집트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주님 집의 머슴처럼 헌신하며 일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주님을 위해 성전 곧 집을 지어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도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까 생각하다가 값비싼 순전한 나드 옥합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누가 그녀에게 “마리아야 예수님께 옥합을 바쳐라” 명령한 적도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마리아 스스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받으시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헌신은 억지로 강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좋아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여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아버지 날이나 어머니 날을 보면, 어린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정성으로 써 내려간 카드 한 장과 가슴에 달아준 붉은 카네이션꽃 한송이가 하루 종일 부모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봅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부모에게는 자식이 주는 사랑이 큰 기쁨이 되는 법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을 받으신 예수님은 결코 그녀의 헌신을 잊지 않고 영원토록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값비싼 향유 옥합도 아까워하지 않고 깨트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힘을 다해 헌신했을 때 주님은 그녀의 헌신을 기뻐하셨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선교회 회원 여러분, 또한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주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하는 성숙하고 복된 믿음의 자세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넘치는 복 주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