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 [역사하시는 성령님] 시리즈 (5) 성령과 동행함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서론. 12가지 인생의 법칙

전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고, 현재는 케나다의 토론토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던 피터슨]이란 분이 계십니다. 아마 [조던 피터슨]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분을 소개하고 평가한 글을 하나 읽어 보자면, “조던 피터슨보다 유명하고 영향력 있고 인기 있는 지식인은 지금 이 세계에 없다. 그리고 그보다 용기 있고 솔직한 학자도 없다.” 이렇게 이 분을 소개할 정도로 [조던 피터슨]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과 파급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최근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강의 영상과 그가 쓴 책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쓰신 책 중에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글로벌 메가 히트를 기록하게 되면서 그는 더욱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은 전 세계 45개국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영미권에서만 30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79주 연속 인기순위 Top 10을 기록했고,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 분야를 21주 연속으로 1위에 오를 만큼 그의 책은 현재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대단히 심플합니다. 책의 내용을 몇 개 인용해 보자면, [법칙 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법칙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와 같은 내용입니다. 지금 제가 읽어드린 원칙들만 들어도 무언가 특별히 창의적이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지?”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놀랍게 변화했다고 고백하는 젊은이들의 간증(?)들이 지금도 인터넷 상에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피터슨 교수의 책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변치 않는 삶의 원리들을 찾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러한 격동의 시대 배경 속에서 피터슨이 제시한 불확실한 인생을 꿰뚫는 불변의 원리들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터치한 것이죠. 인터넷 상에 올라온 이 책의 리뷰를 보면, 대부분의 책 리뷰가 그러하듯이 별 5개 중에 가장 높은 5개 아니면 가장 낮은 별 1개를 준 리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이 리뷰를 읽고 나서야 왜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지 알았습니다. 별 1개짜리 리뷰를 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책이 성경에 대한 잦은 언급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책을 썼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합니다. 별 5개짜리 리뷰를 준 사람들은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감탄하는 글들을 썼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피터슨 교수가 이 책을 출판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즈음 회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저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로 구분 짓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은 ‘신이 있다고 전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정도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었던 전 세계 최고의 심리학 권위자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 칭송 받는 피터슨 교수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법칙들을 연구하고 기록한 책의 내용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한편으로 뿌듯함을 전해줍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진리가 없어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지평]
물 속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가 물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어쩌면 우리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기독교의 진리가 가진 위대함을 잊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가 가진 진리의 위대함은 그 단순성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 조문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명령이 총 248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부정문이 총 365개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율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내용이 총 613개나 됩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대단히 많고 복잡해 보이죠? 그러나 613개나 되는 율법의 많은 내용들을 4단어로 압축하고 요약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성경의 원리를 두 가지로 압축 요약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 읽어 봅시다. 마태복음 22장 37-38절 말씀입니다. “(마 22:37) [우리말성경]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 22: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마 22:39)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마 22: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원리요 법칙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기적인 마음과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내적 동기와 능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라
오늘 본문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가 됩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항상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님의 훈계하심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고,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한 지붕 밑에서, 한 집에서 살아가지만 부모의 훈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녀들이 있듯이, 성령님이 그 안에 임재 하시고 함께 살아가지만, 성령님의 훈계와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셈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계속해서 성령님의 인도와 훈계를 따라 걸어가고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야 비로소 자기중심적인 삶, 탐욕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육체의 욕심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2. 육체의 욕망을 따라갈 때: 15가지 열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들의 삶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모두 15가지로 나열해 놓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 나타나는 모습이 본문에 기록된 15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15개의 목록을 나열한 후 21절에서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육체를 따라 살아갈 때 이 15가지 말고도 추가적인 다른 목록들이 얼마든지 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 15가지 항목들을 통해서 육체를 따라 살아갈 때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습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행실 15가지는 범주에 따라 [육체적인 차원], [관계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 이렇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육체적인 차원에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술취함, 방탕함이 있습니다. 음행은 ‘간음’을 뜻합니다.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사람들 간의 금지된 성적 행위나, 그런 삶을 보고 듣고 즐기는 모든 거이 포함됩니다. 더러운 것은 성적인 농담 같이 듣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듣는 이의 인격을 공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호색은 성적인 죄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탐닉하는 자세로, 성적인 부도덕과 부정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수치감을 갖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술에 취하여 살아가는 것과 방탕하게 살아가는 것 역시 육체적인 행실의 대표적인 증거들입니다.
둘째로, 관계적인 차원에는 투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열, 파당, 이단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상대방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주먹질하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편을 나누어서 다투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투기’는 다른 사람의 성취나 소유를 내가 갖고자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이단’은 서로의 의견이 불일치하여 갈등 속에서 이해관계가 같은 이들끼리 연합하거나 세력을 형성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파당’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차원에는 우상숭배, 주술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체물을 만들어서 그것을 마치 하나님처럼 섬기는 행위들입니다. 또한 약물이나 다른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을 통해서 악한 영과 교감하려는 것, 그들에게 복종하려는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육체의 행실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 후반절만 읽겠습니다. “(갈 5:21 후반절)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며 육체의 행실을 따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할 때 완전히 임하실 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체의 행실을 따라 살아가지 말도록 경고하고 또 경고합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9가지 열매
그렇다면 우리가 육체의 행실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에는 어떤 열매들을 맺을까요?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총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2-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 여기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열매 3가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열매 3가지], [나 자신과의 내면적 관계의 열매 3가지]입니다.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맺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의 열매 3가지는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자기희생적 사랑이며 불변하는 사랑입니다. 또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아버지의 이 놀라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희락]은 불행한 외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삶의 어려움, 상황의 결핍,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사라지지 아니하는 지속되는 깊고 풍성한 만족이 바로 희락입니다. [화평]은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주와 우리의 삶을 통치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오는 내적인 고요함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열매의 두 번째 범주는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맺는 열매 3가지입니다. 오래참음, 자비, 양선입니다. [오래참음]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하고 용납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인내를 강화하십니다. [자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먼저 반응하고 관용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양선]은 상대방에게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선을 행하려고 손을 내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양선은 악을 악으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용납하며 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세 번째 범주는 나 자신과의 내면적인 관계에서 맺는 열매 3가지입니다. 충성, 온유, 절체입니다. [충성]은 충성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즉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온유]는 겸손하고, 타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고집 부리지 아니하고 부드럽게 복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온유는 우리 마음 속 분노가 올바른 방향으로 표현되도록 지켜주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절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때,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죄에 대한 자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상 그 어느 민족, 어느 나라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이 사회에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 성숙한 삶의 모습을 권유하고 장려하면 했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법으로 금지하겠습니까? 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모두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성품을 점점 더 많이 닮아가게 됩니다.

 

[청중의 지평]
1.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은 무엇인가?

이처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대다수 현대인의 모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Follow your heart”입니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라”입니다. 한 번 즈음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라”언뜻 보면 참 멋진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야 말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하는 대단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세상은 “Follow your heart”를 외치지만 성경은 이와 반대로 “Don’t Follow your heart”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부패하고 거짓 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렘 17:9) [쉬운성경]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의 마음은 비뚤어져 있고 심히 악하고 아무도 그 마음 속 감추어진 동기를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하나님 보실 때 비뚤어지고 악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Follow your heart를 외치지만, 성경은 “Let the Holy Spirit guide your heart”, “Walk by the Spirit”,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서 바울이 경고했듯이 사람이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을 따라 살아가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말라고 거듭 경고하는 것은 그 길로 가면 치명적인 죽음에 이르는 낭떠러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 삶에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설탕은 달지만, 많이 먹으면 결국 몸에 해롭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잠시 잠깐 좋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에는 우리 영혼을 뜨거운 불구덩이로 떨어뜨립니다. 달콤한 설탕과 반대로, 인삼과 홍삼은 처음에는 쓴맛이 느껴집니다만, 끝에 가서는 단 맛이 느껴집니다. 몸에도 좋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고 힘들어도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면 우리 영혼에 커다란 기쁨과 만족이 찾아오게 됩니다.

2. 팩트를 스토리로 엮지 못할 때 팩트는 증발한다.
성경은 진리의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성경 속 진리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진리는 다만 증발해 버리고 말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100-1=0” 입니다. 100가지 ‘성경 지식’을 알아도 1 가지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유익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fact를 100가지를 배워도, 성경에 기록된 fact를 우리들의 인생의 story로 엮어 내지 않으면 fact는 허공으로 증발해 버릴 뿐입니다.
제 아무리 오늘 성경에서 우리가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었을지라도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길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배웠어도,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진리는 허공으로 사라지게 될 뿐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fact를 여러분의 story로 엮어 내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점차 닮아가게 되고, 우리 마음에 풍성한 생명력이 샘 솟게 될 것입니다.

 

[적용의 지평]
1.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사람은 ‘사랑’을 남겨야 한다.

2020년도 기준 한국인 평균 수명이 남자는 80세, 여자는 86.5세입니다. 2030년 즈음 되면 대한민국 여자의 평균 수명이 세계 최초로 90세가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평균이 90세니까 100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전에는 65세가 정년 은퇴였는데,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은퇴 연령도 늦어지고 있습니다. 65세에 은퇴하신 분들도 ‘이제 은퇴 후 남은 삶을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라는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100년이란 긴 세월을 이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어떤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미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은 ‘사랑’을 남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성경은 분명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사랑 온도계]는 지금 몇 도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화씨 90-100도가 넘는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40-45도의 추운 겨울 같이 냉기가 도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화씨 32도 (Freezing point) 밑으로 내려가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싸늘하고 냉냉하게 얼어붙어 있지는 않았습니까? 올해 우리는 과연 어떤 이웃들을 사랑하고 살아왔으며, 어떻게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보내왔는지 돌아봅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2. 성령님과 ‘어색한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진실한 소원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통제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 중에 높이 뛰기(high jump)라는 종목이 있죠? 지난 1968년 10월 20일,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이 종목에 [딕 포스베리]가 미국 국가대표로 선수가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21살의 토목공학도였던 딕 포스베리는 짝짝이 운동화를 신고 올림픽에 참여했습니다. 왼발에는 파란색 아이다스 운동화를, 오른발에는 하얀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참 괴짜 같은 미국의 이 젊은 국가대표 선수가 높이 뛰기를 하기 위해 출발선에 서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사실 1896년 처음 시작된 올림픽 높이 뛰기의 역사를 보면 선수들은 바를 넘어갈 때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뛰거나 다리를 최대한 양옆으로 찢어서 뛰어 넘었습니다. 일명 가위 뛰기(scissors kick technique) 입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 소련의 높이뛰기 국가대표였던 [발레리 브루멜]이란 선수가 가위 뛰기 기술로 매 경기마다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었습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이 있기 8년 전 즈음 딕 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연습을 하던 중 가위 뛰기를 하다가 그만 손이 부러졌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속 실험하고 연습하며 결국 새로운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이 날 멕시코 시티에 모인 8만 명의 관중들은 딕 포스베리가 높이뛰기 바를 뛰어넘는 장면을 보고 말 그대로 ‘jaw-drop’,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딕 포스베리 선수는 바를 넘어갈 때 다른 선수들처럼 다리부터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뒤로 돌면서 머리부터 바를 넘어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배면 뛰기’(fosbury flop)라고 부르는 기술이 이 때 처음 전 세계에 생중계된 것이죠. 장내에 있던 8만명의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어떤 이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올림픽을 시청하던 전 세계 스포츠 팬들도 높이뛰기의 혁명을 일으킨 포스베리 선수를 보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딕 포스베리는 이 신기술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습니다. 지난 올림픽 72년의 역사 동안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스타일의 점프 기술을 포스베리가 멋지게 성공시킨 것이죠. 사실 포스베리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전까지 당시 미국의 코치들은 그의 배변 뛰기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비난 섞인 이야기를 자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이 멕시코 시티 올림픽 이후 10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선수들이 배면 뛰기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함께 살펴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수십년간 신앙생활 해 왔지만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이 어색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항상 옆으로 넘어가던 것을 뒤로 넘어가라고 하면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또 다른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때입니다. 여태까지 수십년 동안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온 삶이라면, 이제 한 번 우리 새로운 삶의 자세를 시도해 봅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연습하십시다. 포스베리도 처음에는 뒤로 뛰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수 차례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며 서서히 완성시켜 나간 것이죠.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 봅시다. 우리의 삶에 성령님을 초대하십시다. 성령님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오. “성령님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깨어 있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또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은혜로운 간증들이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