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5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시리즈 (22) 34문 양자 됨은 무엇인가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문34. 양자됨이란 무엇입니까?
답34. 양자 됨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우리는 양자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모든 특권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책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권세]라는 헬라어 단어 [엑수시아]는 ‘존엄’과 ‘특권’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 아버지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라면, 나는 대통령인 아버지의 자녀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특급 대우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제가 하는 말,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제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가지 특권도 주어지겠죠. 미국으로 따지면 백악관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또한 해외에 아버지와 함께 나가면 귀빈 대우를 받게 됩니다.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대통령이라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우리에게는 놀라운 존엄과 특권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엑수시아] ‘권세’입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니, 사탄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죄의 저주도 사망도 우리를 멸하지 못합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죄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으나,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 마침내 죄와 사망은 우리에게 그 어떤 주장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특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나 백악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 딸들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하나님의 양자 된 우리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기쁘게 여겨 주십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그린 못난 그림도 부모는 감탄하고 좋아하며 자석을 이용해서 냉장고에 붙여 놓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죄악으로 물든 우리들의 부족함 많은 예배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예배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얻게 되는 특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일랜드 총기 난사 사건에서 죽은 아버지 케빈 매카티가 2살된 아들 Aiden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아들의 몸을 감싸고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던진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넘실대고, 하늘이 무너져도 주의 자녀들은 요동하지 않으시는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보호하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엄과 특권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우리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선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만든 그 [믿음] 조차도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은 분명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가진 믿음 조차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the gift of God,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만, 무한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영 죽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구가 약 80억명 정도 됩니다. 그 중 약 23억 8천만명이 그리스도인 인구라고 합니다. 전 세계 인구의 1/3만 그리스도인 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항상 소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을 봅시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자녀로 선택하기를 기뻐하셨고, 어떤 자는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영광의 그릇으로 삼으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노의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토기장이의 손 안에 지은 받은 그릇 같아서 “왜 나만 구원해 주셨어요?”하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나와 같이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의 피값으로 구속하사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할 뿐입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말씀이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사, 그 분의 자녀 삼아주셨다는 이 사실은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Amazing Grace”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에 대한 찬양의 고백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게 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 아기들은 다 잡아 죽임을 당했으나, 갈대 사이의 상자에 누워 있던 아기 모세는 바로의 딸 공주가 그를 데려가 이집트의 왕자로 키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놓인 우리들을 건져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제가 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고 안 풀리고 불행한 것은 다 하나님 때문이야…”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안에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가는 분이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증거야.” “내가 이렇게 병들어 사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거 아니겠어?” “내 인생이 이처럼 비참하고, 하는 일들마다 꼬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싫어하시는 것을 의미해.”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복의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 양자 삼으셨습니다.
세상에 자기 자녀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는 미친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살인자라도, 도둑이라도, 악인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죄인인 인간도 그러한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그렇다면 목사님 지금 제 삶에 부인할 수 없는 이 고통과 아픔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내 삶에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이 괴로움이야말로 내가 하나님께 미움 받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나니아 연대기]라는 유명한 소설책을 쓴 C. S. Lewis 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사랑이 많으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고난을 겪도록 허용하실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이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 간섭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루이스는 다양한 답변들을 추론해 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고통이 없는 삶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 속의 고통의 유무가 하나님의 사랑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며, 고통과 사랑의 문제는 서로 연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발생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발생한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현재 삶의 큰 괴로움을 겪고 있으신 분들은 루이스의 주장이 쉽게 동의 되거나 공감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지금도 진해되는 고통, 죽음, 전쟁, 테러, 범죄 들을 보며 ‘정말 선하고 사랑이 충만하신 신이 존재하는가?’하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와 동일한 질문들을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C. S. 루이스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주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오직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된다고 말하는 케케 묵어 보이는 기독교의 이 성경적 가르침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과 아픔들이 왜 찾아 왔는지, 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 고통과 아픔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내게 주어진 고통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을 붙들게 만들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빚어간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내 삶 속에 부인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양자 삼으셨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이 연약한 존재를 밤 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보다도 더 존귀하게 빚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의 자녀들을 향하여 [나의 보물들]이라고 부르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배롭게 여기고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했습니다. 종합격투기 선수인 추성훈씨가 자신이 발바닥에 딸 사랑이의 발바닥을 문신처럼 새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면 딸의 발바닥을 몸에 새겨 놓았을까요?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주님의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놓으셨습니다.”(사 49:16) [우리말 성경] 보아라.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적었다.”
천관웅이란 찬양사역자 목사님께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 가사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을 지은 하나님이 인간 손에 죽으셨네. 주가 싫어 멸시한 우릴 위해 죽임 당했네. 무엇을 위한 사랑인지 무엇을 위한 희생인지. 당신은 사랑에 눈 먼 주님” 추성훈씨 별명이 “딸바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자식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을 우리말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 [우리말 성경]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