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 [역사하시는 성령님] 시리즈 (4) 성령으로 충만함 (에베소서 5장 8-21절)

 


 

지난 주 월요일 인디펜던스 데이에 하일랜드 파크에서 퍼레이드 행렬을 겨냥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용의자 로버트 크리모 3세는 퍼레이드 현장 인근 건물 옥상에 올라가 최소 70발의 총을 난사했습니다. 이 사고로 총 7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88세의 스티브 스트라우스, 78세의 니콜라스 톨레도 사라고사, 64세의 케서린 골드스타인, 63세의 제키 손드하임, 그리고 37세의 남편 Keven McCarthy와 35살의 아내 Irina McCarthy 부부가 사망자의 명단에 올라가 있습니다.

하이랜드 파크 주민인 McCarthy 부부는 2살짜리 아들 에이든(Aiden)을 데리고 퍼레이드에 갔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수십 발의 총격이 울리는 혼란한 상황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지역 주민들은 살아남은 2살짜리 아이 에이든 McCarthy를 발견했습니다. 에이든의 외할아버지 마이클 레브버그씨는 사위가 손주 에이든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초에 맞았다고 설명하면서 죽은 사위 케빈의 시신이 에이든을 보호하였다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마이클 할아버지는 손자 에이든에게 “부모님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냐?”하고 말하며 이 상황에 대해서 에이든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이랜드 파크 총기 난 사건으로 현재까지 7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님들께서도 깊은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과 끔찍한 사건을 겪은 하이랜드 파크 주민 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위로가 큰 상심을 당한 유가족들과 하이랜드 파크 주민들과 함께 하길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서론] 염세 철학에 관하여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라는 작가가 그의 책에서 소개한 예화입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염세 철학을 가르치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어느 교수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염세 철학]이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괴로움을 뜻하며,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지가 소멸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염세 철학]을 주창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우리에게 [데미안]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헤브만 헤세], “신은 죽었다”고 말한 철학자 [니체]도 염세 철학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염세 철학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허무하고 공허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망치를 가지고 아기를 쳐 죽여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뭐 이런 극단적인 학문이 다 있나?’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21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였고 따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케임브리지 교수는 강의를 끝내고 연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수강생 중 하나가 방에 찾아와 교수의 머리에 총을 들이댔습니다. “교수님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염세 철학은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삶을 고통으로 인식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총을 든 학생은 교수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삶은 고통이고 죽음은 자유를 준다는 사상처럼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참 된 자유를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교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창 너머 난간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학생 일단 진정하고 총을 내려놓겠나. 우리 침착하게 나가서 이야기 하세.” 그러자 학생이 묻습니다. “교수님 방아쇠를 당기기 전 한 가지 확실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수님 지금 살고 싶으십니까?” “살 수만 있다면 자네에게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요? 그럼 교수님 노래를 한 번 불러 보시지요.” 창 밖 난간에 매달린 교수는 학생이 시키는대로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 때 학생이 두 발의 총을 쐈습니다. 교수를 향해 쏜 것이 아니라 허공을 향해 쏘았습니다. 학생은 염세 철학을 주장하는 세계적인 권위자 자신도 실제로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염세 철학과 다르게 성경은 사람의 생명을 존귀한 것으로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써 우리 모두의 삶은 가치가 있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이는 단 한 사람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는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에 교사로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여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연주가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의사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일에 시간을 들여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정말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에베소서의 저자인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의 지평]

  1.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배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ㅊ” 현재 내가 처한 독특한 상황과 기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분별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염세주의에 빠셔서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자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날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인지를 자세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15-1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자신의 생활을 늘 살펴보며 어리석은 자처럼 함부로 마구잡이 식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시험하여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을 낙을 삼고, 명철한 자는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낙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길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길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술에 취하여 살아가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1. 술 취하지 말라

먼저 어리석은 삶으로 대표되는 술에 취하여 살아가는 삶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왜 사도 바울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러한 삶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 생활은 방탕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삶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술에 취한 자가 어찌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자에게 운전대로 맡길 수 없듯이, 술에 취한 자는 자신의 삶 또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영혼을 마비시키는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중력에 끌려가지 아니하도록 저항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영적인 삶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술에 취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다른 모든 존재들에 대한 경계도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처럼 술에 취하고, 세상에 취하여 살아가는 삶을 어리석은 삶으로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1.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술에 취하여 살아가는 삶과 대조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삶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성도들을 가리켜 모두 한 성령을 ‘drink’(마시게) 된 자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술과 성령을 대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강조점은 무엇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성령님이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지 우리의 영혼이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 성령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순간, 그 다른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어리석은 일들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술에 취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똑바로 걷지 못하고 행동도 절제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삶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며, 절제된 삶을 살아갑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을 더 찾듯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이 말씀은 단번에 충만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술에 취한 사람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총 3가지 삶의 수단을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배, 감사, 섬김 입니다.

에베소서 5장 19-21절은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서 5장 19-21절의 말씀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너희가 예배하리라” 본문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19-21절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에 종속되지 아니하고 또 다른 권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라. 찬양도 해라. 감사해라. 피차 복종해라.” 이런 식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석은 바로 19-21절을 성령에 의해 충만함을 받는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원문 헬라어의 문법과 가장 잘 맞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로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엡 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 찬송,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들의 음악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며 예배드릴 것을 의미합니다. 19절을 보면 무엇보다 예배 드리고 찬양하는 자는 ‘마음으로’ 주께 찬양 드려야 합니다. 마음 없이 입만 뻥긋뻥긋 하는 찬양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따라서 찬양도 우리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이야 말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그 분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새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구약 시대 때 주의 성전이 언제 영광으로 가득했습니까?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찬양하며 주님께 예배 드릴 때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여 졌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 드리는 시간에 성령님께서 그 분의 백성의 마음과 삶에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릴 때 성령께서 임하셨고,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릴 때 성령께서 교회에 핵심적인 지시사항들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 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 드리는 이 시간 이 자리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님이 드러나는 예배를 통해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때 우리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삶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드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이 내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예상치 못한 불행과 아픔이 찾아올 때 감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로 그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실라와 함께 심하게 매를 맡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옷은 찢어졌고, 몸은 매로 맞아 피멍 들었으며,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고,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한 밤 중에 갑자기 큰 지지인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매여 있던 쇠고랑도 벗겨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주님께 감사드릴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를 존중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며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성령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무례하지 아니합니다. 이따금씩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상대방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비방, 욕설도 서슴지 않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형제, 자매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형제 자매를 섬기고 또 그들을 위해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천사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옵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것을 보셨으며, 너를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를 더 자세하게 바꾸어 말하면 “고넬료야 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선물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제물로 올려졌다. 네 자선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 하나님께서 너의 구제를 기억하고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며 살아가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는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술에 취한 자처럼 세상의 것들에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고, 영혼과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살아가는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찬양하는 자리에 계십시오. 어떤 형편에 서든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힘들고 괴로운 날에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감사하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살아가십시오.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청중의 지평]

  1. 사람은 무언가에 미쳐 살아간다.

사람마다 인생에 낙으로 삼는 것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포츠]에 빠져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농구, 야구, 미식축구 등 스포츠에 미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들도 많고, [테니스]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넷플릭스]와 같이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한 이후로 밤새도록 영화나 드라마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유튜브] 영상 보며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종일 [SNS]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홈쇼핑]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데 미쳐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 미쳐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둑]에 빠져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볼링]이나 [당구]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또 어떤 사람들은 [술]에 빠져 살아가기도 하고, [도박]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약]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연예인]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에 미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미쳐 있는 그것이 우리 삶을 움직이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삶의 낙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 하나 좋아하는 것 없이, 아무런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무언가 열정을 다해 살아갈 만큼 푹 빠져서 미쳐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만, 행여 우리가 미쳐 살아가는 그 존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데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오히려 빼앗아 간다면 그것들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하십시오.

 

  1. 미쳐 살아가는 반복된 삶 끝에 허무가 찾아온다.

사람이 이처럼 무언가에 푹 빠져 살아가는 이유는 마음 속에 있는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마치 삶에 구멍 난 자리를 채워가듯이, 삶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은 모든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런 욕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에 빠져 있든지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채우고자 했던 그 존재를 어느 정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 얻게 되는 기쁨과 만족이 반복되다 보면, 이전에는 큰 기쁨과 만족을 주었던 존재나, 물건이나, 특정한 행동들이 이제는 잠깐 동안의 기쁨과 만족 밖에 줄 수 없을 뿐 더러, 오히려 큰 결핍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공허’와 ‘허무’(vanity)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허무’라는 이 감정이야 말로 세상 그 무엇으로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구멍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만드는 가장 확실한 감정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이 허무한 세상을 정면으로 인식하고, 그 가운데 인간의 영혼에 있는 결핍을 채워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말씀과 청중의 지평]

  1. 우리는 무엇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삶을 채우며 살아가야 할까요? 술에 취하여 살아가듯 우리에게 기쁨을 약속하는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에 취해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아가야 할까요? 어리석고 허무한 삶의 방식을 벗어나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1. 우리는 어떻게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와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 드리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형편 가운데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주를 믿는 형제 자매들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공허와 허무를 극복하고,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참된 만족과 기쁨이 주어지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