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3 [역사하시는 성령님] 시리즈 (3) 성령의 내주하심 (로마서 8장 9-17절)

서론. ‘Why’로 시작하라
혹시 TED라는 이름 들어 보셨습니까? 미국의 비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강연회 이름입니다.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학술 강의]라는 취지로 인터넷에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업로드하여 전 세계 사람들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각종 분야의 유명인들과 전문인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평생의 노하우와 전문지식과 인생에 대한 탁월한 통찰들을 쉐어합니다. TED Talk는 ‘Youtube’와 같이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보는 강의 영상 웹사이트입니다. 이 TED Talk 중에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Top 5 영상’하면 빠지지 않고 순위에 올라가는 것이 바로 지난 2009년 [Simon Sinek]이란 사람의 강의입니다. 그 강의의 제목이 [How great leaders inspire action](위대한 리더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는가?)입니다. 이 강의는 너무 유명해져서 [Start with why]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미국 내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도 아마존 웹사이트 Entrepreneurship(기업 정신) 분야, 컴퓨터 기술 산업 분야 도서에서 이 책이 1위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영향력도 대단히 큽니다.
[Simon Sinek]의 강의의 핵심은 [Golden Circle]입니다. Simon Sinek 이 연구한 결과 역사를 바꾼 사람들,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 인류에 공헌하고 세상을 바꾼 사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이지만 제일로 중요한 그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오늘 아무나 붙잡고 “선생님 무슨 일을 하십니까?”하고 물으면 “네 저는 빵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네 저는 학교 선생님입니다”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대답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빵을 굽는 일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진 직업이나 하는 일에 대해서 노하우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 “지금 하는 일을 왜 하고 있습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익을 만들기 위해서요”, “돈을 벌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익 창출은 항상 일에 대한 결과일 뿐 그것이 일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 만드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을까?”라는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일을 하며 재미와 열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직장에서 열정을 갖고 몰입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먼저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통해서 커뮤니티에 유익을 주고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일에 대한 열정과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또한 내가 그 일을 할 만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 기술과 지식이 날마다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인간은 일하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내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좋은 곳으로 변화한다는 의식의 맥락을 갖게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보람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이 이야기를 하나의 다른 이야기와 연결해 보고 싶습니다. 작년 2021년 한국 통계청에서 작성한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의 50-60대에 비해서 20-30대의 종교인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60대 이상은 약 60%가 종교를 가장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는 것이죠. 그런데 2021년 기준 대한민국 20-30대 중 무종교 비중이 약 70%에 도달했습니다. 교회, 성당, 법당 다 통틀어서 가지 않고 종교랑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비중이 70%나 된다고 합니다. 저도 통계 보면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까?’하고 의구심이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젊은 청년층들의 교회에서 이탈하는 현 상황을 보며 이 통계를 아예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즘 20-30대 젊은 층들은 종교를 갖지 않을까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가장 큰 이유가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가장 컸습니다. 성직자들의 돈 문제, 성적 문제, 또 종교인들의 이중성, 가식적인 모습 등이 종교를 갖지 않는 압도적인 이유였어요.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여유가 없어서’라는 이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사는 것도 바쁜데 일요일에 교회 나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할 시간적, 정서적 여유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2021년 통계에서 앞의 모든 이유를 다 뒤엎고 통틀어서 절반 이상의 20-30대가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없어서’입니다. “교회가 보니까 목사님이 내 삶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더라.” 삶과 신앙의 괴리감을 느끼며 신앙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교회에 갈 필요를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죠. 앞서 Simon Sinek의 강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왜’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 교회에 가야 하는데?”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20-30대 자녀나 조카 중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있을 거에요. “교회 가자”하고 자꾸 이야기해도 “왜? 교회가 나한태 뭘 해줄 수 있는데? 예배 가도 맨날 목사님이 내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는데 내가 교회 가서 뭐해?” 이런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돌아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신앙생활 하고 있을까요?’, 왜 우리들은 이토록 먹고 살기도 피곤하고 바쁜 세상 속에서 시간을 내어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왜’라는 질문을 함께 해결해보고자 합니다.

[말씀의 지평]
1.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영과 목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에게 2가지 죽음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몸의 죽음 곧 육신의 죽음입니다. 우리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이 곧 육신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이 두 가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와 저주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3:23) [새번역성경]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를 범하였고,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히 9:27) [우리말성경]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죽은 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심판이 바로 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는 영혼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즉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오늘 말씀 로마서 8장 9-11절에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이 거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특징은 영혼의 죽음을 피하게 되고, 또한 육신의 죽음도 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 부모님은 예수님 열심히 믿었는데 돌아가셨고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육신의 죽음을 피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맞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육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죽음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다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참예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 믿고 살아가다가 내가 죽은 이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성령께서 그 날에 죽은 우리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사람은 영혼의 죽음 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도 이겨내게 됩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잠자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사 우리에게 친히 부활이 있음을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생활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죄악의 저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들의 영혼과 몸을 다시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사건을 가리켜 [중생](Regeneration) 또는 [거듭남](Rebirth)라고 합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께 입양되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이 거듭난 성도들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우리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본문 로마서 8장 14절 말씀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 중 하나가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우리의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통해서 우리 삶을 인도해 가십니다. 때로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의 은혜로운 대화를 통해서 우리 삶을 격려, 위로하기도 하시고, 교회 공동체 또는 개인의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 삶을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고백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살아가게 하십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가게 하십니다. 내 마음 속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우리 영혼은 더 큰 기쁨과 만족과 보람 그리고 성취감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됩니다. 왜 우리는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로 말미암아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3.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임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죽을 몸과 죽을 영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찾아올 새로운 만물의 상속자가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안에서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15-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동에서 대대적인 건설 붐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한국의 많은 아버지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동으로 파견 갔습니다. 당시 중동 가서 일하면 한국에서 버는 평균 연봉보다 작게는 약 1.5배나 더 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회라고 여기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중동에 가서 일하기 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무차별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험 봐서 뽑았습니다. 1970-80년대 사우디 가는 비행기 표 값이 얼마나 비쌌겠습니까? 아버지들이 한 번 중동으로 파견가면 수년 동안 집에 못 돌아왔습니다. 먼 타국에 가서 우리 아버지들이 타일, 미장, 도장(페인트칠), 조적(벽돌 쌓기), 배관, 철근, 목공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국제 전화가 얼마나 비쌌습니까? 영상 통화도 없었습니다. 타지에 나간 아버지들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어린 자녀들을 두고 온 아버지들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지갑 속 자식들 사진 꺼내 보며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아버지가 집을 떠나 저 멀리 해외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동안에도 자식들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어린 자식들은 기어 다니던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유치원생이 되었습니다. 2-3년이 지난 후 중동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무럭무럭 자라난 아들, 딸들이라고 해도 단 번에 알아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버지를 본 기억이 흐릿해서 아버지가 너무 어색한 거에요. 모르는 아저씨 같이 느껴져서 어색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가지 못하고 쭈뼛쭈뼛하고 서 있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들은 너무 어색해서 어머니 치마 속으로 숨습니다. 이 때 아이에게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무게야. 아빠가 우리 아무게 보고 싶어서 밤새 비행기 타고 왔어! 너가 가서 아빠 한 번 안아줄까?” 그제서야 엄마 치마를 움켜 잡어 숨어 있던 아이가 용기를 내어 “아빠?”하고 불러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맞나?’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입양된 자녀는 친자녀가 지니는 모든 권리와 특권이 부여됩니다. 15절에 사용된 ‘양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완전한 상속권을 가진 자녀로 입양되는 법적 용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빠’란 단어와 ‘아버지’란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아람어에서 [아빠]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아버지]란 단어는 아버지를 향한 존경의 표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15절에 사용된 “아빠 아버지”란 표현은 하나님을 향해 애정과 존경을 동시에 담아 부르는 호칭입니다. 깊은 존경심과 함께 높은 수준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아빠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만물의 상속자가 되는 복을 얻게 됩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가 가진 축복 중 하나가 바로 부모의 유산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릴 왕들로 세워 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온 만물의 상속자가 됨을 증거해 주십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 안에 함께 살고 계시는 성령님 곧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죽을 몸과 죽을 영을 살려 주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 됨을 증언해 주십니다. 이것이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청중의 지평]
본문 말씀을 우리의 현실과 삶으로 가지고 와 봅시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 대한민국 20-30대 젊은이들 상당수가 “신앙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교회, 성당, 법당 가도 내 삶과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무엇을 위해 종교생활을 해야 하나?”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교회를 출석할 이유나 필요성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이를 사냥하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필요성이나 이유를 깨닫지 못하면 교회 나갈 이유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권면하거나 가까운 그리스도인들이 지인들에게 교회 출석을 권유해도 좀처럼 교회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을 시간 낭비, 돈 낭비, 인생 낭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디 대한민국 20-30대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와 같은 신앙 무용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들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님 예배 드리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 말씀 읽고 살아가는 것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으면 이와 같은 신앙 무용론에 빠져 예배, 기도, 말씀이 주는 유익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보기도 하고 만나기도 합니다.
혹시 지금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어느 때부터 마음 속에서 된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 만족 이런 것이 사라진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 정말로 가치 있고 보람 찬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하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삶은 아닙니까? “지금 나는 방황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삶의 의미와 목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감각적인 일들을 하느라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며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나?”하고 가끔씩 찾아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에 마음 한 구석에서 씁쓸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원래 인생은 허무한 거지”, “인생 별거 없어. 다들 이렇게 허무한 세상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살아가는 거지”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있지는 없습니까? 만일 지금 이 이야기가 본인의 이야기라면, 신앙의 무용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조금 전 제가 한 이야기가 본인에게 해당되었다면 다음 3가지의 질문을 말씀으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청중의 지평]
첫째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What am I?)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성령님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다스릴 상속자입니다. 이와 같은 정체성이 바로 서게 될 때 신앙의 무용론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방향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How should I live?)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올바른 방향성이 회복될 때 비로소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만족과 보람 그리고 성취감을 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삶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Why should I live?)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죽을 몸과 죽을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삶의 정체성, 방향성, 진정성 이 세 가지의 질문이 해결되지 아니하면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신앙 무용론에 빠져 무기력하게 신앙생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이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내주하심]이야 말로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그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할 만물의 상속자들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인생의 방향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육신대로 살아갈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몸과 죽을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내 탐욕을 위해 살아가지 아니하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진정성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의 몸은 심장이 멎을 때 죽지만, 사람의 영혼은 꿈을 잃을 때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삶의 정체성, 방향성, 진정성이 있을 때 비로소 꿈이 있는 삶, 밝은 소망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정체성, 인생의 방향성, 영혼의 진정성에 대한 말씀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 그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만물의 상속자이심을 증거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방향성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몸과 죽을 영혼을 살리셨으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진정성 있게 살아가면 됩니다. 이와 같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만족되고, 후회 없는 보람된 삶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날마다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