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4 부패한 종교, 불의한 정치 (요한복음 18장 39절 – 19장 16절)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인에는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전통적 관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관례를 사용하여 예수를 살려줌으로써 그가 사형죄를 지었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형에 처할 아무런 혐의가 없는 예수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유월절에는 내가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는데 너희들을 위해 ‘유대 사람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요한복음 18장은 계속해서 총독 빌라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고, 사형에 처할 만한 사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과 빌라도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빌라도의 제안에 유대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유월절에 죄수를 사면할 권한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으나, 사면될 사람을 선택하는 권한은 유대인 군중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빌라도의 제안을 거부하고 군중은 바라바라는 강도를 풀어줄 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했습니다. 40절에 나온 ‘강도’라는 단어는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사로이 남의 물건을 빼앗은 절도죄를 지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만들고 무장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라바’가 로마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정치적 테러를 버린 인물이며, 당시 로마 제국을 대항하여 싸웠던 셀롯당, 열심당원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라바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폭력과 살인을 일삼은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과 폭력과 살인을 일삼은 바라바를 대조함으로써,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ㄹ대신하여 죽으시는 모습을 한 번 더 부각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군중의 요청대로 유월절 특사로 바라바가 뽑혔고, 예수님은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분노를 만족시켜 주고 풀어주기 위해 예수님을 잡아 데려다가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때렸던 채찍은 가죽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끝에 납이나 예리하고 뾰족한 못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내리칠 때마다 채찍에 맞는 사람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찢어집니다. 그 고통을 우리가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이 당시 로마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보통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에 이러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채찍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죄수들 가운데는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전에 채찍질을 견디질 못하고 죽는 이들이 허다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얼마나 채찍질을 험난하게 당하셨으면, 이후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를 힘조차 없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채찍질은 사람을 죽일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전 약 700년 즈음 선지자로 활동했던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보십시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채찍에 맞으신 것도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상처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 병이 나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고 그를 고발했습니다. 이에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주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엮어 만든 관을 씌웠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어진 가시 면류관은 조롱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엉성하게 만든 가시 면류관이 예수님 머리에 씌어지도록 로마 병사들이 힘으로 누르지는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는 가시에 찔렸고, 가시들은 살점을 파고들어 매우 심한 육체적 고통을 더했을 것입니다. 또한 가시에 찔려 나는 피로 인해 예수님의 얼굴과 머리 전체가 피로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자색옷, 보라색 옷은 로마 황제가 입던 옷의 색깔로 일방인들이 입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고발당한 예수님을 모욕하기 위해서 자색옷을 예수님께 입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온 몸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뜯겨져 피 범벅입니다. 이미 주님의 몸은 이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온 몸이 피로 물든 예수님의 머리에 로마 병사들이 만든 가시면류관이 씌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끔찍하고 고통스런 아픔을 당하고 계신 바로 그 때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왕을 섬기는 신하인 척 연기를 하고 절을 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치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3절에 “손바닥으로 때리더라”는 헬라어는 계속 이어지는 동작을 묘사하는 용법으로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한 사람만 와서 예수님의 뺨을 때린 것이 아니라, 여러 군병들이 돌아가며 차례대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왕을 섬기는 신하인 척 혹은 외국의 사신인척 연기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9절 말씀을 보면,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었다고 했고, 갈대 몽둥이로 예수님의 머리를 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게 갖은 조롱과 모욕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죽을만큼 잔인하게 채찍질한 빌라도는 한 번 더 군중에게 예수가 사형에 처하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그가 예수님께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알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나오시니, 유대인들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얼굴은 로마 병사들의 주먹에 여러 차례 맞아 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서 일그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군병들이 입힌 낡은 자색 홍포는 예수님의 피로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처럼 처참하게 채찍질 당하고 조롱 당한 예수님을 보여주며 유대인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이 즈음이면 만족하지 않느냐? 이 무죄한 사람을 꼭 죽여야 성이 풀리겠느냐?”하는 어투로 군중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잘못된 재판을 통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빌라도의 예상과 다르게 유대인들은 더욱 성을 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듭 소리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며 로마 제국을 대항한 내란 음모죄로 고발했습니다. 내란 음모에 가담한 죄가 인정되면 로마인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로마법을 빌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요청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였기에 유대법으로 해도 돌에 맞아 사형에 처할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27장 19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빌라도의 아내가 전갈을 보낸 장면이 나옵니다. 전갈에 빌라도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저 죄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 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아내의 전갈을 무시한 채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자, ‘혹시 이 예수가 어떤 초월적인 신비한 존재는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입니다. 로마에는 로마-그리스 신화가 있지 않습니까? 신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인간들 사이에 거한다는 신화 말입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혹시 예수님도 신적 존재가 아닐까?’, ‘신적 존재인데 모르고 괜히 예수 건드렸다가 내가 벌 받는 것 아니야?’하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죠. 두려움이 생긴 빌라도는 한 번 더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여기서 빌라도가 “너는 어디로서 왔느냐?”하고 묻는 것은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신의 아들이냐? 아니냐?”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심으로 죄수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받아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그가 가야할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무죄하심을 입증하거나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시고 침묵하심으로 십자가 처형을 확정하셨습니다. 무죄를 입증할 변론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빌라도는 말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냐? 내가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총독 빌라도의 말 그대로 죄수가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 없이 그에게는 죄수를 정죄하거나 사면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가 가진 권세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 정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또한 예수님 자신의 자발적인 순종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라고 보는 성경 학자들도 있는 반면에, 대제사장 가야바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보면 지금 예수님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때 가룟 유다는 이미 자살한 이후였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은 가룟 유다가 아니라,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네게 넘겨 준 자”를 가룟 유다 보다는 유대 종교지도자 중 총 책임자인 대제사장 가야바로 해석합니다.

12절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군중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를 풀어주면 안 된다고 반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로마 황제에 대항하는 반역분자로 고소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하는 예수님을 로마법대로 십자가 처형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빌라도가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그를 몰아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반감을 품고 로마 황제에게 총독 빌라도가 황제에 대한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투서라도 쓰는 날에는 빌라도의 정치 생명도 위태롭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됩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협박과도 같은 외침에 예수의 무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을 버린 채 자신을 위협하는 군중들의 소리를 들어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재판을 열어 예수님을 범죄자들이 앉는 재판석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는 유대인의 왕인 예수를 정말 죽이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로마 황제 외에는 왕이 없다고 소리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소서”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군사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주님을 몇 번이나 풀어주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양심과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성난 군중이 두려워서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진실을 숨긴 채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군사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입을 꾹 다무시고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진 은혜의 빚은 평생 아니 영원토록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날마다 그리고 영원토록 찬양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