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던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칼과 몽둥이를 손에 들고 온 무리를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을 버려 두고 다 도망쳤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주님을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라는 사람은 현직 대제사장이 아니라 전직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을 지냈습니다. 그후 그의 아들 네 사람도 대제사장 직분을 지냈으며,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 대제사장인 가야바 또한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직은 종신직입니다. 죽을 때까지 맡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유대인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주 대제사장을 교체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안나스를 대제사장을 여겼고, 그를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최고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아닌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한 것부터 이미 법적인 절차로 볼 때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사형 시키는 것이었음으로 유죄나 무죄냐 판정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재판이 열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처형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나스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지 그 진위 여부를 묻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누리고 있던 권력을 위협하는 예수를 죽일 명분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안나스가 직접 심문한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안나스의 사위이자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가야바는 예수를 죽여야 하냐 말아야 하냐 논쟁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 곧 민족을 살리는 일이기에 그를 죽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조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모으게 되면 로마 제국을 자극하여 로마가 유대인들을 탄압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예수를 죽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9-52절 말씀을 함께 찾아서 읽어봅시다. “(11: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비록 대제사장 가야바는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님이 죽는 것이 온 민족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만, 요한복음 11장 5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입술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인 죽음임을 나타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해 공식적인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실세를 잡고 있던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 이 두 사람 모두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망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병들이 횃불과 병기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결박해 가자, 모든 제자들이 달아났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사람들 몰래 예수님 뒤를 좇아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다른 제자가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자신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심문한 안나스의 집까지 갔습니다. 요한으로 여겨지는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뜰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에 다른 제자는 문 지키는 여종 아이에게 문 밖에 서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종이 가서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이 모습을 함께 보겠습니다. 16-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주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 했습니다. 그러나 여종이 그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며 부인했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17절에 ‘문 지키는 여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문 지키는 나이 어린 여자 아이’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신 있게 예수님께 약속 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베드로는 칼을 차고 있는 군대나,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경비대의 협박이 아니라,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하고 여자 아이의 물음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하고 매주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세상 앞에서 두려움에 우리 믿음을 져버리거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 손해 볼까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보다, 도리어 자신은 실제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섣불리 확신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연약함과 믿음 없음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임을 겸손하게 깨닫고, 세상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어린 여종의 물음에도 무너진 베드로의 연약함과 대조적으로,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대제사장에게 심문 받는 가운데도 당당히 맞서시는 예수님의 담대한 모습을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떠한 위협과 폭력 속에서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19절을 봅시다. “(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안나스는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호칭하였는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호칭하며 따라다녔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교활한 안나스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로마 제국에 대해서 항거하는 쿠테타 세력으로 몰아 일망타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고소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를 음해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심문하였습니다. 안나스의 심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20-21절 말씀입니다.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비밀조직을 운영한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공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내용은 그 말씀을 들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면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의 법은 율법에 근거하여 피고에게 자백을 강요하여 유죄를 입증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안나스에게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안나스가 법대로 심문하지 않고 있으며, 예수님에게 유죄가 있음을 자백하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정당한 항의에 대하여 22절에 보면, 대제사장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뺨을 매우 세게 쳤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정의의 왕 되신 주님께서 부당한 판단을 받으시며 폭력까지 당하셨으니 이 얼마나 불의한 장면입니까? 예수님은 올바르지 않은 법적 절차에 대하여 정당하게 항변하셨으나, 부당한 폭력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 당시 대제사장은 최고 권력자로 잘못 보이면 자칫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 없었던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앞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안나스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추운 밤 바람을 피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한번 “아니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 군병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왔던 자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이 그 사람과 함께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소!”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한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니, 바로 그 순간, 닭이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 곁을 떠나도 자신 만큼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 곁에 머물겠다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가 이 밤 닭이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당한 재판을 당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불의 앞에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처럼 불의와 고난을 견디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