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선물’(gift, tribute)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소제는 번제와 함께 드려졌습니다. 번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흠 없는 제물을 바쳐 드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또한 소제는 헌신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헌신예배와 비슷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님께 동일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레위기서에 나와 있는 다섯 가지 제사 중 소제만 유일하게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소제는 동물의 피가 없는 제사입니다.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에 피가 없다는 것은 소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다른 제사는 죄사함을 위해 제물인 동물의 피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소제는 이미 번제를 통해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기 위한 제사였기 때문에 동물의 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말에 ‘소제’라는 말에 ‘소’라는 단어는 무슨 뜻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피로 안 드리니까 작은 제사라서 ‘소제’라고 하나보다” 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소제는 크다 작다 할 때 ‘소’가 아닙니다. 한문으로 ‘하얗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소제’란 단어를 풀이해보면 ‘하얀 제사’란 말이 됩니다. 왜 하얀 제사일까요? 곡식을 맷돌에 놓고 빻아서 만든 밀가루가 무슨 색이죠? 하얗죠? 소제는 바로 곡물을 갈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2장 1절 말씀을 봅시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무엇으로 드립니까? 고운 가루로 드립니다. (fine flour)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곡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빻아 고운 가루로 드립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릴 때 아무렇게나 내가 원하는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드려야 합니다. 곡물이 맷돌에 갈아져서 고운 가루가 되듯이, 내 옛 사람도 말씀의 맷돌에 빻아져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곡물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가루로 갈아 와야 하듯이, 세상 살아가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찌들어 살던 과거의 모습을 다 빻아버리고, 세상을 좇아 살아가던 욕심 탐심 다 갈아버린 후 고운 가루로 나와야 합니다.
1절에 기록된 ‘고운 가루’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보면 ‘고급 가루’로도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고급스러운 요리 재료였습니다. 또한 1절 후반절을 보시면 고운 가루에 기름도 붓고, 유향도 넣어야 합니다. ‘기름’과 ‘유향’은 당시에 상당히 비싼 물품이었습니다. 비록 소제는 동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값싼 제사는 아닙니다. 값비싼 소와 양을 잡아 드리는 번제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귀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렇게나 값싼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성 들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고운 가루만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그 가루를 가지고 요리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안될까요? 귀한 손님이 집에 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밀가루를 식탁에 올리며 “여기, 최고급 밀가루가 있습니다. 사양 말고 드십시오.” 하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밀가루를 가지고 맛있는 빵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밀가루를 가지고 맛있는 잔치국수를 만들고, 또 어떤 분들은 밀가루를 가지고 수제비도 만들고, 전도 부치고 혹은 칼국수도 만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고운 가루만 드려도 좋지만, 더 정성을 들여서 하나님께 좋은 것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직접 드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더 하나님께 내 마음의 정성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마음에 자원하는 대로 고운가루를 가지고 요리된 음식을 만들어서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번제를 다룰 때 제물로 가지고 올 수 있는 동물의 종류가 3가지 였습니다. 소, 양(염소), 새… 이에 비해 소제에서는 요리 방법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븐에 구운 요리. 둘째는, 후라이팬에 볶은 요리, 세번째는 솥에 삶은 요리, 이렇게 3가지 입니다.
한 번 종류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오븐에 구운 것 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2: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병을 드릴 것이요” 4절에 화덕이란 말이 바로 오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화덕 피자가 유행이죠? 특수하게 만든 오븐에 구운 피자 입니다. 하나님은 고운 가루를 화덕에 구워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중간에 ‘무교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무교병은 도너츠처럼 가운데 구멍이 비어있고, 반지모양처럼 된 빵을 말합니다. 또 4절을 보면 ‘무교전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말하는 부침개(지짐이), 전하고 비슷합니다. 인도식당에 가면 ‘난’이라고 해서 얇고 넓게 구운 빵이 나오는데요. 무교전병이 그와 비슷합니다. 소제의 첫번쨰 종류는 화덕에 구운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후라이팬에 볶은 것이었습니다. 5절을 봅시다. “(레 2:5)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호떡 장사하는 분들 보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반죽 만들고 큰 쇠판에다가 올려서 조리하지 않습니까? 5절에 번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요리로 말하면 후라이팬에 볶은 것이죠.
셋째는 솥에 삶는 것이었습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레 2:7)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수제비나 국수처럼 밀가루 반죽을 물에 넣어서 삶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븐에 구워도 드리고, 후라이팬에 볶아서 드리고, 솥에 삶아서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제는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양한 제사에 대한 평가가 9절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무슨 냄새 입니까? 향기로운 향기 입니다. 이 표현 값비싼 소를 잡아 번제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평가와 동일합니다. 비록 소보다 값은 못하지만, 정성을 들여 오븐에 굽고, 후라이팬에 볶고, 솥에 삶아서 드린 제물도 하나님 보실 때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제사가 입니다.
소제를 드릴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각양각색의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가진 달란트와 은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감사와 헌신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사실 소제에서 중요한 내용은 ‘조리방식’ 즉, ‘어떻게 조리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조리할 때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과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소제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들어가거나,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소제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 두가지와 들어가야 하는 것 세가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 두 가지입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 ‘누룩’과 ‘꿀’ 이 두가지는 넣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럼 하나님께서 누룩과 꿀은 넣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두 가지의 공통점은 누룩과 꿀이 음식을 변질시킨다는데 있습니다. 누룩과 꿀이 들어가면 음식이 부패하고 상하게 됩니다.
먼저 ‘누룩’을 보겠습니다. 누룩은 오늘날 제빵사들이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이스트’ 입니다.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를 넣으면 반죽이 발효가 되어서 부풀어 오릅니다. 누룩은 급속한 변질을 가지고 오는 것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누룩으로 인해 변질된 소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고운가루’가 거룩한 삶을 상징한다면, ‘누룩’은 거룩한 삶으로부터 부패되고 변질되게 하는 죄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단어가 나오면 대부분 ‘거짓 가르침’과 상관이 많습니다. 잘못된 교훈은 성도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거룩함을 부패하게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거짓 교훈, 말씀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버려야 합니다.
두번째로 소제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은 꿀입니다. 꿀은 달콤한 죄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꿀도 넣으면 음식이 발효됩니다. 음식이 변형되고 부패가 일어나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가 달콤한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소제에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달콤한 죄의 매력에 빠져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제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은 누룩과 꿀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소제에 들어가야 할 것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름, 유향 그리고 소금입니다.
첫번째로 기름입니다. 레위기 1절 말씀을 보면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부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름은 성경에서 ‘성령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지지만, 반대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집니다. 성도들의 삶은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안된다. 성령이 떠나시게 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커진다. 세상에 있는 것 없어도 하나님 얼굴 하나만 바라보면 충분합니다.
소제에 들어가야 하는 두번째 것은 유향입니다. 유향은, 감람과 나무에서 채취한 송진입니다. 그 진액을 말렸다가 나중에 태우게 되면 연기가 나면서 향기가 나옵니다. 유향은 잡냄새를 없애고, 대신 향기로운 향을 내줍니다. 성도의 삶에서 유향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유향처럼 아름다운 향기로 올라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향기롭게 받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향내가 됩니다.
소제에 들어가는 마지막 세번째는 소금입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누룩과 꿀이 음식을 부패하고 상하게 한다면, 소금은 그 반대입니다. 소금은 상태를 신선하게 유지시켜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제에 소금을 반드시 넣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13절 말씀을 보면, 소금을 가리켜 “언약의 소금”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금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언약인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소제에 소금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