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8 그리스도를 섬기듯 하라 (에베소서 6장 7-8절)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분들은 코너스톤 교회의 제직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 교회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코너스톤 교회의 일꾼들입니다. 제가 말하는 교회란 건물로써의 교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써의 교회를 포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최선을 다하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고 섬겨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섬겨야 할까요? 오늘 저는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 자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주께 하듯 섬기라
첫째로, 성경은 우리가 섬기는 일을 하되 주 예수를 섬기듯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에 잡히지도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배 시간을 통하여 찬양으로 기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말씀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해감으로써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구원받은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 그러한 섬김을 곧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굶주릴 형제를 위하여 밥을 차려주고 그에게 먹을 것을 줄 때,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밥을 차려드리는 것과 같이 보십니다. 우리가 헐벗은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옷을 벗어줄 때,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옷을 입혀드린 것과 같이 보십니다. 우리가 병들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제들을 방문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방문한 것과 같이 간주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곧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과 동일하게 보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말씀을 우리말성경 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마 25: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마 25:36)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 (마 25:37) 그때 의인들이 대답할 것이다. ‘주여, 언제 주께서 배고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마 25:38) 언제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맞아들였으며 언제 주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마 25:39) 언제 주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갔습니까?’ (마 25:40)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 곧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우리 구주 예수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 마포고등학교에 재학했던 김영태군은 두 팔이 없습니다. 6살 때 감전 사고를 당해 양팔을 잃은 김 군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두 팔이 없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란 얼마나 불안하고 염려가 많겠습니까? 아무리 부모가 아들을 위하여 이것저것 신경을 쓰고, 최선을 다해도 여전히 부모의 손이 닿지 않는 생활의 영역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부모는 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그런 두 손이 김영태 군 옆에서 그의 양팔이 되어 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최홍준 군이었습니다. 최홍준 군은 아침이 되면 영태 집에 찾아갑니다. 팔이 없는 친구 대신 책가방을 들어주고, 학습 준비물까지 꼼꼼이 챙겨 줍니다. 수업 시간에는 책도 펴주고,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김영태 군이 화장실 갈때도 최홍준 군이 함께 갑니다. 이들은 고3 때 “같은 대학에 입학했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서로에게 밝힌 뒤 목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지난 2003년도 12월 두 친구는 인하대학교에 수시모집에 나란히 입학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김영태 군을 옆에서 도왔던 최홍준 군은 그를 인터뷰하러 나온 신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우정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이어질 것입니다. 영태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작은 힘을 보탤 것입니다. 대학 4년 뿐만 아니라 남은 생활 죽을 때까지 영태 도와가면서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고 싶어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두 팔이 없는 김 군은 발가락으로 1분에 키보드 400타를 치며 워프로세서 1급, 정리처리기능사 자격즉 등 일반도 하기 어려운 일을 거뜬히 해 냈습니다. 또한 김영태 군은 꿈이 생겼습니다. “대학 때 동아리 활동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정해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영태 군의 부모는 “부모도 하기 힘든 일을 홍준이가 옆에서 매일 다독거려주고 도와주고 하니까 항상 고맙고 감사하죠”하고 말했습니다. 김영태 군의 부모에게 있어 최홍준 군이 자기 아들에게 배풀어 준 모든 사랑의 섬김은 곧 부모인 자신들에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이와 똑같은 마음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모든 행위가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 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섬기는 모든 순간이 사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분들을 찾아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삶을 나누며 진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병들어 아프고 마음에 상처 입은 분들의 위로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기피하던 사마리아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셔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며 그의 마음을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독자를 잃어버린 과부의 장례식장에 찾아가셔서 그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주님의 삶은 언제나 병들고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우리가 돌보아야 찾아가야 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것을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이 일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한 아버지를 둔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모습도 예수님의 삶과 비슷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 가득했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흉년을 피해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찾아온 이주민들, 부모가 없어 방황하는 아이들도 도시에 가득했습니다. 누가 이들을 먹였을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빈민들과 병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었고, 그러한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가 믿는 하나님이 참되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상대방을 위해서 그와 같은 수고와 사랑을 하면, 마음의 감정적인 사랑도 따라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까?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식하 준비하고, 천한 일, 더러운 일 등 다양한 봏사를 해야 했습니다. 따뜻한 집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TV보고 쉬는 것과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똥 냄새, 오줌 냄새 나는 현장에서 땀 흘려 봉사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쉽겠습니까? 이처럼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고 기피했던 일들을 초대교회가 감당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무엇이 초대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초대교회는 예수를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하고 안 다니는 사람하고 겉모습만 보면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자녀 키우고, 직장 다니고 그렇게 살아가 죽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인생의 주인이 그 자신에서 예수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람들이 기피하고 떠맡기 싫어했던 일들을 자원하여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들의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형제들을 섬기는 그 일들을 통하여, 사실상 그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그 자신의 영광과 탐욕을 위하여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구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삶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기독교 말하는 사랑의 모습은 언제나 이웃을 위한 수고와 희생을 통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더 많이 수고하십시다. 더 많이 희생하십시다. 그것이 우리 주인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2. 주께 하듯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
둘째로, 그리스도를 섬기듯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던 두 팔이 없는 김영태군과 그의 곁에서 양팔이 되어 준 최홍준 군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인터뷰에 응한 최홍준 군의 표정을 보면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켜서 하는 표정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그를 섬기는 것 또한 그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섬김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 누군가가 거울을 비추어 준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혹시 억울한 표정은 아닙니까? 아니면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찬양을 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부르고, 주님께 헌금을 드릴 때도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봉사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섬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교회에서 일하고 봉사하는 모든 원동력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봅시다. “(벧전 5:2) 여러분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떼를 잘 돌보십시오.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베드로는 우리에게 양떼를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대충이 아니라 잘 돌봐야 하며, 무엇보다 억지로 하기 싫은 태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표정에 대한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상상해 볼 뿐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평상시 사역하시며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하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성도들을 돌보았을까요? 저는 기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표정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가는 곳마다 핍박도 있었고,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그리고 욕설도 들어야 했으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자리잡은 기쁨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나온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흘러나오는 기쁨,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불러 주신 데 감사함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섬길 때, 주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고, 두 번째 열매가 바로 ‘희락’ 즉 ‘기쁨’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충만한 사랑과 기쁨으로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교회 일을 함에 있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참아가며 하고 있거나,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 마지 못해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 태도로 섬기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억지로 마지못해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섬기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준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교회 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기에 주를 위해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봉사를 해준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은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시편 100편 2절 말씀을 영어로 보면 “Serve the LORD with gladness”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3. 주께서 선행에 대하여 보답하여 주심
우리가 이와 같이 성실한 자세와 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길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선행에 대하여 보답하여 주실 것을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평생 화려한 금은보화가 가득한 왕궁에서 왕자가 되어 수많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정말 미련한 선택입니다. 부귀영화를 다 포기한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사실 모세는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이집트의 모든 보물을 갖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 이곳에서 잠시 받는 고난 보다 훗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실 상급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어떤 모습이라도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을 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우리들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땀 흘리며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곧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거나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좋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열심으로 사랑했으나, 도리어 사람들에게 오해 받고 미움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들은 다 잠시 후 지나갑니다. 성경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행한 모든 선들을 그대로 다 갚아 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모세도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이와 같은 완전하신 은혜를 깨달았기에 애굽의 모든 보화를 뒤로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쁨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코너스톤 제직 여러분, 이제 우리들이 교회를 섬길 차례입니다. 먼저 무슨 일을 하듯 사람을 섬기듯 하지 말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세로 섬기십시오. 둘째로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십시오.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 하는 태도로 하지 마시고, 정말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그리고 즐겁게 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선행과 봉사를 함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갚아 주시고 상 주심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을 기쁨으로 섬긴 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그의 삶에 더 큰 기쁨의 열매를 맺도록 넘치는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2022년 한 해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로 기쁜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큰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